소설리스트

124 (124/154)

124

다들 식량이 없는 상태에서 투덜거리는 모틸라가 철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녀는 벌써 2주 동안 계란, 감자, 빵만 먹은 상태였다. 오히려 발터가 더 다양한 음식을 먹었다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모틸라가 나오는 다른 것들을 전부 발터의 그릇에 밀어 주었으니까. 가아아아끔 나오는 고기와 땅에서 파낸 참마, 남아 있던 절인 과일 몇 개도. 마을 사람들이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그러모아 만들어 준 몇 개 안 되는 음식다운 음식도.

발터는 모틸라에게 먹으라며 자신은 안 먹겠다고 고집 피웠지만, 모틸라의 “아사는 힘들다?”라는 빈정거림은 견디지 못하고 그것들을 먹어 치웠다.

그래도 차가운 겨울은 먹을 것도 없어서 발터의 뺨은 말라 갔고, 잠들지 못하는 밤만큼이나 그의 눈 밑은 거뭇해져 갔다.

마을 사람들 모두 점점 말라 갔으니, 다들 힘든 겨울을 보내는 중이었다.

모틸라는 자신이 뱀파이어여서 밤에 몰래 나가 괴수의 피를 마시면 된다는 것에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주위에 강한 괴수들이 많아서 적어도 피 하나는 먹을 만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지옥의 식사도 발터에게 넘겨 버리고 싶으나, 이것까지 먹지 않으면 의심받을 게 뻔했다. 요즘 모틸라는 밤에 몰래 나가서 하는 흡혈만이 인생의 낙이었다.

“오늘 할 일은 뭐냐, 지옥의 요리사야.”

“우선 가장 시급한 건 장작 수급과 담장 수리, 그리고 건물 수리겠죠. 오늘도 무너진 건물들에서 장작으로 쓸 만한 걸 구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너는?”

“저는 오늘 저택에서 할 일이 조금 있어서 점심 즈음에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할 건데.”

모틸라가 ‘자기 혼자 가서 일하는 건 싫다!’라는 얼굴로 말했다.

발터는 모틸라의 그 표정에 ‘원래 영주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입니다’라고 한번 말해 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인제 와서 그런 걸 지적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 그냥 한숨이나 푹 쉬었다.

말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기엔 모틸라가 실제로 은인이기도 하고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보답하기 위해 돈 같은 거라도 쥐여 주고 싶었지만, 보증으로 말아먹은 인디고 가는 이 영지 말곤 남은 것도 없었다.

“저택을 뒤져서 팔 만한 것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오. 도와줄까? 나 안목이 상당히 좋은 편인데.”

“괜찮습니다. 그 안목이 필요할 정도로 좋은 게 있지도 않을 거고, 여기 일했던 이들이 거의 들고 날랐을 테니까요. 숨겨진 방이나 있을까 찾아보려는 중입니다.”

“도대체 여기서 일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도망을 잘 갔대? 충성심 어디?”

“원래 잘 오지도 않고 관리도 대충 맡겨 놓은 곳이었는데, 영주가 다른 영지들은 전부 파산시키고 온 거니까요. 믿음도 충성심도 없겠죠.”

“원래 영지에 있던 사람들은?”

“작위와 이 마을 빼고 다 망했습니다만?”

“와우.”

인디고 가문은 기사 작위를 물려줄 수 있는 세습 작위였기 때문에 몇몇 단승 작위 기사들이 있었지만, 화려하게 파산함으로써 다들 다른 주인을 찾아가 버렸다.

몇몇 남아 있던 자들도 이 마을까지 따라왔다가 조용히 한 둘씩 사라져 버리곤 했으니.

“너 진짜 망했구나.”

“제가 소식을 듣고 학원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남아 있던 병사들도 거의 도망갔더라고요.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아버지가 조금도 돌보지 않았거든요.”

“와……. 너무 심각해서 위로할 말도 안 떠오른다.”

“제가 와서 겨우겨우 추스르고 있었을 때, 도적들이 쳐들어오고. 그 말에 아버지를 찾으러 가니까.”

자살하셨더군요.

발터는 그 말까지 하고 입을 다물었다.

모틸라도 도저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우선 도적들을 막아 내느라고 시체를 치울 시간도 없었죠.”

오랜만에 농담이나 반박도 없이 침묵이 식탁에 맴돌았다.

“그, 삼삼한 위로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결국 모틸라의 입에서 나온 것은 틀에 박힌 말이었다. 그래서 발터도 그냥 감사하다는 말이나 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랑하는 것들을 돌아보러 가는 인생의 마지막 여행이 어쩌다 이렇게 됐지.

모틸라가 그렇게 생각하다가, 발터의 낮게 가라앉은 남색 눈을 보고 푹-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하느라 아예 차가워져 버린 마지막 감자 조각을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퍽퍽한 감자를 억지로 목구멍으로 욱여넣으며 모틸라는 자신이 먹은 그릇을 씻었다.

그리고 발터에게 일하러 간다고 하자, 그가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했고 그녀는 가볍게 손이나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틸라는 자신이 저런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얼마나 약한지 잘 알고 있었고 결국 투덜대면서도 겨울 동안 이곳에 머물게 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자칭 타칭 미식가인 뱀파이어에게 여긴 너무 가혹한 환경이라구…….”

눈가의 눈물 한 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산해진미와 온갖 보석들에 둘러싸였던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잘하면 눈물도 흘릴 수 있을 거 같아…….

모틸라는 잔해들을 치우며 장작으로 쓸 만한 것들을 찾는, 먼지와 그을음이 실컷 묻을 일을 하기 전에 깨끗하고 예쁜 모습일 때 폼을 잡았다. 하늘을 보며 턱 끝을 들어 올리고, 입가엔 아스라한 미소, 심장께를 손으로 살짝 눌러서 사연 있어 보이게.

“후, 오늘도 완벽했다. 뭐, 이런 가혹한 환경도 다 나니까 버티는 거지.”

모틸라는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휙 넘기며 말했다.

오늘도 자신의 미모와 완벽한 턱의 각도, 손끝의 우아함에 스스로 감탄하면서.

* * *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응?”

모틸라는 불 속을 휘적거리던 나뭇가지를 멈추며 고개를 들어 발터를 바라보았다.

똑같은 감자라도 분위기라도 바꿔 보자며 정원 한구석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중이었다.

“제가 가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하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가 버리셔도 원망 같은 건 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로?”

“……조금이라면 하겠지만.”

발터는 그렇게 말하면서 모틸라의 눈을 피했다.

그러고는 조금 무안하다는 표정으로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불 속으로 가볍게 던져 넣었다.

모틸라가 그런 발터의 모습에 씨익 웃으며 다시 모닥불을 휘저었다. 나뭇가지가 완전히 마르지 않았던 것인지 불똥이 하나 튀어 모틸라의 앞머리 옆을 타닥거리며 지나갔다.

발터가 “조심하십시오.”라며 낮게 말하는 말에 모틸라가 알겠다며 대충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여기가 내 고향이라는 말을 했었나?”

“예. 저번에요. 이곳에서 모틸라 님 같은 마법사가 태어났으면 한 번쯤 들어 볼 만도 한데,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지만요.”

“이곳에서 떠나고 나서 마법사가 됐거든.”

모틸라는 발터의 의심 섞인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답했다.

“아무튼 고향이기도 하고, 좋은 추억도 많고.”

“그 추억이 저랑 연관이 있습니까?”

“응?”

“아니면 저랑 닮은 사람과 연관이 있습니까?”

“……뭐?”

모틸라는 발터의 말에 모닥불 안에서 감자를 굴리던 것을 그만두고 발터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굳은 얼굴이 사실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역시 그러시군요. 제 눈이나 머리카락 같은 부분을 보면서 그리워하는 표정을 하신 적이 몇 번 있으셔서요. 처음에는 제 어릴 적에 만난 적이 있었나 고민해 보았지만 그건 아닌 듯하고, 그보다는 이미 떠나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얼굴이셨습니다.”

“……너 은근히 눈치 빠르구나?”

“모틸라 님을 열심히 관찰하고 있을 뿐입니다.”

“뭐?”

“조금이라도 이 영지에 오래 머물러 주셨으면 해서요. 그 외에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정말?”

“네.”

“뭐, 그렇다면야.”

모틸라는 넘어가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불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붉은빛으로 변하던 하늘은 모틸라가 입을 열었을 때 즈음에는 온통 새빨갛게 불타고 있었다.

저택은 언덕 위에 있었고 주위는 온통 평야였으므로 노을은 길게 이어지기만 했다.

모틸라는 그 길기만 한 노을을 보며 참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 속에서 이렇게 길고 긴 해를 보았었다.

그때는 지는 해가 아니라 떠오르는 빛이었지만, 그때도 지금도 하늘이 붉은색인 건 다를 바 없었다.

모틸라는 아직도 똑같은 것 같은 하늘 어딘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랑 똑같은 남색을 가진 사람이었어.”

아주 오래전 일이다. 너무 오래된 일이지.

사랑이란 것도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 첫사랑.

“내가 잃어버린 건 잊어버리는 게 낫다고 했잖아. 그 말대로 잃어버렸으니, 잊어버렸지.”

지우려고 그토록 애써서인가. 이젠 이름도 목소리도 잊어버렸다. 기억나는 건 없었다.

“얼굴 생김새도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 안 나는데 이상할 정도로 그 색만은 기억하더라.”

해가 뜨기 직전의 남색.

어두운 밤의 색도 아니고, 태양이 떠올라 붉게 물든 것도 아니고, 완전히 하늘색으로 밝아진 것도 아닌.

붉어지기 직전의 남색.

“그리고 뭐랄까……. 그 애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진짜 강렬한 첫 만남이거든. 그래서 그것만은 기억하지.”

“어떤 만남이길래-”

“절벽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더라고.”

“…….”

발터가 물음을 끝마치기도 전에 나온 대답은 수없이 그 처음을 곱씹은 것처럼 빨랐다.

“정확히는 절벽 끝에 서서 아래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지. 죽으려고 그러는 거냐고 말을 거니까, 돌아보더라.”

그리고 그 눈빛은 낮게 가라앉은 남색.

“곧 죽을 거 같은 눈으로 대답하기를- ‘아니. 죽을 생각은 없어’. 누구랑 꼭 똑같은 대답 아니니?”

“…….”

“그럼 그런 눈빛이나 하지 말든가.”

“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 이유가 그겁니까?”

“응. 진짜 닮았거든. 이쯤 되면 무슨 운명인가 싶어. 내가 남색에 약한가 보지.”

그 애도 딱 그런 눈이었거든. 낮게 가라앉은 남색.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색.

인디고와의 첫 만남은 온통 그런 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