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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는 으쓱거렸던 어깨를 내리고는 삽질하는 모습 그대로 모틸라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어, 너 착한 애구나?”
“애는 아닙니다만. 성인식도 했고, 기사 작위도 있습니다.”
“나한테는 다 애처럼 보이는데? 뭐, 감사하면 앞으로 잘 부탁해.”
모틸라가 발터의 인사에 약간 당황하여 말하자, 발터는 자신은 애가 아니라며 반박했다.
모틸라에겐 조금도 통하지 않았지만.
“……계속 여기 있으실 생각입니까?”
“겨울 동안은?”
“제대로 살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더 추워지기 전에 다른 마을로 가서 쉬시는 게 훨씬 겨울나기도 편하실 겁니다.”
“됐어. 그냥 떠나도 신경 쓰여서 어차피 돌아올 게 뻔해. 그냥 앞으로 나를 잘 챙기도록 해.”
그는 말을 돌리며 다른 마을로 가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도 모틸라에게 통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녀는 제멋대로에 고집도 센 사람 같아서, 발터는 앞으로의 생활이 조금 걱정되어 모틸라에게 질문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아침마다 깨우는 겁니까?”
“네가 안 일어났잖아.”
“늦게 잤으니까요.”
“그럼 일찍 주무시든지.”
“앞으로 아침 식사도 제가 만들어야 하고요.”
“그럼! 은인을 시킬 생각이야? 배은망덕하군!”
그리고 조금의 이득도 보지 못하고 침몰했다.
“……빨리 사람을 구하든가 해야지.”
“그래! 너 요리 엄청나게 못하더라!”
그는 저택에 일할 사람을 구하기 매우 어려울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중얼거렸고, 모틸라는 완전히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처음 해 봤단 말입니다.”
“기사들은 보통 배우지 않나? 전쟁터나 그런 거 대비하려고.”
“……제가 학원에 다니다가 중간에 그만둬서.”
“응? 근데 기사 작위를 받았어?”
“아버님이 가진 게 단승 작위가 아니라서요. 돌아가셨으니까, 이젠 제가 기사죠.”
“뭐야, 그 얼렁뚱땅은? 왜 그만둔 건데?”
“……아버지께서 보증을 잘못 서서 돈이 없어졌거든요.”
“오.”
어째 말을 할수록 난리라서 발터는 작은 한숨을 쉬고는 계속해서 땅을 파며 말을 이었다.
초겨울의 바람에도 그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친구를 너무 믿으셨죠. 흔한 이야기입니다. 보증을 잘못 서고 집안은 빚더미에 올라서고 몇 있지도 않은 영지를 팔아 치우고.”
“아하.”
“남은 건 이 마을뿐이었는데, 돈이 없으니 사병도 못 키우고. 겨울이 되니까 도적이 들이닥쳤네요.”
“최악이네.”
“최악이죠. 다행히 남은 빚은 없습니다만, 보다시피 시골의 조그만 마을입니다. 이번 겨울이나 넘기면 다행이겠군요.”
그 말을 발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마치 정해진 예정을 말하는 것 같았다.
겨울이 끝나면 이 마을에 남은 사람은 당연히 없을 거라는 듯이.
구멍이 다 파이자, 마을 사람 중 그나마 힘을 쓸 수 있는 이들이 시체를 옮겨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땅 밑으로 떨어지는 이들이나, 그들을 던지는 이들이나. 삐쩍 말라붙은 몸과 거뭇하게 가라앉은 표정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시 구멍을 덮으러 가기 전 발터는 삽에 몸을 지탱한 채 제 영지민이 하나하나 땅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내년 봄에는 무덤만 남아 있을 수도 있겠네요.”
“아닐걸?”
모틸라가 그의 옆에 서서 남색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새로 밀을 심겠지. 새싹이 날 거고. 마을 앞 과수원에는 새로운 묘목들이 자랄 거고. 가축들이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떠들면서 돌아다닐 테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렌지꽃이 가득 필 거야. 그 향기가 얼마나 좋은지는 너도 알고 있을 테고.”
“…….”
“무덤에도 새파랗게 새싹이 올라올 거라고, 너 겨우내 바쁘겠다?”
“어째서-”
“남은 밀이 얼마나 있는지도 봐야 하고, 도망간 가축들도 더 추워지기 전에 잡아 와야 하고, 겨우내 묘목을 키우려고 낑낑대야 하고. 남은 사람들도 추슬러야 하겠네.”
“당신은-”
“옛날에 해 본 적 있어. 음- 꽤 옛날이라 좀 헷갈리기는 하는데, 도와줄게.”
모틸라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
“겨울이 갈 때까지는 말이야. 봄이 오고, 따뜻한 바람이 불고, 새싹이 피어날 때까지는-”
옆에 있어 줄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모틸라는 삽을 가지고 일을 하러 가 버렸다.
발터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검은색 긴 곱슬머리, 얇은 허리와 얇은 팔. 우아한 발걸음.
무덤이라고는, 삽질이라고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당연하게 무덤을 덮으러 간다. 발터는 자신도 모르게 그 뒤를 따라갔다.
마지막으로 화려한 이불에 뒤덮인 제 아버지의 시체를 땅에 묻을 때까지, 발터와 모틸라는 몇 번 쉬지 않고 일했다.
인디고 호튼은 태양이 거의 넘어갈 즈음에 땅 밑으로 잠들었다.
발터는 차가운 땅 안과 차가운 그 방이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조금 하였다가, 인사할 거냐는 모틸라의 말에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는 모틸라의 선홍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인사는, 그날 밤에 충분히 하였습니다.”
“그래?”
“예. 남은 것들은……. 여기 계시니, 하고 싶을 때 하면 되겠죠.”
“그럼! 네가 옆에만 안 묻히면 되지.”
“자살 안 할 겁니다.”
“오냐-”
“안 할 거라고요.”
“오오냐-”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발터는 겨울 내내 장작으로 쓸 나무도 부족할 게 뻔해 아버지의 관도 만들어 주지 못했다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 겨울, 관에 들어간 이는 애초에 없었다.
모두 땅을 관으로 삼고 들어가 잠들었을 뿐이다.
다른 모든 땅을 팔아넘기면서도, 이 땅만은 팔지 못했던 아버지이시니, 만족하셨을 거라고.
발터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그러니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더 추워지기 전에 다른 마을로 떠나시라고 했잖습니까.”
“손에 지옥이라도 달렸니? 아니면 하수구라든가!”
“당신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스스로 자신을 좀 돌아보시죠. 전 적어도 먹을 순 있잖습니까.”
“이이익!”
모틸라가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며 화를 내자, 이미 모틸라의 비아냥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발터는 이제 한마디도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전 적어도 뭔지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계란, 감자, 빵. 하지만 모틸라 님이 만든 건 그렇지 않았죠. 그릇 위에 석탄 세 개가 올라와 있었을 뿐.”
“어차피 그것도 계란, 감자, 빵이잖아! 까매졌어도 계란, 감자, 빵인 건 변하지 않는다고!”
“아닙니다, 그것은 석탄이었을 뿐.”
“내 석탄 따위 상관하지 말고, 요리 메뉴를 좀 고민해 보자. 나 지금 2주째 먹은 게 계란, 감자, 빵뿐이야. 계란, 감자, 빵!”
“계란, 감자, 빵이라고 그만 말씀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겨우니까.”
“그래! 말 잘했어! 지겹다고!”
그랬다.
도적이 휩쓸고 간 마을에 남은 것은 닭 몇 마리와 감자, 그리고 약간의 밀가루였다.
가축이 조금 있긴 했지만, 그걸 잡아먹으면 내년에 키울 짐승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계란과 감자, 밀가루가 전부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나마 있는 계란을 자신의 영주인 발터에게 넘겨주었고, 적어도 다른 영주민보다 하나 더 먹는 게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계란이었다.
“2주 동안 먹은 게 계란, 감자, 빵뿐이라고! 아니 사실 그 맛이 그 맛이긴 한데, 적어도 좀 요리 잘하는 사람한테 맡기면 안 돼? 이 넓은 집에서 요리 못하는 둘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게 뭐야!? 네 지옥의 맛? 내 석탄의 맛?”
“아시다시피 거의 모든 영지민이 겨울 땔감, 먹을 수 있는 뿌리, 주위 동물들이라도 찾으려 애쓰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강이 얼기 전에 뭐라도 잡겠다고 낑낑거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영주 저택에 와서 밥을 해 달라? 대가로 줄 것도 없습니다만.”
“아니, 누가 모른대? 나도 어제 일했거든? 진짜 다른 마을 가 버릴까 보다.”
“가지 마십시오.”
“오…….”
모틸라가 발터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저 자식이 나를 붙잡는 건가!
드디어 나의 소중함을 알게 된 건가!
“당신만큼 훌륭한 노동력도 없으니까.”
“야!”
“겨울 동안 옆에 있어 주겠다고 하셨으니, 열심히 일해 주십시오. 혼자서 열 명 몫을 거뜬히 해내시니, 든든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기, 적어도 표정 좀 예쁘게 하고 말할래?”
모틸라의 말대로 발터는 ‘당신은 훌륭한 노동력이다!’라는 어디 중소기업의 사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가까운 마을에 가서 식량 좀 사 올게. 그게 빠르겠다.”
“안 됩니다.”
“엥?”
“당신이 이 마을을 나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시면 어떡합니까? 저는 아쉬워서 잠도 못 이룰 것입니다.”
“훌륭한 노동력이 사라져서?”
“네.”
“재수 없는 자식.”
“동감입니다.”
모틸라가 이를 뿌득뿌득 갈며 소금을 넣긴 한 건지 밍밍하기 짝이 없는 계란 프라이를 씹었다.
더 이상 계란 껍질이 안 씹히는 것을 보면 요리 실력이 늘긴 하는 것 같고…….
이 속도면 내가 죽기 직전에야 맛있는 계란 프라이를 먹을 수 있을 것 같고…….
후우-.
모틸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 가서 요리라도 배워 오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의 말대로 마을의 모든 이들이 이번 겨울을 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과 발터도 대충 아침을 때우고 나면 언덕을 내려가 마을로 가서 일할 예정이었다.
2주 동안 했던 일이기도 하고.
다행히 마을은 수확한 작물을 많이 보관해 놓은 상태였고, 도적들이 털어 간 후에도 딱 죽기 직전까지는 버틸 수 있을 만한 양이었다.
심지어 많은 일을 겪었다는 최고령 노인이 세상 허망한 얼굴로 ‘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죽지는……’이라고 말했으니, 어떻게든 이번 겨울을 넘길 수 있을 모양이었다.
“젠장……. 역시 난 너무 착하다니까.”
모틸라는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것 같은 아침 식사를 겨우겨우 입에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