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 (122/154)

122

뻔하게도 겨우 데워졌던 피부를 다시 창백하게 만든 발터가 제 아버지의 방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창문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체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차가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틸라는 그 모습을 보며 콧방귀를 한 번 뀌고는 입을 열었다.

“야.”

“……목욕은 끝나셨습니까?”

“어.”

“그럼 마음에 드는 방에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옷도…… 아무거나 찾아 입으시면 됩니다. 멀쩡한 게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됐어. 난 싸구려는 안 입어. 게다가 마법사를 뭐로 보는 거야? 아공간에 옷은 한가득 쌓여 있다고.”

“그럼 가서 주무시면 되겠네요.”

“너 거기서 빨리 안 나와?”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뭐라 그랬어. 가서 뜨거운 물에 몸 따뜻하게 하고 자라고.”

모틸라의 얼굴은 봐도 눈은 한 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던 발터가 그제야 그의 남색 눈을 선홍색 눈동자에 정확히 맞추었다.

발터의 날 선 감정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모틸라는 그저 담담히 보고 있었다.

결국 발터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모틸라를 지나 방 밖으로 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창백한 빛 아래서 모틸라가 꺼내는 말에 걸어가던 발터가 다리를 멈추었다.

그림자 밑에서 멈춰 서서 온몸이 어둠에 먹힌 듯이 새까만 발터에게 모틸라가 말했다.

“떠나간 사람은 잔인하고, 남아 있는 사람은 비겁하다고.”

“……매우 비겁하셨나 봅니다.”

“어. 잃어버린 것들은 잊어버리는 게 나아.”

“많이 잊어버리시기도 하셨나 보고.”

“그래. 그러니까 너도 비겁하게 잊어버리고 자라고.”

모틸라는 발터가 다시 몸을 움직이고 복도를 지나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한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리고 목욕을 마친 후 다시 돌아올 때까지, 방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다시 돌아온 그가, 차가운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아예 닫힌 방문 앞에서 부러 도도하고 건조한 표정으로.

그리고 그런 그녀를 강제로 따뜻해진 피부를 하게 된 발터가 바라보았을 때, 모틸라는 다시 한번 비아냥거렸다.

“왜? 내가 네 방에 벽난로도 피워 줘야 해?”

발터는 그 모습을 보다가 그대로 모틸라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모틸라는 발터가 방에 들어가 벽난로를 피우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밤만은 그가 이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름달이 흐르고, 흘러서, 발터의 숨이 겨우 잦아들 때까지. 모틸라는 그 건조한 표정을 지켰다.

복도는 싸늘하고 창백하기 그지없었지만, 뱀파이어는 어차피 차가운 피부였으므로 그녀는 딱히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달이 겨우 넘어갈 때 즈음 아무 방이나 들어가 잠깐 눈을 감았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 새소리가 울릴 때까지. 아주 잠깐.

* * *

“밥 내놔!”

“으윽……! 뭡니까, 당신!”

모틸라가 방문을 쾅 열고 들어와 외치는 소리에 겨우 잠들었던 발터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벌써 9시라고! 나는 아침을 8시에 먹는단 말이야! 한 시간이나 기다려 줬으면 됐지!”

“젠장. 아무 하인이나 불러서-”

“다 도망갔다며! 이 집에 너하고 나밖에 없거든?”

“하……. 미친…….”

“지금 나보고 미친년이라고 하는 거야?”

“……아뇨.”

“하고 싶은 모양인데? 해! 그럼 나는 너를 자살 예정자라고 불러 주지!”

“…….”

“마음에 안 드나 본데? 그럼 뭐라고 할까……. 으음……. 내일 죽을 놈,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 자살 원츄!”

“발터라고 불러 주시겠습니까, 제발.”

“그래!”

모틸라가 해맑게 대답했고, 발터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례하게 방에 멋대로 들어왔다거나 무례한 말투를 한다거나.

따지자면 밑도 끝도 없이 많았지만 제가 말해 봤자 이길 수 없음을 직감한 발터는 조용히 입만 다물고 몸을 움직였다.

그런 발터를 모틸라가 졸졸졸 따라다니며 지켜보며 콧대를 올리며 말했다.

“참고로 넌 나를 모틸라 님이라고 부르도록!”

“……예, 모틸라 님.”

“좋아. 아침밥은 베네딕트 에그를 식빵에 올려서 먹고 싶어. 신선한 야채에 요거트 드레싱을 뿌리고.”

“저 부엌에 뭐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만.”

“그럼 가 보면 되지. 자자, 움직입시다!”

모틸라가 손뼉을 짝짝 치면서 방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발터가 기가 빠진다는 얼굴로 따라갔다.

“제가 진짜 자살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너 모르니? 원래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안 돼! 차라리 ‘너 자살할 거야?’라고 대놓고 물어보는 게 좋단다.”

“당신이 하는 건 놀리는 것 같습니다만.”

“난 괜찮아! 왜냐하면-”

“예쁘니까?”

“아하하! 아니. 네가 진짜로 옥상에서 뛰어내려도 받아 낼 수 있으니까.”

발터는 당신이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질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떤 대답이 들어와도 납득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 자살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예. 이곳은 제 영지이고, 저는 이곳을 다시 풍요롭게 만들 겁니다.”

“정말?”

“예. 아버지도 그걸 원하셨으니까요.”

“너는?”

“……예?”

“너는 이곳이 정말로 풍요로워지길 원하냐고.”

그 말에 발터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입을 몇 번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아주 낮고, 낮은 목소리로.

“그래!”

모틸라는 그 말에 가볍게 대답했고, 발터는 모틸라가 자신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도 그녀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둘은 부엌을 뒤져 계란 세 개와 오래된 빵, 흐물거리는 야채를 발견해 내었다.

그리고 요리하는 중 발터는 계란 하나를 깨트렸고 하나는 설익었고 하나는 퍽퍽할 정도로 완전히 익혀 버렸지만, 모틸라는 별말 없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모틸라는 엉망진창인 요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발터가 아침을 먹지 않으려고 하자 또 특유의 비아냥을 내뱉었다.

“아사는 힘들다? 진짜 힘들다? 죽고 싶어지면 다른 걸 고르는 게 좋을걸?”

“……당신 진짜-”

“예쁘다고? 나도 알아!”

“최악이네요.”

“맞아! 난 예쁘고 몸매도 아름답고 심성도 곱지!”

발터는 인상을 와그작 찌푸리고 눈앞에 있는 엉망진창인 계란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 안에 씹히는 계란 껍질에 모틸라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래서 발터는 그것들을 전부 위 안으로 집어넣었다.

설익거나 너무 익고, 싱거운 데다가 껍질까지 씹히는 음식이었지만, 그래도 불에 데운 거라고 따뜻하긴 하였다.

“……마을에 내려가서 무너진 건물들을 정리할 생각입니다.”

“으흠?”

“도와주시겠습니까?”

발터가 모틸라를 보며 말했다.

모틸라는 그 남색 눈동자를 보며 턱을 괴고는 싱긋 웃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휘면서- 네가 부탁을 해서 기쁘다는 듯이.

“그래. 얼마든지.”

감미로운 목소리로.

온기라곤 하나도 없는 식당, 엉망진창인 요리, 집 안 어딘가의 아버지의 시체, 겨울의 바람.

발터는 조용히 눈을 내리고, 남은 한 조각의 계란은 입으로 가져갔다.

마주 보고 앉은 사람, 따뜻한 음식, 부드럽게 웃는 얼굴.

웃기게도 모틸라의 무례한 행동이 전부- 그에게 위로가 되었으므로. 그는 일어나 그릇을 씻고 움직이기 편한 따뜻한 옷을 입고 마을로 내려갔다.

뒤에서 모틸라가 목도리를 던져 주며, “동사는 어렵다?”라고 비아냥거렸다.

발터는 그만 조금 웃고 말았다.

* * *

그들은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을 모으고 부상자를 수습하고 시체를 한 곳으로 옮겼다.

다행이라면, 도적들은 사람들을 끌고 가진 않았다. 겨울이라서 한 입이라도 늘면 힘들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다만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다쳐 있었다.

발터는 조금의 불평도 없이 사람들을 모으고, 다독이고, 정리했다.

“……영주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돌아가셨습니다.”

“오……. 저런…….”

마을의 한 노인이 그리 물었을 때 발터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럼 이제 발터 님이 영주님이시군요.”

“……예, 그렇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영주님.”

노인은 그대로 허리를 깊게 숙이고 자신도 뭐라도 해야겠다며 일감을 찾아서 멀어졌다.

발터는 그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다시 일하러 몸을 움직였다.

주위에서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발터에게 꾸벅꾸벅 몸을 숙였고, 간간이 잘 부탁드린다는 말과 축하한다는 말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발터는 그 영주라는 말과 축하한다는 말이 무겁고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을 모시게 될 영지민들의 마음도 이해하여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

“……당신도 그러십니까?”

그리고 모틸라가 그렇게 툭 내뱉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무겁게만 들렸던 축하한다는 말이 순식간에 가볍게 느껴져서 떨떠름해졌다.

모틸라는 그 말에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는 얼기 시작한 땅에 쉽게 삽을 꼽았다.

“땅 파는 건 제가 할 테니 다른 일을 해 주시면-”

“뭐라고?”

“아뇨. 아닙니다. 계속하십시오. 삽질을 잘하시네요.”

좀 더 힘이 덜 들어가는 일을 해 달라고 하려던 발터는 자신보다 더 땅을 잘 파는 모틸라의 모습에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마법입니까.”

“응.”

“그것참 쉬운 변명이네요.”

“그럼 다른 말 해 줘? 사실은 내가 마녀라서-”

“당신처럼 착한 마녀도 있습니까?”

“……뭐?”

모틸라가 발터의 말에 잘못 들었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에게 했던 짓이 착한 일이라기엔 좀…….

모틸라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양심이 좀 아픈 걸 느꼈다.

“당신이 친절한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행동은 충분히 친절했습니다.”

발터는 그 말을 하며, 모틸라를 따라 하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