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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모틸라
“여기 왜 이따위가 된 거야!!”
모틸라는 언덕 위에서 거의 망해 가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소리 질렀다.
자신이 태어났던 고향.
힘들었고 지루한 나날이었지만, 전쟁, 납치, 실험 등등을 겪고 나니 너무나 미화되었던 곳.
그래서 뱀파이어가 되고 전쟁에 구르고 도망친 후에 다시 돌아왔던 곳.
그리고 그때 전쟁에 반파되었던 곳을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다시 세웠던 곳.
“근데 왜 다 파괴되어 있냐고!”
모틸라는 제 아름다운 추억을 돌려 달라며 씩씩대고 언덕을 내려갔다.
분명 제 기억상 이 마을은 언덕 위의 영주 저택을 중심으로 작은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 담장 주위로 아름다운 오렌지 나무가 가득한, 여름만 되면 하얀 오렌지꽃이 가득 피는 그런 곳이었다.
다른 마을들과 떨어진 구석에 있어서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마을.
조금 무뚝뚝한 성격을 가진 기사 가문이 다스리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래!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근데 저 연기! 불! 무너진 건물! 파괴!”
모틸라는 마을 건물들 주위로 작게 둘러싸여 있던 돌담을 넘어갔- 아니, 지나갔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 돌담조차 와르르 무너져 넘어갈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마을 정문이 어딘지 구별도 안 갔다.
“내가 정문으로 들어가는 건지, 담을 넘어가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
모틸라는 계속해서 투덜거리며 자신이 기억하는 마을의 광장으로 걸어갔다.
마을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애초에 큰 마을이 아니라, 영지민이 3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 수가 얼마나 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보니 줄었으면 줄었지 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쳐들어온 덕분에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 같기도 하고.
아마도 도적들이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작정하고 쳐들어온 건지 담장은 무너졌으며, 바깥쪽 건물들은 불타 쓰러졌고 건물들에 옮겨붙은 불 때문인지 마을 앞쪽 오렌지 과수원도 반쯤 불타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불탄 건물들이 무너지며 다른 건물에 부딪혀 무슨 도미노처럼 쓰러졌는지, 불타는 건물에 무너진 건물에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그나마 마을의 영주가 머무는 언덕 위의 저택과 그 언덕 주위의 건물 몇 개만 멀쩡했다.
이 정도면 그냥 마을이 망가졌다고 봐야 했다. 시체들이 굴러다니고, 다친 사람들이 신음하는 망가진 곳. 모틸라가 방문하기 몇 시간 전에 사건이 일어났던 듯, 아직 수습하는 분위기도 생성되지 않은 곳.
그리고 거기서, 모틸라는 남색 머리카락을 땀과 흙으로 더럽히며 건물 잔해들을 파헤치는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청년은 옷에 튄 피와 얼굴에 생긴 그을음, 땀 같은 것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잔해들을 파헤치고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는 듯한 몸짓. 그는 그나마 마을 사람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는지 혼자서라도 움직이고 있었다.
모틸라는 그냥 마을을 나가 버리려다가 그 청년을 보는 순간 한숨을 푹 쉬며 다가갔다.
“안녕.”
“……안녕하십니까.”
그는 남색 머리카락만큼이나 진한 남색의 눈을 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살짝 진한 갈색 피부색, 큰 키, 넓은 어깨, 남색 머리카락과 남색 눈동자.
진한 눈썹, 날카로운 눈 끝, 꾹 다문 채 일자로 길게 늘여진 입술.
고집 세고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
“인디고?”
“……제 가문 이름입니다.”
“아, 그럴 줄 알았어. 너희 가문 사람들은 성하고 똑같이 딱 남색이지.”
청년의 경계심 가득했던 눈은 자신의 가문을 잘 아는 듯한 모틸라의 말에 조금 사그라들었다.
게다가 그가 보기에 모틸라는 이 마을에 무언가 바랄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러기에는 모틸라가 입고 있는 옷이 너무 고급이기도 했고, 도적들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더 가져갈 것이 없기도 했다.
“아버지를 만나러 오신 거라면, 죄송하지만. 돌아가셨습니다.”
“으음? 그런 거 아닌데? 그냥 이 마을에 좋은 추억이 있어서 잠깐 들르려던 건데……. 이런 모습이 됐을 줄이야.”
그녀는 검지로 입술 아래를 한 번 꾹 누르며 고민하다가, 그와 눈을 한 번 마주쳤다가, 푹 한숨 쉬었다.
“도와줄게.”
“예?”
“나도 참 착하다니까. 너 같은 애를 보면 넘어갈 수가 없단 말이야. 게다가 여긴 내 고향이기도 하고.”
“……여기서 태어나셨습니까?”
“그래. 저어 먼 옛날에.”
“도와주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지금은 한 명이라도 부족하니까.”
“그래. 난 모틸라야.”
“인디고 발터. 인디고 가문의 후계자……. 아니, 이젠 인디고 가문의 주인입니다.”
청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고는 다시 건물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무뚝뚝한 모습을 빤히 보다가 흐음- 하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뱀파이어의 예민한 후각으로 잔해 밑의 냄새까지 맡아 낸다.
맡아지는 건 이미 몸 밖으로 잔뜩 흘러나와 버린 짙은 단 냄새.
죽은 신체에서 흐르는, 특유의 차갑게 식어 버린 진득한 단내.
모틸라는 그 단내를 맡고는 급하게 잔해를 치우는 발터에게 입을 열었다.
“그 건물 안에는 산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덜컥.
발터는 몸을 그대로 굳힌 채 몸을 웅크린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틸라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난 마법사거든, 거긴 산 사람의 생기라곤 하나도 안 느껴져.”라고 익숙하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발터는 제가 손에 쥐고 있던 잔해를 한 번, 잔해 사이의 어둠을 한 번 노려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모틸라를 돌아보고 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산 사람이 있는 곳을 먼저, 알려 주시겠습니까.”
“좋아.”
모틸라는 제 눈만큼이나 목소리도 낮은 놈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깊게 들이쉬었던 숨에서 그나마 신선한 단내가 나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시체 덕분에 주위는 지독한 단내가 질척거릴 정도로 가득했다. 모틸라는 정말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단내 사이를 익숙하게 걸었다.
발터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파헤쳤다가 정말로 안에 산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잔해에 깔렸던 사람을 구하고 나서 부디 다른 사람이 살아 있는 곳도 알려 달라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렇게 안 해도 알려 줄 거야!”
쓸데없을 정도로 진지한 게, 너희 가문 특색이니?
모틸라는 투덜거리면서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산 사람이 있는 곳을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냥 알려 주는 것뿐만 아니라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같이 잔해를 치워 주기도 하였다.
발터는 어느새 그녀의 아름다운 검은색 치맛자락, 비싼 가죽으로 만든 게 분명한 여행 후드, 고혹적인 검은 머리카락이 점점 더러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적이 휩쓸고 가 엉망진창이 된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아름다운 여성은 더러워지는 것 하나에도 질색하게 생긴 높은 신분의 여성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투덜거릴 뿐 이상할 정도로 능숙하게 잔해를 치우고 사람들을 구해 내었다.
“힘이…….”
“마법사거든.”
발터가 모틸라의 힘에 놀라자 모틸라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법사라고 가볍게 말했다.
마치 마법사라는 변명 하나면 다 넘어갈 수 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뱀파이어라는 것만 안 걸리면 딱히 상관없기도 했고, 이런 작은 마을의 사람들이라면 이게 마법인지 아닌지 구별하지도 못할 텐데 무슨 상관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고상하신 신전 나으리들은 이런 작은 마을까지는 신경 쓰지도 않을 거고.
저녁 즈음에 도착했던 마을은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내려앉은 지 오래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오늘이 보름달이라 환하게 밝았고 아직 몇몇 불타오르는 집들과 잔해로 만든 횃불 때문에 구출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일까.
그리 큰 마을도 아니었는 데다가 모틸라가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을 구별할 수 있어 구출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상황을 파악한 마을의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도우려 우르르 몰려들기도 했고.
그래서 모틸라는 마지막 산 사람을 구하고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다음에 구출해야 할 곳을 알려 달라는 발터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음……. 이게 끝인데.”
“……예?”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은 없어. 이제 밑에 있는 건, 죽은 사람들 뿐이야.”
그녀는 발터가 충격 받을까 봐 걱정했다.
많은 사고의 현장이나 전쟁터에서 더 이상 산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저런 이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리곤 했으니까.
그러나 모틸라의 예상과 다르게 발터는 땅을 보고 조금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알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선 뚜벅뚜벅 걸어갔다.
모틸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 뒤를 졸졸 쫓아가며 계속 말을 걸었다.
“야, 괜찮아?”
“예.”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왜 따라오십니까?”
“그거야, 밤은 늦었고, 잘 데도 없잖아. 오늘 하루 열심히 일했는데, 잘 곳 정도는 제공해 주겠지.”
“……별로 좋은 곳은 아닙니다만.”
거절에 가까운 말에도 모틸라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곤 발터에게 어서 안내하라며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발터는 약하게 한숨 쉬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마을에서 그나마 멀쩡했던, 언덕 위의 저택이었다.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의 가장 커다란 저택은 딱 봐도 이 마을 영주의 저택이었고, 마을의 주인인 인디고 가문의 가주 발터의 집이었다.
발터는 그 안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 복도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의 아무 방에서 주무십시오.”
그는 그러고는 모틸라를 신경 쓰지도 않고 다른 곳을 향해 그 묵직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모틸라는 발터가 가리켰던 복도를 쓱 한번 둘러보고는 다시 발터의 뒤를 쫓아갔다.
“왜 쫓아오십니까?”
“씻고 싶거든.”
“……당신, 귀찮은 사람이네요.”
“은인이겠지.”
“……정말 죄송하지만, 이 마을은 도적의 습격으로 어느 하나 멀쩡한 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도와주신 은혜도 갚지 못할 만큼 엉망이라는 소리입니다.”
“응, 그래.”
“솔직히 말하겠습니다만. ……전 지금 시체를 치우러 가는 길입니다.”
“그래?”
“방에서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이 집이 꺼림칙하다면 밖의-”
“밖에도 다 시체투성이일걸? 적어도 여긴 피 냄새는 안 나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래.”
발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꾸욱 다물고 앞만 보고 걸었다. 모틸라는 살랑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