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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는 약간의 습기를 머금고 나무 냄새와 함께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머리에 쓴 하얀 카플린을 꾹 눌렀다.
챙이 넓은 모자라 그런지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로나는 모자의 챙과 함께 오랜만에 풀어놓아 흩날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겨우겨우 정돈했다.
결국 모자에 붙어 있던 리본을 가져다 턱 밑에 묶고 나서야 난간 너머를 구경할 수 있었다.
발밑으로 수도 없이 펼쳐지는 나무들은 숲을 넘어 초록색 바다 같아 보일 정도였다.
수해. 로나가 그 단어를 완벽히 실감한 광경이었다.
“앞으로 3일은 이런 풍경이 펼쳐질 거예요.”
등 뒤에서 다가온 하얀 셔츠를 입은 모나한이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건네며 난간에 등을 기댔다.
거센 바람에 따라 모나한의 앞머리가 흐트러지자, 모나한이 손을 들어 정리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포기하고 난간에 걸친 팔의 적당히 걷어진 셔츠 아래로 힘줄이 톡 튀어나와 있었다.
로나는 검지를 들고 그 힘줄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걷은 소매가 잘 어울리는군요.”
“단정한 모나한도 괜찮지만, 섹시한 모나한도 괜찮죠?”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 나는군요.”
“로나가 좋아하니까 더 넘쳐 나네요.”
모나한이 모틸라를 따라 하며 있지도 않은 옆머리를 넘겼다.
로나가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떨며 웃었다.
둘은 결혼식 후 신혼여행이라는 이름하에 비행선에 타고 있었다.
약 한 달짜리 일정에 목적지는 다른 나라라 가는 데만 일주일이 걸리는 여행이었다.
“근데 생각보다 사람이 별로 안 타네요? 자리도 엄청 널널하고.”
전생의 비행기를 생각했던 로나가 뒤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뒤의 휴게실에는 로나의 말대로 다섯 사람도 채 되지 않는 이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거 열 개 중 한 개는 떨어지거든요.”
“……네?”
“아무래도 비행하는 몬스터가 있다 보니. 그런 녀석들이 와서 기구에 부딪치거나 습격하면 펑!”
“……지금 저 목숨을 걸고 여행 중인가요?”
“제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 말은 몬스터가 오면 해치우겠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떨어져도 구해 주겠다는 말인가요?”
“그 둘 다 자신이 있지만, 정확히는 제 냄새 때문에 접근하는 몬스터가 없을 거라는 소리죠.”
로나는 그 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와이번 습격 사태 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뱀파이어가 강한 거예요? 아니면 모나한이 강한 거예요?”
“제가 강한 거죠. 뱀파이어 원로 중에 한 명인걸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로나는 절대 덤비면 안 돼요.”
“혹시나라고 할 필요도 없이 그런 거 안 할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런 일 있으면 상점 창에서 고기 결제해서 던지고 도망갈 거야.”
“훌륭한 판단이에요. 몬스터한테 도망갈 때는 발이 빠를 필요 없죠. 가장 느리지만 않으면 돼요.”
모나한은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며 다 마신 로나의 컵을 가져갔다.
“한잔 더 가져다 드릴까요?”
“달콤한 걸로 부탁할게요.”
그녀의 말에 모나한은 한번 웃고는 휴게실로 사라졌다.
로나는 발밑에 끝없이 이어지는 수해를 보며 감탄하다가, 모나한이 어떤 여성과 이야기하는 소리에 뒤돌았다.
휴게실의 창문으로 곱슬거리는 금발을 예쁘게 틀어 올린 푸른 눈의 여성이 모나한에게 한껏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오.”
로나는 왠지 흥미진진한 구경꾼이 된 마음으로 몸을 완전히 돌려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둘을 구경했다.
창문으로 보이는 광경만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그림체였다.
여성은 모나한에게 한껏 눈웃음을 지으며 얼굴도 살짝 붉힌 채였고, 모나한도 온 얼굴에 미소를 피운 채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게 바로 이혼 각인가. 신혼 여행하러 와서 헤어지는 부부가 그렇게 많다던데 그게 바로 지금인가.
드디어 모나한이! 모나한이이!
마음속으로 농담을 하며 모나한의 웃는 모습을 보던 로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서 짖는 웃음이라기보다는 ‘헤벨레’라는 단어에 가까운…….
“그러니까 이게 부부 사이에 그렇게 좋다 그 말이죠?”
“그럼요, 그럼요! 이게 뭐랄까, 관계를 더욱 돈돈하게 해 주는 그런 상품이랄까요?”
이 자식이!? 뭘 사려고 하는 거야!
“시간도 길- 어지고요.”
“오오오.”
시간이 길어지긴 뭐가 길어져! 지금도 거의 날밤을 새우고 있으면서! 더 길어지면 날 아예 죽일 생각이냐!
“감각도 예민해져서 조금만 하셔도……. 아시죠?”
“오, 그럼요. 잘 알죠.”
뭘 잘 알아! 지금도 뱀파이어가 돼서 예민해 뒈지겠구만!
“근데,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보다는 체력을 좀 좋게 해 주는 게 없을까요? 우리 집사람이 좀 버거워해서.”
“어머, 어머. 새신랑님이 신부님을 너- 무 사랑하시나 보다! 그럼 이거, 이게 참 좋죠!”
당신, 날 복상사 시킬 생각이야!?
로나는 위기감에 난간에 여유롭게 기대어 있던 몸을 빠르게 일으켜 휴게실로 달려갔다.
이혼 각이고 뭐고, 그보다는 지금보다 돈독해지려는 우리 사이를 말려야 했다.
로나는 휴게실 문을 벌컥 열고 그들을 향해 한걸음에 달려가 외쳤다.
“됐어요! 필요 없어요! 떽!”
“아, 로나. 이게 로나에게 참 필요한 것 같아서.”
“무슨 이상한 걸 사려고 해요!”
“매일 밤 체력이 부족하시잖아요. 특히 요즘은 계속 꾸벅꾸벅 졸기만 하시고…….”
네가 밤에 나를 안 재워서 그런 거잖아!
“그렇게 사고 싶으면 그걸 사요.”
“뭘요?”
“당신의 체력을 떨어트리는 거! 홀쭉해지는 거!”
“에잉.”
“에잉은 무슨, 에잉이야! 눈썹 내리지 마요! 실망한 표정 치워요!”
로나의 말에 모나한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아쉽다는 듯이 입을 쩝쩝 다셨다.
로나는 그 모습을 한번 째려보며 무시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금발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상인이세요?”
“정확히는 아티팩트 상인이에요. 마법이 부여된 장신구를 팔고 있죠.”
무슨 건강식품 상인이나 이상한 약품 하는 약장수인 줄 알았는데, 아티팩트 상인이라니.
“아티팩트 상인이면 꽤 고급 직종 아니에요? 상인 중에서도 알아준다고 알고 있는데?”
“그럼요! 불량을 걸러 내는 안목과 마법 적성, 상품을 준비할 자본이 필요한 고급 직종이랍니다!”
“……그런데 밤일에 도움 된다는 걸 팔아요?”
“이게 인기가 좋거든요.”
상인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비행선이 출발한 왕국에 이쪽에 관련된 천재가 있으시죠. 제국에서 인기가 아주 좋답니다.”
“…….”
“전 특히 여성 귀족분들 상대로 신뢰도가 높은 상이이랍니다. 이런 거 파는 사람 중 여자 상인이 없어서 그런지 인기가 끝내주죠.”
세상은 넓다더니. 로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상인이 그 모습을 보더니, 시원하게 웃고는 모나한에게 보여 주고 있던 보따리를 치우고 다른 보따리를 꺼내 펼쳤다.
“이런 게 부담스러우시다면 이쪽 아티팩트들은 어떨까요? 이쪽은 평범하게 미용에 관련된 쪽이거든요.”
“이런 것도 있어요?”
“여성 귀족분들 전용 상인이니까요. 다른 사람들 몰래 이런 아티팩트로 접근해서 ‘사모님, 사실 이거 말고 몸에 참 좋은 게 있는데요-’ 하면서 시작하는 거죠.”
“……그럼 어째서 모나한이.”
“남편분께서 사모님께 참 자상하시고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시는데, 사모님은 눈 밑도 퀭하시고 졸려 하시는 걸 보니 답이 딱 나왔죠! 게다가 여쭤보니 신혼이라 하시는데, 이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래서 슬쩍 여쭤보니 남편분께서 홀라당 넘어오셔서…….”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라 성인 용품에 홀라당 넘어갔다니…….
여자에게 넘어갈 거란 생각은 조금도 안 했지만, 이상하게 헤벌레한 웃음을 짓고 있더라니.
무슨 상상을 한 거냐, 모나한.
“좀 더 긴 밤을 상상했죠.”
“지금도 충분히 길잖아요.”
“3일 밤낮도 할 수 있는데.”
“제 미래 계획에 복상사는 없거든요.”
“흠, 그 전에 멈출 수 있어요.”
“뭐라는 거야?!”
“제가 잘 조절할게요.”
“됐거든요!”
“신혼여행 왔는데, 아무것도 못 하게 하고.”
뭘 못 하게 해! 매일 밤마다 하는 건 폼이냐! 요즘 잠자는 시간이 엄청나게 달라졌는데!
“음……. 역시 체력 관련한 아티팩트를 하나 사는 게 어떨까요, 로나?”
“그런 분들을 위해 이게 있습니다! 딱 부인분과 어울리는 황금과 남편분의 눈 색을 담은 루비로 만들어진 이 물품!”
“회복 쪽은 없을까요? 체력을 늘리는 게 아니라 회복을 빠르게 하는 거요.”
“아- 그런 건 이쪽이죠, 이쪽! 에메랄드로 구성된 이 귀걸이!”
“그거 하나 주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모나한?!”
로나가 “결국엔 사 버리는 거냐, 결국엔 3일 밤낮을 자지 못하게 되는 거냐.”라고 중얼거리자, 모나한이 웃으며 로나의 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보다는 지금 체력 회복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게 좋겠어서요. 요즘 낮에 앉기만 하면 주무시잖아요. 풍경 보면서 신기해하던데 피곤해하지 말고 구경하세요.”
예쁘게 웃으면서 하는 다정한 말이었지만, 로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 눈에도 모나한은 방긋방긋 웃으며 부드러운 손길로 로나의 귀걸이를 빼고 방금 산 에메랄드 귀걸이를 걸어 줄 뿐이었다.
진한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초록색의 에메랄드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로나는 결국 몸을 휘감는 시원한 느낌에 넘어가겠다는 듯이 눈을 돌렸다.
“확실히 피로가 좀 풀리네요.”
“몸 안에 마나를 돌려서 회복 속도를 빠르게 하는 아티팩트니까요. 가서 바깥 구경 더 할까요?”
“음료수는요?”
“시원한 복숭아 에이드를 시켜 놨어요. 여름이라 그런지 복숭아가 맛있더라고요. 마침 저기 나오네요.”
“좋아요. 잘 찾아보면 커다란 몬스터나 괴수를 볼 수 있대요. 새가 무리 지어 나는 것도요.”
“우린 눈이 좋으니까 더 멀리까지 찾아볼 수 있을 거예요. 가요.”
모나한이 허리에 팔을 감고 움직이자, 로나가 그와 발걸음을 맞추어 걸었다.
로나가 휴게실 직원이 건네주는 복숭아 에이드를 받을 때, 모나한은 살짝 뒤돌아 금발의 상인에게 미소 지었다.
상인도 슬쩍 엄지를 들어 올리며 모나한의 미소에 응답했다.
뱀파이어가 된 로나는 동체 시력도 좋아지고 감각도 예민해졌지만, 훈련을 받거나 한 건 아니라서 아직도 둔한 부분이 많았다.
전쟁터에서 수도 없이 굴렀고, 괴수 사냥꾼으로 활동했던 모나한의 손놀림을 눈치채기엔 무리라는 이야기였다.
모나한은 무거워진 주머니에 만족하며, 복숭아 에이드를 한 모금 마시고 만족한 얼굴이 된 로나에게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