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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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는 오렌지꽃과 이름 모를 노란색 꽃들로 만들어진 부케를 멍한 얼굴로 들고 있었다.

꽃다발에서 달콤한 꽃향기와 상큼한 냄새가 피어올라 코를 간지럽혔지만, 집 나간 정신은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분명히 모틸라에게 결혼식을 모두 맡겨 놓긴 했다.

몇 달 전부터 모틸라가 건넨 화려한 카탈로그에서 여러 가지를 고르기도 했다.

“아침에 잠옷 입은 채로 하품하면서 골랐던 기억이 있는데…….”

로나는 이마를 짚으려다가 끼고 있는 하얀색 장갑에 화장품이 묻을까 봐 그만두었다.

쿠키 가루를 가득 묻힌 손가락으로 고른 드레스를 입고, 한 손으로 고추튀김을 우적우적 먹으면서 골랐던 장갑을 끼고, 모나한에게 발 마사지를 받다가 고른 액세서리들로 장식하고 있었다.

모틸라랑 깔깔 웃으며 골랐던 오렌지꽃과 노란색 꽃으로 이루어진 부케도 들고 있었고.

“내가 이렇게 많은 걸 결정했었나?”

뭔가 많이 골랐던 것 같긴 한데 기억에 남기에는 모틸라가 너무 급진적인 언니였다.

그녀는 폭풍처럼 다가와 고르라고 카탈로그를 건넸다.

금액, 숨겨진 속뜻, 원단의 느낌, 사용된 보석 같은 세부적인 사항은 아무것도 없는 그냥 그림으로 가득한 카탈로그를.

그리고 거기에 로나의 빠른 결정력이 빛을 발했다.

폭풍 같은 모틸라와 번개 같은 로나가 만나 결혼식의 세부 사항들은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일생의 한 번뿐이라고 생각했으면 온갖 고심 끝에 고를 것들도 ‘이번에 좀 별로면 다음엔 다른 걸로 하면 되지’라는 생각하에 빠르게 결정돼 버리니 로나가 정신 차릴 때 즈음에는 이미 결혼식장의 신부 대기실이었다.

3일 전에 약 2년 반 만에 만난 가족들과의 회포도 풀었고, 모나한이 도대체 언제 배운 건지도 모를 최고급 스파 마사지도 해 줬다.

모틸라가 아공간 속에 꼭꼭 숨겨 놓았다던 무슨 긴 이름의 진주를 갈아 넣었다는 화장품도 발랐다.

원래 뱀파이어라서 보송 반짝했던 피부는 3일 관리했다고 뽀송 번쩍해졌다.

거기다가 화장술까지 덧입히니 로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이게 과연 나인가, 아니면 필터를 깐 나인가, 아니면 전문가의 포샵질을 한 나인가?’ 고민했다.

오랜만에 본 가족들이 ‘이게 수도의 문물……?’이라고 중얼거렸을 정도였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버리니 ‘……마법?’이라고 중얼거리더라.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난 2년 반 만에 강산이 변한 것 같고…….”

지표면이 솟아오르고 계곡이 새로 생기면서 묻혀 있던 화석들이 발굴되고…….

어릴 적에 모험, 사건, 변화 어쩌구 중얼거렸더니 20년 정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가 2년 반 동안 몰아서 휘몰아친 모양이었다.

아무튼 로나는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준 화려한 하얀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신부 대기실이라고 해서 전생처럼 아는 사람들이 인사하러 오는 건 아니고, 진짜 결혼식 하기 전의 대기실이라서 로나는 가족들이랑 수다 떨고 간식 먹으면서 앉아 있었다.

뱀파이어 신체 최고! 아무리 먹어도 배가 튀어나오지 않지!

딱히 막 엄청나게 긴장되지도 않았다.

귀족의 누구누구가 오는 것도 아니었고, 영주 님 누구누구는 발터였고, 나머지는 그냥 축하하기 위해 온 인디고 영지의 영지민들과 나의 가족들.

그리고 모나한이 속해 있다는 무리의 뱀파이어 몇 명 정도?

모나한이 부르겠다고 하는 말에 치명적인 척해야 하냐고 창백해져서 물었더니, 이런 행사에서는 안 해도 된다고 안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행사에까지 그런 걸 하면 오는 뱀파이어가 아무도 없게 된다고 예외 사항으로 되어 있다는 말에 로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귀족의 결혼식은 순서가 어떻고 정통이 저쩌고 한다던데 모나한도 자신도 귀족이 아니라서 상관없었고, 그런 형식을 따를 마음도 없었다.

결혼식을 계획한 모틸라도 마찬가지인지, 그녀는 어떻게든 재밌고 신나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며 돌아다녔다.

결혼식은 진짜로 모틸라가 고르고 자신과 모나한이 정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맛있는 빵과 달콤한 술이 가득한 결혼식……?

로나는 ‘정말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어도 되는 걸까……’라고 생각했지만, 의욕 가득한 모틸라와 모틸라의 의견에 처음으로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나한의 모습에 모든 의문을 저리 치워 버렸다. 알아서 잘하겠지 싶어서.

그리고 모틸라와 모나한이 알아서 잘하고, 발터가 조용히 알아서 잘 뒷받침한 결과.

로나의 대기 시간이 끝나고 결혼식장으로 갈 때가 되었다.

가족들이 먼저 신나 하며 결혼식장으로 사라지고, 로나는 처음 보는 보라색의 드레스를 입은 모틸라가 상기된 얼굴로 등장 시간이라고 하며 앞서 걷는 것을 따라 걸었다.

신부를 가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천막 안을 천천히 걸을 때도 로나는 그냥 폭풍을 맞아 털털 털린 기분이었다.

천막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의 손을 잡을 때도, 모틸라가 그 옆에서 기대된다며 발을 동동 구를 때에도.

천막의 두꺼운 천이 느리게 걷히고, 그 사이로 환한 5월의 햇살이 흐르고, 자신이 신은 새하얀 구두 끝에 햇빛이 걸릴 때도.

그러나 그 햇빛 끝자락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저 멀리 단상 아래에서 모나한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새까맣고 딱 맞춘 바지와 새하얀 상의. 턱시도와 제복의 중간 즈음 돼 보이는, 평소 입는 것과는 다르게 화려한 옷.

살짝 흩트렸던 평소와는 다르게 깔끔하게 넘긴 회색 머리.

모틸라가 화장이라도 시켰는지, 창백한 빛이 도는 하얀 피부가 5월의 햇살 아래 빛나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선홍색 눈동자가 휘며 웃음 짓는 것은 당연한 거였지만, 그 웃음 끝에 그가 조그맣게 침을 꿀꺽 삼켰을 때, 그러니까 모나한의 얼굴에서 한가득 있는 행복 사이에서 그답지 않은 긴장을 발견했을 때.

로나는 키득거리며 웃고 말았다.

자신을 보송 반짝하다 못해 뽀송 번쩍하게 만들어 놓은 사람이 자기면서.

자신이 입을 드레스와 액세서리, 부케 그림을 그렸던 이가 자기면서.

그런 거 하나도 모르는 척, 이런 내 모습은 처음이라는 얼굴로.

원한다면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 결혼식을 해도 좋다고 말했고, 그렇게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정말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으면서.

창백한 얼굴에 귓가만 붉게 붉히고, 이 순간이 너무나 긴장된다는 얼굴이고.

로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한 채로, 모나한에게 가는 발걸음을 빠르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제 손을 잡아 주는 아버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속도를 맞춰 걸으면 되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어지는 걸 들키지 않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가서 붉어진 귓가를 가리키며 놀리고 싶었으니까.

깔끔하게 넘긴 앞머리를 흐트러트리며 그렇게 좋냐고 묻고 싶었으니까.

나도 생각한 것보다 괜찮아서, 좋아서, 이렇게 웃는다고 말해 주고 싶으니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천천히 오렌지꽃이 뿌려진 천 위를 걸어, 모나한의 손을 잡고, 단상 위에 긴장된 얼굴의 발터를 보았을 때도, 로나는 잘게 튀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고, 새하얀 이가 보이고, 눈은 동그랗게 휘고.

난 이렇게 폭풍에 휩싸여 멍한 기분인데, 발터랑 모나한은 긴장된 표정 가득이고, 모틸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신나 하고 있고.

로나는 이제 모나한이랑 결혼식을 하고 있어서 웃음이 나오는 건지, 그냥 이 모든 게 엉망진창인 것 같아서 웃기는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구별할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기뻐요? 웃음을 감추지 못하시네요.”

모나한이 로나의 손을 건네받고 단상 앞에 서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로나는 자신의 손을 건네받은 손이, 목소리의 끝이 떨린다고 놀리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그냥 모나한의 말대로 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리 네 명의 표정이 엉망진창인 게 웃겨서요.”

“감동한 게 아니라요?”

“감동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냥?”

“그냥 즐겁네요.”

특히 발터 씨가 엄청 긴장한 게요.

로나는 모나한이 떨고 있어서 즐겁다는 마음은 숨긴 채 발터의 핑계를 댔다.

사실 발터가 긴장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정말로 웃기기도 했고.

로나가 속삭이는 목소리에 모나한이 힐끗 주례를 서고 있는 발터를 바라보았다.

이 영지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주례를 서게 된 발터는 덤덤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턱 끝을 덜덜 떨고 동공을 지진 시키고 있었다.

모나한과 로나가 서로 작게 속삭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순서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는 지표였다.

모나한이 로나가 웃겨 하는 게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전부 완벽한데 발터 씨가 좀 흠이네요.”

“뭐든 하나 정도는 흠이 있어야 안심되지 않아요?”

“로나는 흠이 있어서 즐거운 것 같고요.”

“완벽하면 별로 안 웃기잖아요.”

“-그럼 신랑 신부의 맹세의 키스가 있겠습니다!”

로나와 모나한이 속삭이는 동안 긴장한 나머지 혼자서 폭주해 나가는 발터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해 둔 순서를 어긴 건 아닌데, 혼자 폭주해서 다른 사람들이 끌려가는 형식이 되었다.

모나한은 그런 발터의 모습을 한 번 더 흘낏 바라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매번 그랬듯이 코끝을 한 번 찡그리며 웃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맞아요. 완벽하지 않아야, 농담이 들어설 자리가 있죠.”

“놀릴 거리도 생기고요.”

“웃음이 들어설 자리도 생기겠네요.”

모나한의 말에 로나는 입꼬리를 조금 더 늘려 짙게 웃고는 모나한이 좀 더 내려오기 전에 발끝을 들어 올렸다.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가, 로나가 발을 내리자 떨어졌다.

모나한이 고개를 숙여 로나의 입술을 따라왔고, 부족하다는 듯이 길게 입 맞추었다.

닿은 입술이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 보니, 모나한이 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신도 웃고 있거나. 둘 다 웃고 있거나.

옆에서 발터가 “어, 음……. 음.” 하면서 다음 멘트를 하려다가 그만두는 소리를 들었다.

로나가 모나한과 입을 맞춘 채로 키득거리며 웃었고, 모나한이 그 웃음에 따라 턱을 작게 흔들며 입술을 간지럽혔다.

그러고는 한껏 웃는 얼굴로 천천히 멀어졌다.

장난기가 가득 담긴 얼굴이라서, 로나는 한 번 더 웃고 말았다.

남들 앞에서 하는 맹세는 하지 않았다.

그건 청혼받던 날 다 해 버린 듯해서.

그냥 우리는 한가득 축하받고, 한가득 축복받고.

우리가 이제 같이 평생을 살 거라고 남들에게 행복 가득한 얼굴로 말하고.

그러려고 결혼식을 한 거니까, 딱 그대로.

“다음에도 발터 씨에게 주례를 시킬래요.”

로나가 모나한의 팔에 손을 올리고 버진로드를 걸어가며 말했다.

“또 숨죽여 웃으려고요?”

“네. 긴장 하나도 안 되고 좋네요.”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3일 전에 모나한에게 최고급 스파 관리를 받는 것도 또 할래요.”

“그건 원하실 때마다 해 드릴 건데.”

“음흉한 손길이 곁들어 있지 않다면 더 좋겠어요.”

“그건 선택 불가 사항이에요.”

모나한의 말에 로나가 모나한의 올려다보자 모나한은 뻔뻔하게 웃었고, 로나는 입 끝을 내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둘 다, 동시에 웃어 버렸다.

모틸라가 계획한 대로, 예쁜 옷을 입은 소녀들이 오렌지꽃을 그들의 머리 위로 뿌려 댔다.

사이사이 작은 노란색 꽃들도 한가득이었다.

“이것도 또 할래요.”

“꽃을 뿌리는 거요?”

“네. 하얀색과 노란색 꽃을 가득 뿌리는 거요. 모나한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게 아주 예뻐요.”

“……로나도 아주 예뻐요.”

“알아요. 지금 엄청나게 화장했거든요.”

“평소에도 아주 예뻐요.”

“알아요. 로나, 귀엽다. 나, 귀엽다.”

“진짜데. 아까 천막 걷어질 때 보고 깜짝 놀랐다고요. 너무 예뻐서.”

그래서 긴장한 건데. 당신이 너무 예뻐서.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걸어오는 게, 너무 사랑스러워서.

“오글거리는 말 해 봤자 떨어지는 건 제 빵밖에 없어요.”

“오, 그건 최고의 포상이잖아요.”

“식욕의 노예 같으니.”

“당신과 식욕의 노예인 거죠. 진짜잖아요. 목에 계약서도 있는데.”

“그때 모나한에게 케이크를 판 거요-”

“아주 잘했죠?”

모나한이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하게 묻는 말에 로나는 버진로드의 끝자락을 밟으면서 말했다.

익숙한 각도로 모나한을 올려다보면서.

선홍색 눈동자에 눈 맞추면서.

온 얼굴을 환하게- 웃으면서.

“네. 아주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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