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 (111/154)

111

발터는 밀과 묘목들을 가지고 옆 영지의 영주에게 향했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과 자신이 가주가 되었다는 것을 전한 발터는 꽤 비싼 값에 밀과 묘목을 판매하고 돌아왔다.

“조의금과 저에 대한 축하금을 더한 값이겠죠. 어느 정도 친분이 있던 분이셨으니, 가축도 영주 관할 목장에서 싼값에 받기로 했습니다.”

발터가 목장이 저쪽이라고 안내하며 이야기했다. 동정심이 섞여 있는 값일 게 분명해 로나는 발터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지만, 발터는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동정에 대한 값이라도 치러 주셨으니 다행이죠.”

그 말대로 옆 영지의 영주는 동정에 대한 값을 꽤 잘 쳐주었다. 일행들을 꽤 많은 수의 가축을 가지고 영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로나는 새삼 인디고 영지가 겨울 동안 겨우 살아남았을 뿐이라는 것을 되새겼다.

“그래도 겨울 동안 다들 잘 먹었으니, 다시 일어날 힘은 충분합니다.”

발터가 조그맣게 웃으며 하는 말에 로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인디고 마을에 돌아가는 시골길에는 어느새 연두색 물을 먹었던 가지 끝에서 봄 잎들이 피어 여린 색감을 채우고 있었다.

영지에 도착하자 정리한 과수원에 묘목을 심고 있는 영지민들이 마차를 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발터의 말대로 그들 중 마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겨울 전보다 건강해진 이들만 가득했다.

발터는 영지민에게 가축을 나눠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풍족하고 평화로운 인디고 마을이 되리라.

“봄은 바쁜 계절이죠. 오렌지꽃이 풍성하게 피기 전에 웬만한 것들을 끝내 놓으려 합니다.”

결혼식이 있으니까요.

저택에 도착하고 발터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하는 말에 로나가 “아.”라고 작게 소리 내며 이제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오렌지꽃이 가득 피는 날에 하기로 한 결혼식.

로나는 ‘너무 결혼식에 관심이 없었나?’라고 생각하며 반성하기로 했다.

2년 전까지 인생 계획에 ‘빵집 부엌 구조 리모델링’이나, ‘머랭 치는 마법 기구 제작’은 있었어도, ‘남자친구, 연애, 결혼’은 없었던 탓이었다.

특히 결혼식에 관한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전생에서는 남의 결혼식에 몇 번 가 본 게 다였고, 현생에서는 평민들은 보통 결혼식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 하나 들고,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주위에 알리는 정도?

그나마 좀 잘 사는 이들은 신관에게 축복을 부탁하곤 했었다. 언니가 결혼했을 때 신관을 부를 자금을 보태 줬는데, 무지막지하게 비쌌던 기억이 있다.

신관에 축복을 받으면 결혼 생활이 행복해진다고 하는데, 신을 믿지 않은 로나에게는 돈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아 만약 결혼하더라도 신관을 부를 생각이 없었다.

“여기 뱀파이어가 셋이나 있는데, 부르는 게 오히려 웃기죠.”

“차라리 모나한에게 부탁해. 이 녀석 옛날에 신관으로 살았던 적 있으니까.”

“청렴결백하고 신의 말씀을 잘 따른다고 훈장도 받았던 적이 있답니다.”

“모나한이 받았을 만큼 그 업계가 썩었다는 의미지.”

다른 사람들도 다들 부를 생각이 없는 것 같았고 말이다. 심지어 발터도 고개를 저었다.

“영지가 망하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도망간 이들입니다. 그전에도 부정부패가 꽤 심했던 듯하더군요.”

그는 나중에 서류를 처리하면서 알았다고. 영지가 다시 부흥해도 신전을 세우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귀족들도 불러서 축복을 받긴 합니다만, 사실상 형식적인 거죠. 애초에 제 가문은 기사 가문이라 신성력 있는 신관은 와 주지도 않을 겁니다. ……혹시 받고 싶으신 거라면-”

“아뇨. 받고 싶지 않아서 말 꺼낸 거예요.”

로나가 발터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로나 뒤로 모틸라가 매우 신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로나의 몫까지 관심과 기대를 전부 가져간 표정이었다.

“결혼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온실에 꽃을 좀 키워야겠어! 그래야 결혼식 때 꽃을 많이 쓸 수 있지!”

“아, 미리 키워 둬야 하는군요.”

“그래! 특히 부케에 넣을 꽃이 필요해! 이것저것 고민해 봤는데, 역시 로나가 좋아하는 색을 넣는 게 최고일 것 같아. 근데 로나가 좋아하는 색은 검정이잖아? 결혼식에 검은색은 좀 안 어울리잖아? 그래서 내가 고민하기를-”

모틸라가 숨도 안 쉬고 쏟아 내는 말에 로나가 정신이 멍해져 눈만 깜박이는데, 모나한이 미간을 팍 찡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로나가 좋아하는 색은 노랑이에요. 검정이 아니라.”

“응? 로나는 검정을 좋아하잖아. 마치 내 머리카락 색 같은-”

“아뇨. 노란색입니다, 노란색.”

로나는 당신의 머리카락 색을 좋아하지 않아.

모나한이 이를 악물고 하는 말에 모틸라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발터랑 눈을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발터 앞이라 내숭이라도 부리고 싶은 것 같았다.

모나한도 그걸 눈치챘는지 속이 울렁거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틸라는 그 모습에 콧방귀를 끼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줄게. 로나가 좋아한다면야.”

“지금부터 드레스도 맞춰 놔야겠죠.”

“영지민 중에 옷을 잘 만드는 사람을 수소문해 놓겠습니다.”

로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서로 의견을 나누며 결혼식에 대해 어떻게 할지 상의했다. 응접실에 도착할 즈음에는 모틸라가 어느새 가져온 결혼 계획서도 함께였다.

로나는 뭐라고 의견을 내 보려다가 생각보다 전문적이고 장대한 이야기에 조용히 입을 다문 지 오래였다.

귀족으로 살아 본 적이 있는 세 사람에게 의견을 내는 것은 무리였달까.

그냥 로나는 저들에게 맛있는 거라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조별 과제에 참여할 만한 지식이 없다면 물주라도 되자!

“이거 먹으면서 계속해요. 레몬 마들렌 만들었어요.”

“오!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나더라니!”

“딸기 우유도 있어요. 같이 먹어요.”

“이건 또 언제 만드셨습니까?”

“저번에 모나한이랑 심심해서 한가득 만들었죠. 아공간에 넣어 놓으면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으니까 많이 만들었어요. 먹고 싶으면 이야기하세요. 꺼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모틸라가 아래 깔린 딸기 과육을 섞으며 로나를 바라보았다.

“로나 넌 하고 싶은 거 없어?”

“……가족들을 불렀으면 좋겠다는 정도?”

“그건 당연하지! 그거 외에는?”

“딱히 없어요.”

로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색도 이미 모나한이 말했고, 웨딩드레스나 식장 준비 같은 건 모틸라가 더 잘할 것 같고.

“제가 잘하는 것을 고민할게요.”

“어떤 거?”

“웨딩 케이크를 어떻게 만들지, 식장에 놓을 간식용 빵은 뭘 만들지.”

“……갑자기 의욕이 마구 솟구치네.”

모틸라가 로나의 말을 듣고 두근거린다며 심장께를 부여잡고 말했다.

로나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전 케이크를 고민할 테니까, 다른 건 부탁드릴게요.”

로나의 말에 모틸라가 폭풍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한테 딱 어울리는 것들로 골라서 카탈로그를 만들어 줄게.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알겠어요.”

로나는 의욕이 가득한 모틸라의 모습에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모틸라는 그녀가 말했던 대로 갑자기 다가와 카탈로그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머랭을 만들다가 모틸라가 가져온 부케 카탈로그를 보는 것이 시작이었다.

조리대에 팔을 기대고 이게 좋을지, 저게 예쁠지 한참을 머리를 맞대고 골라야 했다.

여러 가지 노란색 꽃들과 오렌지꽃으로 이루어진 부케 그림이 어찌나 섬세하고 예뻤던지.

부케를 골랐을 때 즈음에는 머랭이 푹 가라앉아 있어 이마를 부여잡아야 했었다.

응접실 흔들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창밖을 보며 쿠키를 집어 먹고 있는데 웨딩드레스 카탈로그를 가져오기도 했고, 부엌을 정리하면서 하품을 하는데 여러 머리 모양이 그려진 카탈로그를 가져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게 고르던 로나도 나중에 가서는 모틸라가 카탈로그를 가져오면 기대하며 펼쳐 보았다. 그도 그럴 게 하나같이 그림이 아주 섬세하고 예뻤기 때문이었다.

“이건 도대체 누가 그린 거예요? 진짜 잘 그렸다.”

“응? 모나한.”

“……네?”

“모나한이 그렸는데? 모나한 옛날에 화가로 활동한 적 있잖아.”

“……모나한이 예전에 했던 직업들이 매우 궁금해지고 있어요.”

“내가 아는 건 몇 개 안 되는데?”

“어떤 건데요?”

“시골 마을 신관, 초상화 전문 화가, 오페라 전속 화장가, 괴수 사냥꾼 정도?”

오래 한 게 그 정도이고 짧게 한 것들은 더 많을걸?

모틸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 뒤, 꽤 실력이 좋은 편이라고 이야기했다.

“솔직히 그림 쪽은 연습을 많이 하면 실력이 늘어. 특히 사실적으로 보고 그리는 쪽은 쉽지.”

“그래요?”

“우린 시간이 많으니까. 창작 영역으로 가면 재능이 중요하지만, 정밀화는 연습으로 간격을 메꿀 수 있으니까.”

모틸라는 자신도 화가로 활동한 적이 꽤 있다면서 드레스 카탈로그는 자신이 그린 거라고 이야기했다.

“드레스 디자이너로 활동한 적이 있거든! 그쪽은 자신 있지!”

모틸라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하며, 바느질에 익숙해지는 건 한참 걸렸지만, 디자인을 정하는 것은 금방 했다며, 자신은 연습 없어도 예쁜 디자인을 뽑는 재능이 있다고 자랑했다.

로나가 그 자랑을 들으면서 대단하다고 손뼉을 치려고 할 때, 저택 입구 쪽부터 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귀가 밝은 둘은 그 발소리가 발터임을 짐작하고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예상한 대로, 얼굴에 긴장을 가득 담은 발터가 응접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뭐야? 무슨 일 생겼어? 왜 검을 차고 있어?”

모틸라가 발터의 허리에 있는 검을 눈치채고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발터는 거칠어진 숨을 겨우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도적들이 몰려와서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담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입니다. ……모틸라 님, 도와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모틸라가 급하게 아공간을 뒤져 로브를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