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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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는 온실의 허브 화분을 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겨우내 키웠더니 허브들이 화분 가득 자라서 더 큰 화분으로 옮겨 주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제 괜찮으니까 노지에 심어 놓을까.”

여기 정원도 황폐한데 여기저기 심어 놓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로나는 허브의 잎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온실 밖을 바라보았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씨와 눈이 바람과 함께 몰아치던 날씨도 지나가고 이젠 겨우내 쌓였던 눈이 점점 녹아 가는 계절이 되었다.

봄이 오기 직전의 식물들이 가지 끝에 연두색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여린 잎과 작은 꽃망울이 맺히기 직전의 물을 한껏 머금은 모양새였다.

비라도 한 번 더 내리면 세상이 온통 봄의 색으로 물들 것 같았다.

한동안 저택을 벗어나지 않았던 발터와 모틸라도 눈이 녹기 시작하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온실 한구석에 모여 자라고 있는 오렌지 나무 묘목들을 심기 위한 땅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묘목이랑 씨앗은 충분한데 가축 수가 부족하다고 했었나?”

로나는 발터가 응접실에서 서류를 보며 하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마침 일을 마치고 온실에 들어온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도망간 가축이 많아서요. 도적들이 데려가 버린 것도 많고. 아무래도 옆 영지에 가서 사 와야 할 것 같습니다.”

더웠는지 이마에 땀이 맺힌 발터가 외투를 벗어 팔에 걸쳤다. 그런 발터의 등 뒤로 모틸라가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나타나 말했다.

“그럼 내가 갔다 올래. 마침 소풍 가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잠깐 갔다 오면 되겠네.”

“옆 영지에 가서 묘목과 씨앗을 좀 팔고 가축을 사 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영지에 심어야 하지 않아요? 농사도 해야 하고.”

“로나 님 덕분에 겨울 동안 밀을 먹지 않고 보관할 수 있었거든요. 지금이 가장 밀값이 비쌀 때이니, 이걸로 가축을 사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내가 가서 사 올게! 나 그런 흥정 잘한다?”

“오렌지 묘목 같은 경우는 원래 저희 마을에서 봄마다 팔던 품목입니다. 그 밖에도……. 생각보다 장작이 좀 남았던데, 이것도 가져가 볼까 싶고요.”

“저기? 내 말 듣고 있어?”

모틸라가 당황하며 물었지만, 발터도 로나도 모틸라를 무시한 채 이야기를 나눴다.

도망간 전적이 있는 자가 어디서! 널 보낼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다!

“내가 간다니까? 내가 가고 싶다니까?”

“예? 도망간 적이 있는 분의 말씀이라 그런지 들리지 않습니다만?”

“……도망 안 갈 건데.”

“로나 님, 예전에 모틸라 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전 그 말씀이 아주 인상 깊었어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죠.”

“뭔데요?”

모틸라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이야기하는 발터의 모습에 로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예전이라면 모나한과 내가 인디고 영지에 오기 전 이야기 같은데, 모틸라가 무슨 말을 했길래 저러지?

“응, 다음 거짓말.”

“네?”

“어, 안 믿어.”

“…….”

모틸라가 예전에 발터를 놀려 먹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제 그걸 돌려주는 중인 거고.

그 증거로, 봐라. 저기 모틸라가 입을 쩌억 벌리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발터는 몸을 돌려 모틸라의 그런 표정을 보았음에도 언제나와 똑같은 덤덤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모틸라 님. 응, 다음 거짓말. 어, 안 믿어.”

로나는 발터의 덤덤한 표정에 순간, 그가 모틸라를 놀리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지 헷갈려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모틸라에게는 충분히 놀리는 것으로 들렸는지 모틸라가 약 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하다가 소리쳤다.

“그럼 다 같이 가면 되잖아! 다 같이 옆 영지로 소풍! 그럼 나도 도망 못 가겠지! 이러면 된 거지!?”

모틸라가 억울함을 가득 담아 소리치는 말을 들으며, 로나는 ‘이게 바로 인과응보다’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저희 마차로 갈까요?”

“로나 님 마차보다는 제 마차로 가는 게 편하실 겁니다. 아무래도 로나 님 마차는 여러 가지가 많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죠. 오븐은 저번에 꺼내 왔지만, 냉장고에 조리대도 있으니까요.”

“발터 씨 마차도 좀 정비해야 할 것 같던데요.”

부엌에 있었던 모나한이 온실로 들어오며 대화에 참여했다.

“저번에 저희 마차에서 오븐 꺼내면서 보니까 상태가 좋진 않던데.”

“으음……. 한동안 관리를 못 했으니까요.”

“그 마차를 쓸 생각이시면 제가 좀 손봐 놓죠.”

“가능하시겠습니까?”

“저희 마차 관리하려고 좀 배워 놨거든요. 전문가보다야 못하겠지만.”

“전문가가 전부 사라진 가문인데요. 해 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하죠.”

신세 지는 게 많아 송구스럽다면 발터가 볼을 긁적이자 모나한이 됐다며 손을 저었다.

“그것보다는 슬슬 저택에 사람을 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만, 여러분의 정체가 들키는 것이 신경 쓰여서요. 불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모틸라야 앞으로 늙어 갈 테니, 평범한 인간하고 같아 보일 거고.”

“으으윽…….”

모틸라는 모나한의 말에 듣기 싫다는 듯이 신음하며 째려보고는 이제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모나한은 그런 모틸라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희는 구석에 있는 방을 쓰니까, 그쪽에 사람들이 오가지 못 하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부엌도요.”

“음, 그러시다면 사람을 구해 보겠습니다.”

발터가 모나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옆 영지를 갔다 온 후에 본격적으로 사람을 뽑아 보겠다고 말했다.

로나는 자신도 마차 손보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모나한에게 말하고는 모두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눈이 좀 더 녹으면 가 보죠. 아직 음지는 눈이 쌓여 있으니까.”

그 말에 모틸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온실의 유리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요즘 구름이 좀 끼었던데, 며칠 안 걸려서 봄비가 내리지 않을까? 그럼 눈이 다 녹을 거고.”

모틸라의 말대로 하늘에는 회색 먹구름이 느리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모나한이 그 먹구름을 보고 공구를 어디에다 두었는지 고민했다.

“그럼 비가 오기 전에 마차 정비를 끝내 놔야겠네요. 마침 휴식 시간이니까 지금 가서 해 버리죠.”

“마침 컵케이크 빵을 식히고 있는데, 위에 크림만 올려서 가져가요. 그거 먹으면서 하죠.”

“로나는 상을 참 완벽하게 주는 사람이라 황홀하다니까.”

컵케이크를 먹겠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모틸라가 로나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나도 오늘 열심히 일했는데!”

“당연히 여러분 것도 만들었죠. 잠깐만 기다리시면 돼요.”

“부엌에서 기다려도 돼? 위에 크림 올리는 거 보고 싶어.”

“그래요. 직접 해 볼래요?”

“와, 진짜? 나 그거 정말 해 보고 싶었어. 짤주머니로 이렇게 짜는 거 말이야.”

모틸라가 짤주머니 짜는 시늉을 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로나가 그 모습을 보며 잘게 웃고는 모틸라를 데리고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모나한과 발터가 졸졸 따라갔다.

“저도 해 보고 싶어요, 로나.”

“음,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혹시 제 몫이 있다면 모틸라 님께 드리겠습니다.”

“오! 그럼 나 두 배로 짜 보는 건가?”

“네네. 이왕 하는 거 장식도 올릴까요? 과일 조림이나 초콜릿 조각 같은 거.”

“할래, 할래!”

모틸라가 사뿐사뿐 걷는 것을 넘어 통통 튀는 걸음걸이로 걸으며 대답했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도 처음 컵케이크 만들 때, 위에 크림 올리는 게 그렇게 재밌었지. 그런 장식하는 건 빵집에서 일로 할 때도 재밌더라. 여러 모양을 고민하기도 하고.

“크림 여러 가지로 만들어 줄게요. 장식도- 음, 초콜릿 가루도 있고, 작은 쿠키라든가. 컵케이크 빵은 많이 만들었으니까요.”

“어떡해……. 나 소풍 가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야.”

모틸라가 정말 두근거린다는 듯이 말했다. 로나는 그 모습을 보며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드디어 도착한 부엌의 문을 열었다.

갈색 문이 열리자, 제일 먼저 들어가는 로나의 땋은 갈색 머리를 뒤로 봄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부엌이 모틸라의 눈에 펼쳐졌다.

인디고 저택에서 살면서 수없이 들어갔던 부엌이었지만, 부엌 안의 식은 컵케이크 빵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는 그 공간을 다른 곳으로 보이게 했다.

로나가 크림을 꺼내 여러 가지 재료를 섞는 모습도 그녀가 이 저택에 오고 나서 많이 본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모틸라는 왠지 모르게 두근거려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조리대에 바짝 붙어 서서 로나가 재료를 섞는 보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린애처럼 기대하는 모습이 조금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었다가, 모나한도 발터도 로나의 손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키득거렸다.

하긴, 저렇게 전문적인 손길로 능숙하게 섞어 대는데. 보고만 있어도 재밌는 건 이런 걸 거야.

그래서 모틸라는 그냥 그 느낌을 즐기기로 했다.

이젠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의 쿠키를 구워 주시던 엄마 옆에 꼭 붙어 있는 그 느낌을, 가족들이 부엌에 모여 있는 것 같은 따뜻하고 포근함을.

마지막으로 언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모틸라는 그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자신이 이것을 아주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축제 등 밑에서 모나한이 했던 ‘평온과 평화’가 어떤 것인지도.

모나한이 이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라 말했을 때, 자신은 이해하지 못했지.

한평생 제 상처를 보듬으려면 필요한 것이 산해진미와 온갖 파티,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인 줄 알고 살았는데.

이런 것들 말야. 작은 부엌에서 크림을 짜 보는 경험 같은 거. 둘러앉아 키득거리는 웃음 같은 거.

따뜻한 햇살, 온 방을 채운 달콤한 냄새 같은 것들은.

내게 필요하노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인데.

모틸라는 자신이 힘 조절을 못 해 엉망진창이 된 크림 위에 초콜릿 조각들을 올리며 키득거렸다.

엉망진창이어도 달콤한 색이고, 맛있을 게 분명해서 괜찮았다.

한평생 원하는지도 모르던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가지게 되어서 더욱 괜찮아졌다.

모틸라는 로나가 내미는 다른 컵케이크 위에 이번에는 완벽하게 크림을 쌓아 올렸다.

그렇게 길던 생의 마지막에 와서야 자신이 원하던 게 무엇인지 알아버린 것이 억울했다.

그리고 이제라도 자신에게 왔다는 것이, 정말로 끝나 버리기 전에라도 알게 되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햇살과 달콤한 냄새, 웃음과 농담, 이상할 정도로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에 둘러싸여서.

모틸라는 조용히 모나한이 말했던 것을 인정했다.

그도 자신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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