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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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아아암-”

로나가 긴 하품을 끝내고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 내고 있을 때 모틸라가 부엌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요즘 계속 하품하네?”

로나는 모틸라의 말에 잔뜩 벌려 하품한 입을 다물어 몇 번 입맛을 다시고는 준비해 놓았던 식기와 수저를 트레이 채로 건네주었다.

모틸라가 익숙하게 트레이를 받아 끌었다.

“아, 모틸라 씨. 좋은 아침이에요.”

“아직도 모틸라 씨라고 불러? 그냥 이름 불러. 이만큼 친해졌는데, 어색하게.”

모틸라가 눈물을 닦으라며 손수건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로나는 마침 꼬박꼬박 호칭을 붙이는 게 어색해졌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받은 하얀 손수건에 눈물을 톡톡 닦고 다시 돌려주고는 손은 흔들거리며 다시 인사했다.

“모틸라, 좋은 아침.”

“난 좋은 아침인데 넌 피곤해 보인다.”

로나는 그 걱정에 몸이 피곤한 건 아닌데 정신이 피곤하다며 찌뿌드드하지도 않은 목덜미를 주물럭거렸다.

아직 인간일 때의 습관들이 남아 있는 모양새였다.

“왜 정신적으로 피곤해?”

“잠이 좀 부족해서요. 몇 시간 못 잤거든요.”

“우린 며칠 안 자도 멀쩡하잖아.”

“그러긴 하는데……. 뱀파이어가 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인간이던 시절의 습관이 남았나 봐요.”

“그럴 수 있지.”

모틸라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궁금한 점이 생겼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왜 잠이 부족한데?”

너희 일 끝나면 꼬박꼬박 방으로 돌아가잖아. 요즘은 나도 발터랑 노니라고 금방 가 버리는데, 잘 시간은 충분하지 않아?

로나는 그 말에 조금 망설이다가 어차피 성인인데 상관없다는 생각에 솔직하게 답했다.

“누구누구 때문에요. 요즘 좀 못 자게 해서.”

“아하.”

“뱀파이어의 긴 체력, 힘찬 체력 어쩌구 하더니 사실이더라고요.”

“아하하.”

“안 듣고 싶죠?”

“응.”

모틸라가 질문한 것을 후회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피하자 로나가 물었고, 모틸라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하나도 안 궁금해. 서로 연애 노 터치하자.

모틸라는 손까지 붕붕 저으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기엔 제가 터치를 꽤 한 것 같은데요? 이번에 착각물 방지도 그렇고.”

“무슨 말이야?”

“발터 씨가 모틸라 씨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착각하고 있더라고요.”

“맞잖아. 나 이제 59년밖에 못 사는걸?”

“그 숫자에는 보통 ‘밖에’라는 건 안 붙여요.”

“에엥.”

“인간으로 치면 59년 정도는 한평생이라고요.”

“난 뱀파이어인걸.”

“아, 그것도 말했어요.”

로나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으응?”

“모틸라 씨가 뱀파이어고 뱀파이어는 주름이 생기면 죽을 시간이 정해지는데, 그게 딱 60년이고 모틸라씨는 이제 59년 남았다고 말했어요.”

그 말에 모틸라가 밀던 트레이를 덜컹이며 멈추고 딱딱히 굳을 얼굴로 로나를 바라보았다.

온 얼굴에 당황과 경악을 담은 채였다.

“뭐, 뭐, 뭐라고?”

“다 말했다고요. 아직 말 못 한 거 있나? 흠.”

“아냐, 아냐, 아냐! 더 말 안 해도 될 것 같아!”

“모틸라 씨가 예전에 세 나라 왕자님에게 구혼 당한 거?”

“너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모나한이 말해 줘서.”

“모나한!!”

모틸라가 모나한을 ‘휙!’ 돌아보며 소리쳤지만, 모나한은 ‘어쩌라고’라는 표정으로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는 고개를 돌려 냄비의 국자만 휙휙 저었다.

너의 흑역사 따위 숨겨 줄 마음이 없다는 생각이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이이익! 로나야! 모나한의 흑역사는 궁금한 거 없니? 예전 연애라든가! 예전에 모나한이 사랑했던 사람이라든가!”

“한 명밖에 모르잖아요.”

모나한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도 만나서 인사만 한 번 해 놓고선.”

“그, 그래도 말이지. 모나한의 전 여친이 어떤 사람이었냐면-”

“면?”

“……어, 금발이었어.”

“아, 네.”

모나한이 크게 콧방귀 뀌며 비웃고 로나가 짜게 식어 대답했다.

그거 한국에서 ‘내 애인은 검은 머리야’라고 하는 말이랑 똑같잖아. 이 세계에 금발이 얼마나 많은데. 갈색 머리 다음으로 많은 게 금발이라고.

“눈, 눈은 초록색-”

“파란색이었는데요.”

“파란색이었어!”

“사실 뻥이었어요. 보라색이었어요.”

“아, 아아! 그랬지!”

“보라색도 아니었죠. 주황색-”

“몰라! 그래! 나 기억 못 한다!”

“멍청이.”

모나한이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사람을 보는 얼굴로 말했다. 멍청이라는 말에 진심이 너무나도 담겨 있어서 듣는 로나가 모틸라를 불쌍하게 볼 정도였다.

모틸라는 그 모습에 씩씩거리며 분노를 담아 외쳤다.

“사실은 너도 기억 못 하는 거 아냐? 너무 옛날이라 잊어버린 거지! 내가 알기로는 너 로나 만나기 전에 엄청나게 오래 연애 안 했잖아! 자다가 잊어버린 게 틀림없어!”

모틸라가 ‘그렇지!?’라며 소리쳤고, 모나한은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는 또 모틸라를 무시하며 냄비 국자만 돌렸다.

그 모습에 모틸라가 더 화가 났는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로나를 돌아보았다.

“얘, 로나야!”

저건 이제 나를 부를 때마다 쓰네.

아침 드라마 시어머니 같은 말투가 계속 나와요, 모틸라 언니.

“너도 예전 남자친구가 있을 거 아니니!”

“어, 음, 그렇죠?”

“남자친구 머리카락 색이 어떻게 되니?”

“……검정요?”

“눈은!”

“검정요.”

“또 다른 남자친구가 있었니?”

“아, 있었죠.”

“그 애는 무슨 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지고 있었니?”

“……검정요.”

“검은색을 좋아하는구나!”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단일 민족이라 검정이 가득했을 뿐인데.

모틸라는 드디어 모나한을 이길 것을 찾았다는 얼굴로 자신의 검은색 곱슬머리를 휘익 넘기며 뽐냈다.

“그럼 모나한의 회색 머리보다는 내 탐스러운 검정 머리가 좋겠네!”

“……어, 뭐. 익숙한 색이긴 하죠?”

“후후후. 역시 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색보다는 내 머리카락 색이 더 아름답지! 역시 로나야. 뭘 볼 줄 안다니까.”

“아, 음. 제가 안목이 좀 있죠.”

로나가 모틸라의 말에 대충 맞장구쳐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검은 머리가 더 좋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사실을 말하면 더 귀찮아질 것 같았다. 대충 대답해서 모나한과 모틸라가 티격태격하는 걸 멈추고 싶었다.

모틸라 언니. 목소리가 커서 힘들어…….

그리고 로나의 말을 들은 모나한이 충격을 받고 국자를 떨어트렸다.

“제, 제가 검은색으로- 염색이라도. 마법을 써서 눈을 검정으로-”

“쯧쯧쯧. 그런 거짓으로는 로나를 만족시킬 수 없어! 나 같은 천연의 검정만이 로나에게 합격을 받을 수 있다구!”

모틸라가 옆머리를 사르륵 넘기며 말했다.

“이것 봐! 이 흑요석 같은 머리카락, 마치 밤하늘의 가장 어두운 부분 같은 색! 바로 로나가 좋아하는 색!”

으음……. 딱히 그런 색은 아니었는데. 그보다는 갈색이 섞인 미묘한 검정이 많았는데.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색은 노랑인데.

로나는 머릿속으로만 마구 반박할 뿐 입 밖으로는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기엔 저 언쟁에 끼어들기가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로나의 마음을 모르는 모나한이 분하다는 얼굴로 낮게 신음했다.

“으으윽…….”

“너 같은 잿더미는 얌전히 국자나 돌리도록 해! 부엌 청소나 꼬박꼬박하란 말이야! 이게 뭐니? 어머, 이 먼지 좀 봐!”

모틸라가 선반의 먼지를 검지로 쓱 훔치며 모나한을 비웃었다.

오랜만에 모나한을 이겼다고 콧대가 한껏 올라가 모나한을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었다.

아, 언니. 그거 같다. 신데렐라에 나오는 계모.

신데렐라가 아마 ‘재투성이 엘라’라는 뜻이었지?

“오호호! 너 같은 건 모닥불 타고 남은 재가 딱 어울려! 재투성이 모나한!”

“크으윽!”

오, 그럼 신데나한인가.

모나한 예쁜 표정도 잘 지으니까 파란 드레스를 입혀 놓으면……. 으음, 어깨가 넓어서 무리인가.

그러고 보니 모나한 팔뚝도 생각보다 굵었지. 힘줄도 있고, 잘 보면 흉터도 좀 있었고.

으음, 그래. 드레스는 무리인가.

“그, 그- 로나는 내가 회색 머리라도 좋아한다고! 내가 로나의 갈색을 사랑하듯이! 그렇죠, 로나!?”

“진정해요, 신데나한.”

“네? 신데나한요?”

“아, 말이 좀 잘못 나왔어요. 진정해요, 모나한.”

“앗, 그거 모나한의 새로운 별명이야? 왠지 어감이 안 좋은 게 딱 어울려! 느낌이 아주 안 좋고, 모나한에게 어울려! 이 신데나한아!”

음, 내 말실수가 모틸라의 마음에 딱 들었나 보다.

“신데나한! 신데나한!”

“시끄러워!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뇌도 새까만 멍청이!”

“신데나한! 신데나한!”

“흑요석 어쩌고, 밤하늘의 가장 어두운 부분 저쩌고? 네 뇌 속도 밤하늘의 가장 어두운 부분처럼 아무것도 없을 거다!”

“신데나한! 신데나한!”

저기요. 당신들 몇 살? 몇백 년은 넘게 산 거 아니었어요?

무슨 초등학생들처럼 싸우고 있냐. 내 평화로운 부엌 돌려줘.

“저기, 조용히 좀 하는 게 어떨까요?”

“신데나한!”

“멍청이!”

“……먼저 입을 다무는 사람에게 모카 쿠키 증정.”

“…….”

“…….”

둘 다 식욕의 노예들이라서 다행이다. 다루기 쉬워서 참 다행이야.

어휴. 만나기만 하면 왁왁거리니. 처음 봤을 때 한순간이나마 깊은 사이인가 의심했던 내가 한심할 정도라니까.

깊긴 깊은데, 연인 쪽 깊음이 아니라 남매 쪽 깊음이었어. 너무 남매라서 힘들다야.

“자자, 사이좋게 이거 먹어요. 어어, 싸우지 말아요!”

로나가 모나한과 모틸라의 손에 모카 쿠키를 똑같은 개수로 나눠 주며 말했다.

“모나한만 더 주고 그런 거 없어요. 전 그런 거에 공평한 사람이에요. 자자, 모틸라는 모카 쿠키 먹으면서 식기 놔두고, 모나한은 모카 쿠키 먹으면서 국자 다시 저어요. 냄비 눌어붙겠다.”

로나는 모나한과 모틸라를 떨어트려 놓으며 길게 한숨 쉬었다.

초등학생들 싸움을 말린 담임 선생님이 된 기분이야.

어린이들, 싸우면 안 돼요! 싸우면 혼날 거예요! 간식 없어요!

태어나서 처음 겪는 기분이군, 아주 새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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