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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는 로나가 자신에게 내민 손을 보며 당황함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그래서 아직도 일말의 의심이 남아 있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음, 그 진실-”
“진실이에요, 진실! 저 뱀파이어 놈들은 60년이 찰나라고 지껄이는 이상한 놈들이고! 인간에게 60년은 그냥 평생이라고요, 평생!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데, 또 이러네!”
로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까지 주먹으로 퍽퍽 치며 말했다.
그 모습에 억울함이 가득 보여서 발터는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니, 진짜로 찰나잖아요. 60년 정도는 그냥 잠도 자고 그러는데.”
모나한이 명치에 손을 문지르며 옆으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로나가 날카롭게 흘기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협박했다.
‘닥쳐라.’
모나한이 그 모습에 조용히 찌그러들었다.
“정 믿기 힘들면 그냥 모틸라 씨한테 쳐들어가서 물어보고 와요.”
“아…….”
“단, 몇 년 남았는지 단위 확실하게. 두리뭉실하게 ‘얼마……’ 이딴 거 안 돼요. 딱 몇 년 남았는지 가서 물어보고 와!”
“넵!”
로나가 서슬 퍼렇게 눈을 빛내며 하는 말에 발터가 반사적으로 차렷 자세로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모틸라가 있는 방으로 뛰어갔다. 막 기사 학원에 들어가 교관님에게 첫 교육을 받는 신입생 같은 모습이었다.
“에잇! 에잇! 이 착각물의 주범!”
“아얏! 아얏!”
로나는 그런 발터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모나한을 잡았다.
등짝을 내놔라, 이놈! 로나 표 스파이크 맛을 보여 주마! 반죽으로 단련된 손바닥이시다!
모나한이 등을 맞으며 앙증맞게 아얏거리면서 말했다.
“원래 연애에 저런 착각이 들어 있어야 관계도 더 깊어지고, 아얏!”
“이놈! 이놈! 헛소리하는 게 이 입이냐!”
“왜 ‘아얏!’이라고 할 때마다 때리는 힘이 더 세지시는 거죠? 귀엽지 않나요?”
“어디서 징그러운 애교를! 귀엽기는 개뿔이!”
“아얏! 아얏!”
“우리 연애할 때는 안 그랬잖아요! 착각 꺼져! 갈등 꺼져! 그래 놓고선!”
“으으음, 그건 우리 연애. 저건 남의 연애.”
모나한이 등을 움츠리고 윙크하면서 말했다.
“원래 남의 연애에서 갈등은 후추, 불안은 소금, 위기는 설탕, 그리고 그 후 나오는 사랑의 깨달음과 찐한 화해가 메인 디쉬- 윽! 진짜 아파요, 로나.”
“진짜 아프라고 때린 거예요. 갈등과 불안, 위기 같은 건 없어도 된다고요.”
“그런 게 좀 있어야 사이가 더 좋아진다고요. 서로가 더 애틋해지고-”
“전 그런 거 없어도 충분히 애틋해질 수 있어요.”
“……그건 로나가 애늙은이라서-”
“뭐요?”
“스무 살……. 아니지, 스물한 살밖에 안 됐는데, 이미 삶의 깨달음이 왕창인 분이시잖아요.”
로나는 아주 유연하게 팔을 돌려 등을 쓰다듬는 모나한을 보면서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전생까지 합하면 인간으로 치면 중년-”
“뭐, 그래서, 뭐.”
“저도 나이가 꽤 많으니까, 그래서 우린 잘 맞는-”
“새끼발가락 내놔!”
“거긴 밟히면 진짜 아파서 싫어요.”
“이 자식이 갈수록 능글맞아져! 초반에 달달하기만 하던 모나한 어디 갔어!?”
그 말에 모나한이 제 가슴을 하얀 손가락으로 톡 찌르면서 표정으로 ‘여기?’라고 말했다.
로나가 그 모습에 진짜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모나한의 볼을 세게 콕콕콕 찔러 댔다.
모나한이 로나의 손가락에 따라 머리를 휙휙 밀리다가 자신을 가리켰던 손으로 로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가 깊게 입 맞추-.
“왜 피해요?”
“능글맞은 모나한에게 주기 싫어서요.”
“이런……. 전 능글맞은 로나도 좋아하는데.”
“어쩌라고요.”
로나가 같잖다는 듯이 비웃으며 하는 말에도 모나한은 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로나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로나는 투덜거리면서도 파고드는 모나한을 피하지 않았다.
모나한은 그런 로나의 모습에 어깨를 작게 들썩이며 웃고는 로나의 허리를 안고 턱과 귀 사이에 코를 장난스레 비볐다.
로나가 온몸에 힘을 빼고 모나한에게 축 기대며 푹 한숨 쉬었다.
“방금 그거 분명 이벤트였을 거에요.”
“로나가 말씀하신 대로, 착각물 이벤트?”
“네, 아마도. 발터 씨가 모틸라 씨를 시한부로 착각하는 거죠.”
“시한부 맞잖아요.”
“시한부지만 시한부가 아니죠.”
“그렇긴 하죠.”
모틸라 언니도 참 보면 여주인공이 되기 위한 완벽한 조건을 갖췄단 말이야.
아름답고 고혹적인 외모, 완벽한 몸매와 우아한 몸놀림, 도도한 표정.
그리고 그렇지 못한 태도.
알고 보니 허당이라는 사실로 갭모에 우당탕. 사실은 여기저기 동네북에다가 어리광쟁이.
게다가 겁쟁이라 도망 여주.
사실은 60년이나 남았지만, 뱀파이어 관점에서는 짧은 시간이라 일어나는 시한부 여주.
그리고 그걸로 일어나는 남주의 착각계!
“또 뭐, 그런 거 없죠? 모틸라 씨가 사실은- 이런 걸로 시작하는 거.”
“어, 음. 글쎄요. 모틸라의 특이한 이력이라면……. 초대 왕이었다는 거?”
“……네?”
“우리가 도망치는 데 모틸라가 가장 큰 일을 했거든요, 다들 그녀에게 고마워했죠. 그래서 처음 왕을 뽑을 때 모두 모틸라를 뽑았어요.”
허헐. 그런? 저런 분이 왕을? 왕으을??
“모틸라는 하기 싫다고 징징대긴 했죠. 자기는 그런 거 안 어울린다나 뭐라나. 그 말대로 서류 처리를 어찌나 못하던지 다른 이들도 같이 모여서 낑낑대야 했죠.”
“아, 음. 음…….”
“모틸라에게 다들 빚이 있기도 하고, 뭔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해서 명령권도 준 거죠. 모틸라가 우리보고 무릎을 꿇으라고 하거나, 절을 하라고 해도 충분히 해 줄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시작된 놀리기…….”
“그렇죠. 설마 그 녀석이 ‘셔플 댄스나 겨뤄!!’라고 외칠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그 황망해하는 표정을 봤어야 했다고, 다들 순간 눈이 멍해졌다고 모나한이 중얼거렸다.
“서류 처리는 더럽게 못 하는데, 이상한 제목 만들기는 얼마나 잘하던지……. 말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던 나날…….”
서류 처리하기 싫다고 도망가는 모틸라를 추적하던 일상.
왜 서류에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지, 나는 성질나 죽겠는데 다른 놈들은 다들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먹을 것 주며 달래 가며 서류를 처리해 놓는데, 왜 다들 옆에서 흐뭇하다는 얼굴로 보고 있는 건지…….
모나한이 과거를 회상하며 아련한 눈빛을 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응,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리고 굳은 결심을 한 표정이 되었다.
로나는 그 표정을 보며 ‘잘은 모르겠지만, 많이 힘들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모나한이 그게 위로가 되었다는 표정으로 로나를 보며 슬프게 웃었다.
* * *
잠시 뒤 발터는 완벽히 확인을 끝마쳤는지 무안하다는 얼굴로 다시 응접실을 들렀다.
“그, 음……. 60년, 남으셨다고.”
“그렇죠?”
“처음엔 아련한 얼굴로 ‘사실……. 별로 안 남았어, 나……. 이젠 오래 못 살아……’ 그러셨는데.”
“또 두루뭉술하게 말했군요.”
“예. 사실 정말 슬프고 아련한 얼굴이라 넘어갈 뻔했습니다만, 로나님의 충고가 생각나서 ‘정확히 몇 년’인지 먼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요?”
“59년 남았다고, 이것밖에 안 남았다고 슬퍼하시더군요. 많이 슬퍼하시기에 위로해 드렸습니다.”
뭐? 위로해 줬어? 60년이란 세월을 고작 몇 년으로 줄여 버리는 작자를 위로해 줬단 말이야!?
“많이 슬퍼하시고……. 주름이 생긴 것을 침울해하시길래.”
“대단하시네요.”
저게 바로 사랑인가. 난 모나한이 그런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행동하면 냅다 버려 두고 내 할 일 할 텐데.
“정말로, 로나 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저와 모틸라 님만 있었다면 많은 오해가 생겼을 거예요.”
“네. 정말 그럴 것 같아요.”
“……그렇죠. 저도 잘 물어보는 성격이 아니고, 모틸라 님은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으시고…….”
“오해물 찍기 딱 좋았죠.”
“예, 정말로.”
발터가 매우 공감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앞으로는 정확하게 물어볼 생각입니다. 두리뭉실한 단어들을 다 파헤치겠습니다.”
“좋아요, 좋은 생각이에요.”
이번엔 로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발 그래다오. 오해물, 착각물, 삽질물 이런 거 찍지 마.
모나한은 남의 연애니까 상관없다고 하는데, 그 연애하는 사람들이랑 같은 집에 산다고!
꼼짝없이 엮이게 될 확률이 너무 높다고!
로나는 상담해 주셔서 고맙다고 한 번 더 인사하는 발터의 손에 빵을 몇 개 쥐여 주곤 모틸라와 먹으라며 응접실에서 내보냈다.
정말 오랜만에 큰 소리로 외쳐서 기운이 쭉 빠졌다.
모틸라가 사실은 초대 왕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더더욱 그랬다.
언니는 까도 까도 새로운 이상한 이야기가 나오는 양파 같은 뱀파이어였다.
모틸라 양파인 거지.
사실 알고 보면 또 다른 이상한 일화들이 있을 것 같아 이젠 물어보기도 무서웠다.
벌써 아는 것만 해도 세 나라 왕자들 꾀어서 자길 두고 다투게 하기, 시한부 착각 도망물 여주이기, 전쟁에서 뱀파이어들을 주도해서 도망가게 했던 자, 뱀파이어의 초대 왕이 되어 셔플 댄스를 겨루게 해 이후 이상한 전통을 창조한 자.
이것만 해도 엄청난데 분명히 숨겨진 이야기들이 더 있을 것 같았다.
모나한이 모틸라만 보면 질린 얼굴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고.
그가 얼마나 모틸라의 사고에 휘말렸겠는가.
지금도 휘말려서 발터랑 모틸라의 연애를 도와주고 있게 되었는데.
“무서운 모틸라……. 제발 사고 좀 안 쳤으면.”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조용히 있던 모나한이 로나의 중얼거림은 듣고 매우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제 제발 사고 좀 안 쳤으면! 하지만 이렇게 바라도 치겠지! 그리고 ‘나 사고 안 쳤, 안 쳤, 안……. 사실 쳤어……’ 이딴 얼굴로 와서 불쌍한 척하겠지!”
쌓인 게 많았는지 모나한이 분통 터진다는 얼굴로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