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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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아암.”

로나는 길게 하품했다. 몸은 피곤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정신적으로 피곤한 느낌이었다.

요즘 잠이 부족하긴 했다. 밤이 되면 신나게 달려드는 놈이 하나 있어서.

모나한은 그가 장담한 대로 강하고 힘세고 길었다. 정말 인간이었으면 나가떨어져 어디 하나 부러졌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로나는 뭉치지도 않은 목덜미를 몇 번 주물럭거리다가 모나한이 가져다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벽난로 앞 책상 위에서 엎드려 휴식하는 기분이란. 담요와 달콤한 핫초코, 서재에서 가져온 재미있는 책 한 권. 게다가 오늘 할 일을 전부 끝낸 여유로운 저녁 시간.

완벽한 휴식이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것은 모틸라가 없다는 것이었다. 요즘 모틸라는 자신을 만나러 오는 뱀파이어들 때문에 저택 밖에 나가 있는 일이 많았다.

밤이 돼도 돌아오지 않은 적이 한 번 있었는데, 모나한이 온 인상을 구기며 목덜미를 잡고 끌고 온 이후부터는 꼬박꼬박 들어오곤 했다.

모틸라가 ‘내가 이 나이에 통금시간이 있어야겠냐!!’라고 소리쳤지만 로나는 외면했고, 발터는 옆에서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박수만 짝짝짝 쳤다. 도망친 전적이 있어서 아무도 그녀의 외박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 후 모틸라는 오래 머물다 가는 뱀파이어가 있으면 저택에 데려오곤 했다. 발터도 차라리 그게 안심되는지 얼마든지 데려와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발터는 선홍색 눈, 황금색 눈, 보라색, 초록, 검정, 파랑 등등의 반짝반짝 빛나고 아름답고 퇴폐미 있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되었다.

발터는 저택에 들른 손님을 맞이하고 나서 응접실에 돌아올 때마다 열심히 동공을 지진시켰다.

미남이 가고 미남이 오고, 미녀가 가고 미녀가 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그동안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은 것이 대단하기까지 했다.

로나와 모나한은 뱀파이어의 냄새가 저택 정문에서 맡아지면 응접실이나 그들의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을 만나서 ‘치명적인 척하기’를 할 생각은 절대 없기도 했고. 저택에 들르는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서로 열심히 피해 다녔다.

‘로나의 빵 맛에 중독되어서 떠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전 로나를 뺏길 마음이 없어요!’라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모나한 때문이기도 했다.

로나가 생각하기에도 그들에게 빵을 대접하면 인디고 저택이 뱀파이어의 소굴이 될 것 같았다.

맛있는 냄새에 코를 킁킁대던 뱀파이어도 있긴 했지만, 모틸라가 필사적으로 주의를 돌렸다.

자기 먹을 게 주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다나 뭐라나.

로나는 자신의 능력이 생각보다 평화롭지 않은 건지 잠깐 고민했다.

이종족 사이에서라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처음에는 모틸라와 덜 친하거나 잠깐 인사만 하러 온 뱀파이어들이었는지, 모틸라가 잠깐 나갔다 오는 일이 많았지만, 점점 발터의 저택에서 며칠씩 머물고 가는 뱀파이어들이 늘었다.

그렇게 또 다른 뱀파이어를 저택에서 재우게 된 어느 날 저녁, 응접실에서 주접을 떠는 모나한의 새끼발가락을 밟는 수련을 하고 있는 로나에게 발터가 드디어 물어볼게 있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는 딱딱히 굳은 얼굴을 하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어떤 건데요?”

로나와 모나한은 처음엔 그가 드디어 자신들의 정체에 관해 묻는 줄 알았다.

저택에 온갖 반짝이는 미남미녀들이 오는데, 슬슬 물어볼 때가 되긴 했지. 대답해 줄 마음도 있고.

로나와 모나한은 발터를 몇 달간 봐 온 결과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자라고 결론을 내린 지 오래였다. 모틸라에게 위로가 되고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도.

로나는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발터의 질문을 기다렸다.

“……모틸라 님, 어디 아프십니까?”

“아앗.”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네.

발터는 로나와 모나한이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을 물어보았다.

어째 물어보는 얼굴이 ‘알아챘다!’가 아니라 ‘설마……’라는 표정이더라.

불안과 슬픔도 왕창 묻어 있고.

인제 보니 이미 결론이 난 것을 선고받기 위해 온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저택에 오시는 분들이 다들 모틸라 님만 만나러 오시는 것도 그렇고, 다들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발터가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의 손끝에서 짧은 남색 앞머리가 엉망진창으로 뭉개졌다.

그리고 그 아래로 불안과 걱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넘실거렸다.

이마를 만지는 손길마저 떨림이 가득했고, 남색 눈가는 습하게 물들어 있기까지 했다.

숨기지 못한 떨림에 목멘 목소리가 차마 결론을 말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저번에 오신 분은……. 모틸라 님 볼을 만지면서 많이 안 좋냐고 물어보시고, 또 어떤 분은 얼굴을 보자마자 엉엉 우시는데-”

“아, 음.”

“……어릴 적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의 지인분들이 방문하시면 꼭 그런 모습이셔서- 저는, 전-”

발터는 말을 그 이상 잇지 못하고 결국 덜덜 떨리는 입술만 꾸욱 다물었다.

눈가에 서린 충격과 슬픔이 눈물로 변해 떨어지지 않은 것은 그가 오랫동안 기사로 단련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로나는 발터의 충격과 슬픔, 불안에 도저희 공감해 줄 수가 없었다.

아앗, 아앗. 그거 아닌데요. 아니, 그거 맞긴 하는데, 아니에요.

그 모틸라 씨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긴 했는데, 좀 많이 남아 있기도 하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종족상으로는 시한부지만 인간의 시선으로서는 살날이 창창해요?

“그, 모틸라 씨가 어디 아픈 건 아니고요.”

“……제발 진실을 말해 주십시오. 오는 이마다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도 모틸라 님을 배려해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으시는데, 아니라고 하신다면…….”

“아니, 진짜 아닌데요.”

“……역시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제가, 제가 부족해서- 이것밖에 안 돼서-”

내 말을 안 믿는군.

하긴 나도 주위에서 그 난리를 치고 믿으라 그러면 안 믿지.

이거 그건가? 착각물?

“전, 전. 각오가 되었습니다. 사실 눈치챈 지는 한참 전이지만, 그동안 진실을 믿기 싫어서……. 거짓이라고만, 착각이라고만 생각하고 싶어서-”

그동안 동공을 지진시키던게 미남 미녀를 보아서 그런게 아니란 말야? 온갖 화려한 미모를 봐서 우리 정체를 의심하는 줄 알았는데.

근데 지금 너 하는 거 착각이 아니긴 한데, 착각이야. 시한부이긴 한데, 시한부가 아닌 거지!

로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생각했다.

아니, 근데 진짜 맞는데.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좀 많이 남았어!

로나는 그래서 옆에 있는 모나한의 팔을 짤짤짤 흔들었다.

네가 설명 좀 해! 오해라고 이야기 좀 해!

모나한은 로나의 소리 없는 명령에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아니잖아!

로나가 생각지도 못한 모나한의 배신에 그를 흔드는 것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뜨고 충격받은 얼굴로 모나한을 올려다보았다.

“저희가 여기 머무는 이유도 사실은 그것 때문입니다. ……모틸라가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맛있는 것을, 그러니까 로나의 빵을 많이 먹었으면 해서…….”

로나는 이제 눈도 크게 뜨고 입도 크게 벌린 채로 모나한을 바라보았다.

그거 맞는데, 그거 아니잖아! 조금이라도 맛있는 것을 먹는 게, 60년 동안 맛있는 걸 먹는 거잖아!

“방문하는 이들은 다들 저희와 같은 동족들입니다. 모틸라의 소식을……. 들었겠죠.”

“아…….”

발터가 결국은 진실을 알아 버렸다는 얼굴을, 끔찍한 절망이 자신을 집어삼킨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몰려오는 암담한 감정들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그 표정을 본 로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발터와 같이 침통한 얼굴을 하는 모나한을 짤짤짤 흔들었다. 발터를 흔들 수 없으니까 두 배로 세게!

“그거 아니잖아요! 그거 아니잖아!”

“……맞잖아요. 모틸라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아련한 얼굴로 그런 이야기하지 마! 저기 진짜로 절망해서 점점 어두워지는 사람이 있잖아! 남색이 그냥 새까만 검정이 되고 있다고!

“많이 남았잖아요!”

“제 기준으로는…… 아주 찰나예요.”

“찰나, 라고요?”

옆으로 거세게 흔들리면서도 그 특유의 순수해 보이는 생김새로 인해 아련함이 배가된 모나한의 얼굴에 넘어간 발터가 더욱 흔들리는 동공으로 물었다.

“찰나라니, 도대체 얼마나, 얼마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으면-”

“정확히 6- 아, 로나. 그만 좀 흔들어요. 어지러워요.”

“6, 6년? 아니죠, 그렇기 길 리 없겠죠. 6개월? 6개월인가요?”

“로나, 저 토할 것 같아요. 오, 그렇죠. 제 몸은 이 정도의 흔들림으로는 토하지 않죠. 그래도 그런 기분이라고요.”

“제발 이야기해 주십시오. 각오는 되었습니다. 남은 시간이……. 6개월입니까?”

발터는 한없이 절망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로나는 모나한을 흔들고, 모나한은 토할 것 같다고 엄살 부리며 흔들렸다.

로나는 ‘우웩’이라고 소리까지 내는 모나한을 휙 던져 버리며 발터를 보고 외쳤다.

“60년!”

“……네?”

“아니, 이 뱀파이어란 놈들은 왜 시간을 그렇게 줄이고 난리야! 저랑 모나한, 모틸라는 뱀파이어! 뱀파이어는 눈가에 주름이 생기면 그때부터 남은 시간이 정해지는데, 그 시간이 60년!”

귀에 때려 박아라, 이놈!

“……60, 60년요? 제가 잘못-”

“제대로 들었어요! 남은 시간 60년, 아니지.”

“역시 아닌 것-”

“이제 1년 지났으니까 59년!”

“…….”

고구마 꺼져! 착각물 꺼져! 시한부 꺼져!

몰라! 난 사이다 원한다! 사이다 전개 최고시다!

로나는 손 모양까지 땅땅땅 해 주며 말했다.

오른손 쫙 펴서 손가락 다섯 개! 5!

왼쪽 엄지만 굽혀서 양쪽 다 활짝 펴! 아홉!

“알겠어요? 59년 남았다고요, 59년.”

“……어, 음.”

“오히려 발터 씨가 먼저 죽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고요. 발터 씨는 그때 여든에 가까울 테니까!”

“……그, 그렇네요. 제 걱정을 해야겠군요.”

“그렇죠!”

착각할 것 같으면 대화를 하란 말이야! 그냥 주위에 물어봐!

주어까지 정확히 물어보고, 누가 말한 건지 사람도 정확히 하고 말이야!

사람이 대화를 하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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