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로나는 느리게 눈을 떴다. 마지막으로 기억했던 어두웠던 창밖이 다시 환해져 있었다.
햇빛에 눈을 뜬 건지 아니면 그냥 잠을 충분히 자서 눈이 떠진 건지 구별이 안 되었다.
창밖의 새소리가 시끄러운 것을 보면 아침이 되긴 한 모양이었다.
“뱀파이어 신체는 세계 최고…….”
로나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변한 신체가 얼마나 최고인지 가장 잘 느껴지는 것은 역시 아침이 아닐까.
온몸에서 부기 하나 느껴지지 않아.
안구 건조? 그런 거 없어.
얼굴의 번들번들한 기름기? 노노노.
“끄으으으으-”
로나는 어제 혹사당했던 허리를 걱정하며 기지개를 한번 쭈욱 펴고, 상체를 이쪽저쪽 돌려 아픈 곳이 없는지 점검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했다.
“뱀파이어 신체 최고.”
허리 하나도 안 아파. 몸에 찌뿌드드한 곳 하나도 없어. 어깨 하나도 안 결려.
얼굴 피부 뽀송뽀송해. 눈 부은 느낌? 없어.
아침에 멍한 머리? 그런 것은 뱀파이어 신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나는 한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팔을 붕붕 휘두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결리는 곳 하나도 없이 유연하게 돌아가는 어깨가 어쩜 그리 만족스러운지. 나의 관절 가동 범위를 보아라!
로나는 침대 옆에 서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붕붕 돌리다가 흠칫- 몸을 굳혔다.
이불 밖으로 나온 몸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회색 잠옷이 입혀져 있었다.
단추도 자신이 딱 좋아하게 두 개 열려서, 허리 고무줄도 딱 좋아하는 만큼 올려져서.
평소 자기 전 입었던 잠옷의 느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지만, 로나는 오히려 그것에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어제 마지막 기억상으로는 분명히 알몸으로 담요만 칭칭 감은 채 잠들었으니까!
로나는 순식간에 범인을 도출해 내려는 뇌를 억지로 멈추며 중얼거렸다.
“……아냐. 모른 척하자.”
그래. 내가 어제 잠옷까지 곱게 입고 잤나 보지!
“어제 못 씻고 잤는데 온몸이 뽀송뽀송-”
로나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또 뇌를 멈추고 생각을 그만두었다.
자신이 어제 잠들 때 분명히 찝찝함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땀을 많이 흘렸거든. 뱀파이어 신체도 땀을 그만큼 흘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
왠지 행복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씻겨 주는 누군가가 상상되었다.
“……아냐. 모른 척하자.”
로나는 한 번 더 중얼거리고는 거울로 다가가 온몸을 휙휙 둘러보았다.
으으음. 자국 하나 없어! 깨끗해!
“진짜 아침마다 행복해지는 몸이라니까.”
어제 물고 빨고 한 누군가의 자국이 하나도 없어서 더욱 마음에 든다.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낼 생각인지 어젯밤 누군가가 자신의 목 주위에서 아주 난리를 쳤더란다.
하지만 이것 보렴? 여기 있는 건 보송한 피부, 깔끔한 목덜미란다.
로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 이제 욕실에 들어가서 씻고, 기초 화장을 한 다음에 옷을 입고 머리를 쫑쫑쫑 땋으면-.
“그럼 완벽히 평소의 로나인 거지.”
로나는 거울 앞에서 한쪽 머리를 땋으면서 말했다.
평소 조금 신경 쓰였던 선홍색 눈동자 아래 점점이 박힌 주근깨까지 만족스럽다.
아주 평범한 로나다. 어제와 그제와도, 막 변신했을 때와도 다른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좋아. 평범한 모습으로 생활할 수 있겠-.
“로나, 일어났어요?”
“……네.”
로나는 들려온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가 다시 머리를 땋아 내렸다.
그녀는 땋은 쪽 머리끝을 묶으며 경계 어린 눈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나한을 돌아보았다.
모나한은 부엌에서 가져왔다며 레몬을 넣은 얼음물을 로나에게 내밀었다.
로나는 그 물을 받아 목 뒤로 넘기면서도 말끔한 얼굴로 웃고 있는 모나한을 계속 경계하며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까지 과거를 보아 헤실헤실 웃으면서 들어올 줄 알았더니, 모나한은 살짝 입꼬리만 올렸을 뿐 확 풀어진 얼굴은 아니었다.
로나는 그 모습에 오히려 눈을 얇게 뜨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초리에 모나한이 입꼬리를 더 위로 올리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한쪽은 제가 땋으라고 남겨 두신 건가요?”
“아뇨.”
“제가 땋아 드려도 될까요?”
“아뇨.”
안 돼. 꺼져. 사라져.
로나는 작게 콧방귀를 뀌고 모나한을 보던 고개를 돌려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으음. 나 자신, 합격이야. 얼굴에 빨개진 부위 따위 아무 곳도 없군.
로나는 만족해하며 남은 한쪽 머리카락을 땋아 갔다.
깔끔하고 만족스럽게 땋으려면 처음부터 힘을 딱딱딱 줘서 땋아 내려가야-.
“지금 웃었죠.”
로나가 거울에 비친 모나한의 얼굴이 순간 풀리는 것을 보고 말했다.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말끔히 웃는 얼굴로 돌아가긴 했지만, 이젠 로나도 뱀파이어로 변한 지 오래. 로나는 자신이 분명히 봤다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모나한을 추궁했다.
그러나 이미 뻔뻔한 얼굴로 돌아간 모나한이 시치미를 뚝 뗐다.
“전 언제나 웃는 얼굴인데요. 이것 보세요, 무해하게 웃는 얼굴.”
“흐음.”
“정말이에요, 아주 무해하죠.”
“유해한 짓 하고 싶어서 유해한 모나한이 되었다면서요.”
“거기엔 이유가 약간 있어요.”
“뭔데요?”
“지금부터 밤까지는 무해한 모나한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밤까지요?”
“네. 그래야 중간에 로나가 도망을 안 칠 테니까.”
“……도망을 넘어서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
“안 돼요. 싫어요. 사라지지 마세요.”
“그런 마법 없어요? 투명해진다거나 아무도 날 못 찾는다거나.”
“안 돼요.”
모나한이 로나의 이마 옆에 살짝 입 맞추고는 로나가 마지막까지 땋은 머리카락을 잡고, 로나의 손에 있던 고무줄을 가져가며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그리고 그 끝을 섬세하고 능숙한 손길로 묶어 주고는 거울 속 로나와 눈을 마주치며 사르륵 웃었다.
“안 가르쳐 줄 거예요.”
회색 머리카락이 하늘거리고, 머리카락보다 살짝 진한 속눈썹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 사이에 선홍색 눈동자가 어여쁘게 반짝인다.
마치 유리잔에 담긴 석류에이드 같은 색, 얼음이 담겨 유리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달린.
예쁘고 달콤하고 야한 색.
“모나한은 잘생겨서 다행인 줄 알아요.”
“으음?”
“아니었으면 진짜 새끼발가락만 집요하게 밟았을 거야.”
“……묘하게 구체적이라 무섭군요.”
모나한이 로나의 땋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공손히 내려놓았다. 로나가 거울에 비친 모나한의 선홍색 눈동자를 검지로 콕 찍었다.
그는 그새 착하고 순수하며, 순종적이기까지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울을 두고 마주치는 눈은 잔망스럽게 휘고, 도발하듯 반짝였다.
“눈빛이 아주 선정적이야.”
“욕망을 부채질했나요?”
“네. 양쪽 새끼발가락을 번갈아 밟아 주고 싶을 만큼.”
“……그것참 하찮고 무섭네요.”
로나는 모나한의 말에 그를 한번 흘기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치마 끝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거울을 한번 보며 자신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점검하고는 만족하며 방 밖으로 나섰다.
뒤에서 모나한이 평소보다 더 공손해 보이는 표정으로 따라왔다.
“제가 아침 식사를 만들어 놨어요.”
“모나한이요?”
“네. 로나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골라서요.”
“……저에게 잘 보이고 싶나 보군요.”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은 특히, 더더욱, 아주.”
“왜죠?”
“그래야 오늘 밤도 그대의 침대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
로나는 모나한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제까지 겨우 붙들고 있었던 이성의 끈이 톡 하고 풀어져서 지금은 아주 가늘어졌거든요.”
“그거 아주 두꺼운 거 아니었어요?”
“오, 로나. 사랑의 힘으로 잠깐 두꺼워졌을 뿐이에요. 전 욕망에 무릎 꿇은 뱀파이어라고요.”
“식욕에 무릎 꿇은 거죠. 성욕엔 아니잖아요.”
“그 식욕을 로나가 너무 잘 채워 주고 있거든요. 식욕이 채워졌으니, 다음 욕망을 채워야죠.”
모나한이 아주 산뜻하고 상큼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로나는 한쪽 발을 들어 모나한의 새끼발가락을 노렸다.
모나한은 휙 하고 장난스럽게 피하며 말했다.
“1년밖에 안 된 어린 뱀파이어야.”
“하…….”
“좀 더 수련이 필요하겠어요, 로나.”
“새끼발가락을 밟는 수련을 하겠어요.”
“……어, 그걸요?”
“네. 그것만 주야장천 수련해서 모나한의 양쪽 새끼발가락을 번갈아 밟아 줄 거예요.”
“다른 걸 수련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간단한 호신술이나-”
“새끼발가락 밟기.”
“위급한 상황을 대비한 단검술이라든가-”
“종아리 아픈 부분만 정확히 노려서 차기.”
“……하찮고 무섭군요.”
“모나한이 한쪽 다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며 문지르는 게 보고 싶어요.”
“하찮지 않고 무서워요.”
모나한이 생각만 해도 무섭다며 양팔을 부여잡고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로나는 그 모습에 콧방귀를 뀌며 부엌 옆의 작은 응접실 문을 열었다.
모나한이 말한 대로 거기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이루어진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하얀 쌀밥에 소고기뭇국, 계란말이와 김치, 수제 소시지와 케첩이에요.”
모나한이 칭찬해 달라는 듯 “짜잔-!”이라는 추임새를 덧붙이며 말했다.
“로나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차렸죠. 어때요?”
“와, 이건 진짜 짱이다. 모나한, 멋있다! 모나한, 잘생겼다!”
“후, 이날을 위해 한식을 배워 온 것 아닐까.”
“이거 뇌물인 거죠? 오늘 밤 제 침대 속에 들어오려는?”
“당연하죠. 그대의 침대 속에 들어가기 위해 끼를 부리는 거죠.”
“하, 좋아요. 그 끼에 넘어가 주지.”
“좋았어!”
모나한이 성공했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고는 자신의 몫으로 차린 반대쪽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모나한 한식 참 잘 먹는단 말이죠. 발터 씨는 조금 떨떠름해할 때도 있던데.”
그래도 해 주신 것만으로 감사하다며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우긴 하지만.
“조금 입맛에 안 맞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밥을 다 비우고 나서 하는 말이었지만.
“저는 뱀파이어잖아요. 어떤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맛있는 거라면 뭐든 다 좋아요.”
“하긴 모틸라도 좋아하면서 먹더라고요.”
“게다가 맛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이잖아요. 더 끝내주죠. 인간은 익숙한 맛을 찾는 경향이 있지만 뱀파이어는-”
“새로운 맛을 찾는군요?”
“그렇죠. 그것을 위해 떠돌아다니는걸요.”
정착하는 키메라들은 거의 없다며, 해 봐야 100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맛이 고착화되어 버리니까요. 물론 정말 높은 신분을 가지게 되면 모르겠지만……. 위험도도 같이 높아지죠. 키메라인 걸 들킬 확률이 너무 높아요.”
모나한이 노란 달걀말이를 빨간 케첩에 콕 찍으며 말했다.
“가장 최고는 남작에서 백작 사이. 돈이나 재능, 권력보다는 얼굴로 유명해져서 파티 같은 곳에 자주 불리는 게 가장 좋아요.”
“……한량?”
“그거 정말 최고. 맛있는 걸 실컷 먹을 수 있죠.”
모나한은 괜히 다른 걸로 초대받는 것보다 잘생긴 걸로 불려서 묘하게 무시당하지만 이곳저곳 많이 초대받는 포지션이 제일 좋다며 엄지를 들었다.
“다음에 한번 해 보면 얼마나 최고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남작 부부 정도면 괜찮을지도.”
약간 로망처럼 말이지.
시골의 조그만 저택이 있는 언덕에서 양산 쓰고 마을을 내려다보는데, 산들바람에 치마가 흔들리는 거다.
바람은 시원하고 들꽃이 가득 피어서 흔들리고,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과 작은 새들이 날아가고.
내 갈색 머리카락도 두둥실, 날아갈까 봐 모자를 잡고, 그 모습을 보며 옆에 서 있는 모나한이 바람에 앞머리를 휘날리며 웃고…….
“그건 지금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모나한이 로나의 이야기를 듣고 물었다.
“여기가 언덕 위의 저택이니까, 양산 하나만 들고 가면 될 것 같은데.”
“그렇네요, 지금이 겨울인 것만 빼면요.”
“아, 그렇죠. 그럼 봄에 해 볼까요?”
“좋아요. 모나한도 정장 입어요.”
“좋아요.”
로나와 모나한은 키득거리며 좋다고 이야기한 후에 식사 후 정리까지 끝마쳤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밀가루를 계량하고, 반죽하고, 빵을 구워 내었다.
한가득 고소하고 약간은 달콤한 빵 냄새가 부엌 옆에 딸린 응접실까지 퍼지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