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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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실라는 스스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움직였고, 모틸라는 스스로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었다.

그리하여 세상은 좀 더 괜찮아지고, 그리하여 상태창이 그들을 주인공으로 정한 것이다.

로나의 말에 모나한도 깨달은 얼굴이 되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로나는 푸르른 상태창을 띄워 모틸라를 만나며 떠올랐던 알림들과, 아실라를 만나며 떠올랐던 알림들을 회상했다.

“잘 생각해 보니, 아실라도 모틸라도 주인공 중 한 명이 아니라, 유일한 주인공인 것처럼 묘사되었어요.”

여주인공과 남자 주인공‘들’.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

“로맨스 소설처럼 주인공이 두 명인 게 아니라, 꼭 한 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처럼.”

상태창은 언제나 주인공은 한 명이라고 알려 주었다.

로나는 언제나와 같이 조금의 밝아짐도 어두워짐도 없이 똑같은 푸른빛을 보여 주는 상태창을 딱딱히 굳은 얼굴로 바라보다가, 불현듯이 깨달았다.

자신의 역할.

아마도 이제는 모나한도 같이 하게 된 역할.

주인공들이 조금 더, 아주 조금이라도 빠르게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를 빠르게 하든가, 갈등의 시간을 줄이든가 하여, 주인공들이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건을 더욱 빠른 시일 안에 하게 하는 것.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엑스트라인.

‘빵집의 주인’의 역할.

“……그런 게, 아닐까요.”

로나가 허공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에 모나한은 턱 끝을 살짝 떨다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느리게 눈을 감았다.

“아실라에게는 그녀의 사춘기를 일찍 끝나게 한 거고, 모틸라에게는 그녀가 도망가지 못 하게 해서-”

“안제를 만나게 했군요.”

모나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틸라가 그냥 도망갔다면, 안제는 모틸라를 만나지 못했을 거고, 그녀를 찾을 때까지 돌아다녔겠죠.”

“지금 그가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나요? 그러니까-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언제나.”

언제나 하고 있죠, 지긋지긋할 정도로.

모나한이 얼굴을 뭉개는 것과 가깝게 마른세수했다.

그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정의할 수 없는, 그저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다른, 다른 이들도 모틸라를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가 없겠네요. 이후에 방문하게 될 모틸라의 전 사람들.”

“모틸라가 죽는다는 말에 하던 일을 멈추고 온 뱀파이어들이-”

“모틸라에게 아주 짧은 시간만 들이면 되는 거죠. 원래라면 긴 시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아야 했겠지만, 우리로 인해서, 아주 잠깐만을.”

“그리고 그게, 상태창이 원한 거겠죠.”

모나한이 얼굴을 가렸던 두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잔뜩 찌푸린 미간과 혼란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는 그 표정과 똑같은 혼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모틸라만 아니었다면, 어떠한 사람이 주인공이든, 그래서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든, 저는 아무런 생각도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예요.”

“네.”

“상태창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한다고 해도, 피해만 보지 않는다면 그저 지나갈 일들일 뿐이었죠.”

“네.”

“그리하여 그들이 어떤 일을 하든,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든- ……세상이 어떻게 되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나 모나한은 그렇게 말해 버린 걸 조금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가장 어두운 곳에서 기어 다녔고, 가장 약하고 아팠던 사람 중 하나라서.

그리고 전쟁에서 도망쳐 기나긴 세월을 살면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흔들었던 이들이 전부 그런 이들이라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뀌길 빌던 시절이, 자신에게도 분명히 있었어서.

로나는 후회로 끝난 모나한의 얼굴을 위로하듯 매만지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발터 씨도 그런 사람일까요?”

“모틸라가 영생을 살게 하는 사람들요?”

“네, 세상을 바꾸는 사람.”

“……글쎄요.”

“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들이 훌륭한 사람들이란 건 알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때론 아주 평범한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맞아요.”

모나한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당신이 필요했듯이, 평화와 평온이, 평범한 일상이 필요했듯이.

어떤 사람에게는 모험이 필요 없을 수 있으니까, 변화가 필요 없을 수 있으니까.

“만약에 그가 그런 사람이라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사람, 그런 훌륭한 사람이라면-.

“저는 그가 남자 주인공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가 모틸라의 마지막에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여기 오래 있겠네요.”

“네?”

“방금 그런 예감이 들었어요. 모나한을 위해서라도 모틸라 옆에 오래 있어야겠다고.”

“……로나가 원하면 떠나도 되는데.”

“모나한이 원하면 있어도 돼요.”

나에겐 당신이 준 수많은 시간이 있거든요.

로나가 조금 웃고, 모나한이 여러 번 그랬던 것처럼 모나한의 앞머리를 살며시 넘겨 주고,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좀 더 부드럽게 웃었다.

“……발터가 그런 사람이라면 모틸라가 도망칠 때 절대 붙잡아 주지 않겠어요.”

모나한이 겨우 정리된 목소리로 조금의 심술을 담아 말했다.

“발터도 다른 이들도 전부 모틸라에게 수없이 많은 시간을 써 버리라고. 데리고 도망가 버릴 거예요.”

그 목소리에 로나가 더욱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오히려 도와주기로 하죠. 도망가라고 꼬실 수도 있어요. 제 빵으로 말이죠.”

“좋아요. 아주 유혹적인 미끼네요.”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기겠죠.”

“맞아요. 입에 넣어주고 먹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들고 튀죠.”

“좋은 계획이에요. 마차를 정비합시다.”

그들이 서로를 토닥이며 마차를 살피려 나서려는데, 어느새 모틸라와 이야기를 끝낸 안제라는 사내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나와 모나한은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빨리 끝낼지 예상하지 못해서 그대로 멈춰 소리에 집중했다.

집 안에 사람이 몇 없어서 그런지, 계단으로 내려가는 소리는 아주 크게 울렸다.

자신의 방에 들어가 있던 발터가 나오기에 충분할 만큼.

로나와 모나한은 발터와 안제가 인사하는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가 어떤 대화를 하는지에 따라 필요하다면 모틸라의 도망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로나와 모나한이 귀를 기울인 지 얼마 안 돼서, 발터가 정문에서 안제에게 말을 거는 것이 들렸다.

발터는 모틸라와 똑같은 선홍색 눈동자를 가진 안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벌써 가십니까?”

그가 모틸라와 이야기한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차를 한잔 마셨다기에는 길지만, 이야기를 나누었다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특히 전 남편이라는 자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더욱더.

“아아, 네. 모틸라도 제가 오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듯해서요.”

“……글쎄요. 사람을 좋아하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때론 좋아해도 보기 싫을 수 있지 않습니까.”

안제는 빛바랜 금발에 두꺼운 후드를 덮으며 말했다.

그 아래로 선홍색 눈동자가 깜박이다가 조금 망설임을 담고 발터를 바라보았다.

“혹시, 모틸라의-”

“연인입니다.”

“……역시 그러시군요.”

그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백한 손끝으로 제 입술을 매만지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할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조금 말씀드리자면- 그녀 옆에 있어 주세요.”

“…….”

“전 그러지 못했거든요. 다른 중요한 게 생겨 버렸죠. 아, 바람을 피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에요.

안제는 발터의 의심 어린 눈에 전혀 그런 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런 것 있잖습니까. 지금 이걸 하면 행복해질 사람이 많아질 텐데, 그걸 내가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죠.”

발터는 안제의 말에 모나한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평민의 권리, 노예의 권리.

어쩌면 아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자들의 권리를 높이기 위해 외치는 사람, 그리고 마침내 그것들을 끌어올린 사람.

“전 모틸라보다 그런 걸 우선시하고 말았죠. ……그녀가,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다려, 준다고요.”

“예. 계속 뒤에서……. 기다려 줄 것 같은 사람이라서. 하지만 뒤돌아보니, 없더군요.”

발터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내뱉은 말은 안제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는지, 안제는 처음 말을 꺼낼 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터는 그 목소리에 왠지 더더욱 참을 수가 없어서 주먹을 꾹 쥐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퍼렇게 솟아올랐다.

기다려 준다고?

그녀가 언제나 뒤에서 기다린다고?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온통 어디론가 떠나가 버릴 사람이라, 도망가 버릴 사람이라고.

“후회하고 찾아갔지만, 받아 주지도 않았고.”

내가 싫어서도 아니고, 여기가 싫어서도 아닌.

자신이 싫어서, 무서워서, 겁쟁이라.

그래서 도망가 버릴 것만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경고하긴 했었습니다. 지금 가 버리면 후회할 거라고. ……그 말을 가볍게 여겼던 제 잘못이죠.”

같잖은 충고였다, 같잖은 말이었고.

발터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번 더 잡았어야지, 한 번이 안되면 두 번, 세 번, 열 번은 넘어 백 번을, 그 이상이라도 부디.

후회했다면 더욱더.

알고 있잖아, 알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그렇게 붙잡고, 붙잡고, 붙잡으면,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얽매여 줄 사람인데.

“당신은 부디, 그녀를 떠나지 말라고-”

“그러지 않을 겁니다.”

“예?”

발터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런 개소리는 더 이상 들어 줄 필요 없었다.

“방금 깨달았습니다. 난 어떤 훌륭한 사람도 되지 못하고, 역사에 어떠한 발자취를 남기지도 못하겠죠.”

이 작은 영지에서, 저택 하나로, 기사 작위 하나로 겨우겨우.

평생을 그렇게 살겠지.

흐르는 칭송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고, 숨 막히는 감사 인사나 수많은 자를 위한 구원도 없을 것이다.

손에 남은 것은 서류 몇 쪼가리, 낡은 저택, 조그만 영지, 아무것도 아닌 작위.

화려한 것은 하나도 없고, 빛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전 한 가지만은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끈질기다고, 독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죠. 그럼 그것만은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끝까지-”

모틸라 님 옆에 있을 겁니다.

발터는 짓씹듯이 말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씹어 삼켜도 부족하다는 듯이.

그 말이 제 인생을 온통 사로잡아도 좋다는 듯이.

“당신 말대로, 당신이.”

네가 할 말이 아니야.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돌았다.

배웅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발끝이 거칠어진 것도 상관하지 않고, 급해진 것도 상관하지 않고.

초라한 자신, 아무것도 없는 나, 보잘것없는 것들.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필요한 것은, 이렇게 지독히 화나고, 슬프고, 그럼에도 당신이 보고 싶어서, 당신이 걱정되어서.

할 줄 아는 위로도 몇 개 없어도, 할 줄 아는 달콤한 말도 몇 개 없어도.

그래도 당신 옆에 있어 줄 사람일진대.

발터는 모틸라가 있는 방의 문 앞에 섰다.

제 얼굴이 너무 굳었을까 봐 망설이다가, 그런 것조차 전부 보여 줘 버리고 싶어져서 문고리를 잡았다.

거짓이라곤 하나 없고, 숨김이라고는 일말도 없이.

진실함은 기사의 덕목일지니.

발터가 문을 열었다.

겁먹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틸라를 본다.

손을 내민다.

할 줄 아는 가장 달콤한 단어들을 입에 담자.

“로나 씨가 디저트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맛있었어요.”

이것밖에 할 줄 몰라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말이라도.

“같이, 드시러 가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당신께 드리고 싶으니까.

발터는 모틸라가 망설이다가, 망설이다가.

주저하는 발끝, 떨려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입술, 움츠러든 어깨와 울 것 같은 얼굴.

선홍색 눈동자 아래로 마침내 떨어지는 눈물이.

창백한 볼에 길게 남는 자국이.

지쳐 버린 손끝이 자신에게 닿는 순간이.

발터는 그녀를 방 밖으로 끌어내었다.

따뜻한 곳으로 가자.

환한 곳으로, 달콤한 것들이 가득하고, 포근한 것들로 둘러싸일 곳으로.

하잘것없는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당신에게 전부 드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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