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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는 살짝 붉어진 입술을 차가운 그릇에 식히며 눈을 데굴 굴렸다.
다행히 뱀파이어의 피부는 강하기 그지없었고, 회복도 빨랐다.
모틸라와 발터가 저녁을 먹으러 올 즈음에 로나의 얼굴은 평소와 같아져 있었다.
모나한이 한없이 헤실거리는 것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필요할 때마다 표정을 휙휙 바꾸는 놈이니까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제 입꼬리도 주인의 명령을 배반해 은근슬쩍 올라가 내려올 생각을 안 하는 것 같긴 한데, 검지로 한번 내려주면 다시 말을 들으니까 괜찮다.
우리가 진도는 나간 건 진도를 나간 거고, 할 수 있는 스킨십의 범위가 확 늘었다는 건 는 거지만, 그런 건 모두 둘이 있을 때 할 일이고.
지금 중요한 건 그거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자신 모르게 진도를 빼고 있다는 것! 이벤트를 끝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내가 눈치채지 못한 것!
예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자신은 꽤 눈치가 빠른 편이다.
눈치채도 신경 쓰지 않을 뿐!
로나는 행복한 얼굴로 저녁 식사를 하는 발터와 모틸라를 번갈아 보며 그들이 사귀는 증거를 찾으려 눈을 굴렸다.
……모르겠는걸.
그리고 쉽게 포기했다.
이번 원작은 이지 모드인가 보지.
여주랑 남주가 알아서 짝짜꿍하나 보지.
나는 그냥 빵이나 만들어서 먹이면 되나 봐!
로나는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틸라와 발터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떼 버렸다.
그보다는 200명쯤 되는 마을 사람들에게 하루 세끼 빵을 먹이면서 차오를 경험치 바가 더 신경 쓰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레벨업! 스킬로 레벨업!
그러면 새로운 레시피, 새로운 요리 재료!
다른 건 바라지 않는다. 한식 재료! 된장, 간장!
상태창이 로나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저녁 식사가 끝날 때 즈음에 ‘띠링-’ 하고 알림음이 울렸다.
로나는 바로 푸른 상태창을 열었고, 레시피 스킬과 상점 스킬이 레벨업 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상점을 열었다.
레시피는 나중에 봐도 돼! 중요한 건 상점이다!
난 돈이 있다! 내 돈을 가져가! 한식 재료 내놔!
그리고 로나는 새까만 액체를 가득 담은 병을 발견했다.
“유레카!”
“으악! 무슨 일이야?”
“왜 그러십니까?”
“새로 한식 재료가 나왔나요?”
모틸라와 발터는 로나의 외침에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익숙한 모나한은 놀라지 않고 질문했다.
로나는 모나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상점 창에서 간장을 결제했다.
곧바로 식탁 위에 새까만 액체가 담긴 병이 나타났다.
“먹으면 안 될 음식처럼 생겼는데? 뭐야? 음료수?”
“아뇨. 이건 요리에 들어가는 소스예요.”
근데 검은 음료수 하니까 콜라가 땡긴다.
하지만 콜라는 요리 재료가 아니니까 나오지 않겠지.
아냐! 콜라를 고기의 잡냄새 없애는 데 쓴다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근데 그러면 요리 재료가 맞는 걸까?
난 과연 다시 콜라를 마실 수 있는 걸까.
로나는 멍하니 삼천포로 빠졌다가 생각을 다시 돌려 간장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세 사람에게 집중했다.
“오늘은 저녁을 먹었으니까 안되고, 내일 아침에는 이걸 넣어서 요리해 줄게요.”
“지금 먹으면 안 돼? 난 아직 들어갈 자리 있는데.”
“그건 알지만 일하러 가셔야 하잖아요.”
로나는 모틸라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뱀파이어가 된 자신도 아직 더 먹을 수 있지만, 여기서 유일한 인간인 발터 씨는 무리이지 않은가.
그만 빼놓고 먹는 것도 그렇고, 눈이 오기 전에 일을 끝낸다고 저녁에도 일하러 가는 사람을 붙잡고 뭘 먹이기도 그랬다.
“……그건 그렇지만. 일이 너무 많아서 슬프다아…….”
“그렇다면 오늘은 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야 배가 부르니 괜찮고, 모틸라 님은 좀 쉬고 계십시오.”
“아니, 그건 싫어.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아는데 나 혼자 쉬면 내 마음이 편하겠니? 그냥 같이 일하고 나중에 푹 쉬는 게 낫지.”
“……감사합니다.”
“됐어. 너 혼자 고생시키는 거 싫어.”
……뭔가 진전이 있는 것 같긴 하다.
로나가 모틸라와 발터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야식을 만들죠.”
“응?”
“일하고 오시면 배고플 텐데, 마을 사람들까지 다 챙기긴 그렇지만 두 분이라면.”
“난 좋아!”
“……해 주신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둘에게만 야식을 챙겨 줘도 마을 사람들은 별 불만 없을 거고.
애초에 귀족과 마법사에게 더 챙겨 준다는데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계급 사회가 아니지.
“일하는 중간에 만들어서 갖다 드릴게요.”
“와아! 오늘은 일할 맛 나겠다! 좋아, 난 다 먹었어! 빨리 일하러 가자, 발터!”
“알겠습니다.”
발터도 의욕이 생겼는지 밝아진 얼굴로 식탁에서 일어났다.
모틸라는 저택에서 나가는 순간까지 ‘야식은 뭘까? 또 무슨 신기한 음식을 먹는 걸까?’라고 기대했다.
로나는 그들을 배웅하며 간장이 들어가는 음식이 뭐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떠올린 건 장조림이었다.
어떤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 아니라 언제나 반찬으로 올라오곤 했던 그것.
오늘같이 평범한 날에 어울리는 일상적인 음식.
“소고기하고 메추리알…….”
“메추리알요?”
“으음. 요만한 조그마한 알인데, 여긴 없겠죠? 그냥 평범한 달걀도 괜찮지만 역시 작은 달걀로 만드는 게 맛있는데.”
“새알 정도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오늘은 늦었으니 구하기 힘들겠죠.”
“그럼 우선 소고기로만 만들어 볼까요?”
“어떤 음식인가요?”
로나는 모나한에게 장조림이 어떤 건지 설명하면서 부엌으로 걸어갔다.
“막 만든 장조림을 하얀 밥이랑 먹는 거죠. 주먹밥을 만들어서 가져다줄 예정이에요.”
“그것참 맛있게 들리네요. 저도 주실 거죠?”
“물론 모나한에겐 제일 먼저 줄 거죠.”
“밥이 남은 게 없는데.”
“그럼 새로 해야겠네요. 새로 막 한 흰밥으로 주먹밥을 만들어야겠어요.”
“너무 기대되네요.”
모나한이 거의 나는 듯이 걸었다.
그가 얼마나 신났는지 보여 주는 행동이었다.
하긴 오늘 얼마나 신나겠어. 나 같아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겠네.
사실 그렇게 중얼거리는 로나의 발걸음도 가볍게 그지없었다.
뭐, 어때. 나도 기분 좋은 하루였는데.
아주 평범한 풍경에 커플들에겐 아주 평범한 스킨십에 아주 평범한 야식을 먹을 생각이었다.
로나는 막 만든 따끈따끈한 하얀 밥에 소금을 솔솔 뿌렸다.
참기름이 없어서 아쉽기는 했지만, 대신 몇몇 주먹밥에는 치즈 가루를.
또 다른 주먹밥에는 버터를 살짝 넣기로 했다.
그녀는 맛있는 양념 냄새가 나는 따뜻한 하얀 밥을 모나한과 함께 손으로 토닥토닥 뭉쳐 내었다.
안쪽에 맛있게 조려진 뜨거운 장조림도 함께였다.
발터와 모틸라에게 가져갈 즈음에는 먹기 딱 좋은 온도가 될 것이었다.
제일 먼저 먹기로 한 모나한의 입에 벌써 주먹밥이 몇 개 사라진 후였다.
로나는 모나한이 행복하다는 얼굴로 주먹밥을 하나 더 우물거리는 것을 보면서 키득거렸다.
그런 그들의 등 뒤에서 고소한 보리차가 끓여지고 있었다.
미묘하게 남은 밥을 뭉쳐 제일 큰 주먹밥을 만들었을 즈음에 등 뒤에서 주전자가 삐익- 거리면서 울었다.
어느새 부엌 안이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로나와 모나한은 장조림 주먹밥과 막 끓인 보리차를 주전자째로 챙겨 저택을 나섰다.
추운 겨울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딱 어울리는 야식이었다.
저 멀리 공터에서 사람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던 모틸라가 둘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기대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모틸라의 행동으로 알았는지, 조금 멀리 있던 발터가 다가왔다.
평소와 같이 덤덤해 보이는 얼굴이 기대감으로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쪽에 놓여 있는 상자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야식을 먹었다.
머리 위로 겨울 달, 겨울 별, 겨울 하늘이 평범한 날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반짝이었다.
* * *
로나는 그냥 빵이나 만들어서 먹이겠다는 말과 다르게 발터와 모틸라를 볼 수 있을 때는 열심히 관찰하였다.
빨리 시스템 창이 주인공으로 결정하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딱히 별로 숨기지도 않았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턱을 괸 채 멍하니 바라봤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봐?”
“예뻐서요.”
“그래!”
모틸라는 이 말 한마디에 넘어가서 제 미모를 뽐냈고.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냥 관찰 중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발터는 그 후 정말로 신경을 안 썼다.
로나는 자신이라면 그만 봤으면 좋겠다고 한마디 했을 텐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더니 정말 신경 안 쓰는 점이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나한은 그런 로나를 말릴 생각 없이 옆에서 똑같은 자세로 그들을 관찰하다가 키득거리고, 훅 사라졌다가 로나에게 담요도 가져다 덮어 주고 주위에 간식도 가져다주고, 코코아도 만들어 주고, 심심할까 봐 책도 가져다주고…….
“어라? 완벽한 휴식 공간이 만들어졌어!”
“턱 아플 것 같은데, 여기 베개요. 여기에 기대고 있어요.”
“아, 고마워요, 모나한.”
그 후 옆에 앉아서 로나 머리를 풀었다 땋았다 장난치다가, 또 훅하니 사라져서 허브 화분 가져다 두고, 방 안 온도를 좀 더 따끈따끈하게 바꾸고…….
“모나한 때문에 점점 버릇이 나빠지고 있어…….”
“더 나빠져서 저 없인 못 살도록 하세요.”
“정말 그럴 것 같아. 무섭다.”
로나는 겨울 산장의 모닥불 앞에서 스웨터를 짜는 할머니가 된 기분이 되어서 꾸벅꾸벅 졸았다.
처음에는 분명 모틸라와 발터를 열심히 관찰했던 것 같은데, 정신 차려 보면 모나한의 완벽한 시중 속에서 잠드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좋다…….”
마약 같은 침대에서 곰팡이가 되지 않겠다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곰팡이는 안 됐지만 장작불 앞의 시루떡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