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 (91/154)

91

로나는 그 후에도 다시 혀를 단련시킨다며 식사마다 김치를 내어 놨다.

김치는 상태창이 레시피를 제공한 만큼 로나가 그리워했던 맛이었다.

하루 세끼 김치를 꼬박꼬박 먹어 치우니 만들어 놓은 양이 사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네 포기가 많다고 하기에는 뱀파이어의 위장은 너무나 넓었다.

결국 로나는 모나한을 시켜 김치를 왕창 만들었다.

그리고 수도의 도기 공방에 주문했던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었다.

“사실 진짜 항아리와 똑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관해 보겠어요.”

이것까지 성공하면 다른 김치들도 도전해 봐야지.

열무김치, 깍두기, 동치미와 총각김치, 파김치와 양파김치까지!

그녀는 먹고 싶은 김치가 너무나도 많았다.

로나는 실험하는 연구자의 모습으로 항아리 뚜껑을 닫았다.

눈에 살짝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항아리에 보관해 푹 익혀진 묵은지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다.

특히 묵은지여야 할 수 있는 음식들이.

김치찌개, 묵은지 등갈비찜, 김치말이 국수, 묵은지 꽁치 조림 등등등.

이후 로나는 김치를 제 감각의 안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삼아 댔다.

오늘은 아직 맵군, 오늘은 견딜 만하군, 오늘은 맛있었어!

매운맛에 다시 단련되는 혀와 함께였다.

결국 로나는 전생처럼 김치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제 감각이 많이 안정되었다고 만족해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온실에 몰려올 때 지독한 단내에 움찔거리다가 부엌으로 도망가던 것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모나한도 그걸 눈치챘는지 은근슬쩍 닿는 면적이 늘고 있었다.

옛날 같으면 ‘웬 수작질이야!’라고 투덜거리면서 은근히 도망가고 은근히 받아 주면서 로나 표 밀당을 반복했을 텐데, 모나한이 1년 동안 열심히 참은 것을 알고 있기에 웬만한 것은 다 받아 주고 있었다.

자신도 참기도 했고.

옆에 잘생기고 야하고 청초한 데다가 묘하게 퇴폐미 있는, 나를 너무 사랑하는 미남이 있는데 만지지를 못했다!

로나는 모나한과 함께 오븐 앞 의자에 앉아 모나한의 볼을 주물럭거렸다.

모나한이 편하게 얼굴을 만지시라고 살짝 고개를 숙여 주고 있었다.

닿는 것만으로 좋은지 눈을 한껏 휜 채 웃고 있었다.

참 잘생기긴 잘생겼어.

아직도 저렇게 눈꼬리를 휠 때 아직도 에델바이스가 피는 걸 보면 진짜 미남이긴 하단 말이야.

심지어 그때는 콩깍지가 안 껴 있어서 꽃의 개수가 적었다면, 지금은 콩깍지가 끼어서 꽃이 많아졌네.

고개를 살짝 기울일 때마다 꽃잎이 하늘거리는 게 아주 청초하고 예쁘구만.

로나는 환상일 게 분명한 꽃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게 보이는 걸 보면 미모에 넘어가서 아이큐가 좀 준 것 같기도 하고, 뇌가 잘 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방긋- 모나한이 웃었다.

그의 등 뒤에서 아직 꽃망울을 맺고 있던 에델바이스가 화려하게 피어나는 환상이 보였다.

음, 그래. 뇌가 안 돌아가네.

“미모가 환장- 아니, 환상적이네요.”

“앞에 어마어마한 단어가 잠깐 나타났었어요.”

“제 뇌가 잠깐 파업해서 그래요. 모나한의 외모는 언제나 끝내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로나가 모나한의 동그래진 눈에 변명하며, 파업한 뇌를 다시 굴리기 위해 그의 볼에서 손을 뗐다.

눈을 한번 감고, 손바닥으로 몇 번 꾹꾹 눌러 준 다음에 다시 모나한을 바라보니 에델바이스가 몇 개 준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을 봐 달라며 반짝거리는 에델바이스를 무시하며 앞에 놓아두었던 레몬차를 홀짝거렸다.

점심시간이 한참 남은 오후, 빵이 구워지는 걸 기다리느라고 생긴 휴식 시간이었다.

“분명히 옛날보다 어마무시하게 많은 양의 빵을 만들고 있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일하는 시간은 비슷하네요.”

“체력이랑 속도가 늘었으니까요. 힘도 늘어서 한꺼번에 많은 양을 해도 힘들지 않고요.”

“그리고 모나한이 레시피를 익혀서 빵을 같이 만드니까 더 쉬는 시간이 늘었어요.”

“저는 좋은데요? 로나랑 이렇게 있을 수 있고.”

모나한이 멈추지 않는 수작질을 뽐내며 말했다.

로나는 받아 주기로 결심했던 것을 실행하기 위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좋아요.”

얼굴에 철판을 좀 더 두껍게 깔면 받아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조금 국어책 읽는 것 같기도 하지만, 괜찮다! 어쨌든, 긍정이었으니까!

모나한은 묘하게 딱딱한 로나의 대답에도 굴하지 않고 웃으며 좋아했다.

“요즘 로나가 제 수작질을 전부 받아 주니까 아주 좋군요.”

“받아 줘도 안 받아 줘도 좋아하잖아요.”

“안 받아 준 척하면서 결국 받아 주니까요.”

전 로나 표 밀당이 아주 마음에 들거든요.

어느새 밀당이란 단어까지 배워 버린 모나한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로나는 그 웃음을 빤히 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나한의 손을 가져다가 만지작거렸다.

“저도 못 만진 만큼 욕망을 채워야겠어요.”

“마음껏 채우세요. 저야 언제나 환영이죠.”

모나한이 원하시는 대로 하라는 듯 손가락을 살짝 흔들었다가 힘을 쭉 빼었다.

모나한의 손은 부드러워 보이기보다는 살짝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울퉁불퉁한 느낌보다는 섬세한 선이 창백한 피부와 함께 돋보이는 손이랄까.

특히 제빵을 한다고 언제부턴가 동그랗게 깎아 온 손톱이 마음에 들었다.

시작점의 반달과 끝의 하얀 부분도 정말 완벽한 비율이었다.

어쩜 이렇게 손톱 끝까지 잘생겼을까.

만지는 보람이 있군!

로나는 손톱과 바로 밑 살 사이를 엄지로 만지작거렸다.

그 묘한 느낌이 이상하게 중독적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그러다가 자신의 변한 손을 요리조리 돌려보며 모나한의 손과 비교했다.

음, 내 손도 아주 예뻐졌네. 놀라운걸.

제빵사보다는 귀한 귀족 집 영애 손 같아.

“이제 내 손은 누가 봐도 제빵사인 줄 모르겠어요. 조금 아쉽다.”

“글쎄요. 여기 남은 흉터나 굳은살을 만져 보면……. 어머나, 이건 제빵사의 손이군!”

“그러고 보니 변했는데 흉터랑 굳은살은 남았네요. 옅어지긴 했지만 없어지진 않았어요.”

“몸이 바뀐 건 아니니까요. 로나의 원래 몸에서 좀 더 효율적으로 정리된 거죠.”

“으으음. 그런가?”

하긴, 상관없지.

로나는 제 손을 살펴보던 시선을 다시 모나한의 손으로 옮기며 말했다.

모양이 무슨 상관이람,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지.

로나는 대충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런 것에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발터 씨랑 모틸라 씨는 뭐 하고 있으려나요?”

로나가 다시 모나한의 손톱 끝을 만지작거려 요상한 느낌을 즐기면서 말했다.

저녁 식사 이전까지만 일하겠다고 하던 것도 잠시, 발터는 생각보다 더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저녁 시간 이후에도 저택 밖으로 나갔다.

쟤는 쉴 줄을 모른다고 투덜거리며 졸졸 따라간 모틸라도 함께였다.

“눈이 오기 전에 웬만한 겨울 준비는 다 처리하겠다고 바쁘게 움직이더군요.”

“해가 더 짧아져서 캄캄할 텐데.”

“횃불을 쓰더라고요. 전에는 난방으로 쓸 나무도 부족해서 해가 지면 일을 멈췄지만, 여유분이 생기자 그때부터는 해가 진 후에도 일하더군요.”

“하긴, 시골 겨울은 준비할 게 많죠.”

로나가 자신도 예전에 겨울이 되면 빵집 경영보다는 가족을 도와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저야 상점 창에서 요리 재료를 살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그게 안 되니까요.”

내가 대신 준비했다며 밀가루 포대를 주기도 하고, 갈라진 집 건물을 보수하고, 보관할 수 있는 먹을 것들을 챙기고.

“눈이 오면 마을을 오가던 상인의 발걸음도 뚝 끊기니까요. 땔감을 미리 준비하는 것만 해도 커다란 일이었죠.”

그걸 보관할 젖지 않을 장소, 혹시 꺼질 걸 대비해 잔가지들도 챙겨야 했고.

“그러니 발터 씨가 바쁠 만도 하죠.”

“가난한 평민에게 겨울은 생존의 문제니까요. 필요하면 가축이랑 같이 자더라도 체온을 지켜야 하죠.”

“맞아요. 다행히 그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죠.”

마을에 특히 가난한 이들이 그렇게 자는 걸 보며 얼마나 기겁했던지.

가족들 사이에 붙어 자기만 하면 된다는 게 그 순간만큼은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래도 추위에 덜덜 떨며 깨곤 했지만, 적어도 소나 염소와 같이 잘 필요는 없었죠.”

“어떻게든 체온을 유지하려고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집은 비워 놓고 모여 자기도 하니까요.”

“아, 그 순간만큼은 가족 수가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로나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안 그래도 위생 관념이 낮은데, 추운 겨울엔 아예 씻지도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나마 가족들은 자신이 쫓아다니며 물을 적신 천으로 닦아 대기라도 했지.

“발터 씨가 생각보다 나무가 많이 모여서 적어도 이번 겨울에 얼어 죽은 사람은 안 나오겠다고 말하더군요.”

“아, 정말 다행이네요.”

“그래도 조금 걱정되는 건물이 몇 개 있다고, 남은 나무로 보수 중이더라고요.”

“……언제 그런 걸 다 봤어요? 나만 관심이 없었나?”

“로나는 아직 집중해서 보는 방법에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이렇게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모나한이 살짝 아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이라도 더 사랑받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답니다.”

“……모나한 때문에 내 버릇이 점점 나빠질 것 같아.”

“아직도 덜 나빠졌다니. 제 노력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더 노력하면 아예 침대 위의 곰팡이가 될지도 몰라요.”

“……로나 성격상 절대 무리일 것 같은데.”

모나한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온 감각이 널뛰던 순간에도 코에 허브즙을 바른 솜을 쑤셔 넣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만세를 하던 사람이 무슨.

“제발 침대 위에 뒹굴뒹굴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안 돼요. 한번 누우면 일어날 수 없어요. 침대는 마약 같은 거라고요.”

“야행성인 뱀파이어답지 않게 해만 뜨면 꼬박꼬박 일어나시는 분이.”

“산장에 있을 때는 느긋하며 퍼졌었는데.”

“그렇게 퍼졌던 것도 잠시고 또 뭔가 만들러 가고, 뭔가 배우겠다고 하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고요.”

“전생에 비하면 게으른 건데.”

“이게 게으르면 전생에 도대체 뭘 했던 겁니까?”

“글쎄요. 교수님 밑에 굴러다니는 노예?”

대학원생이라고 쓰고 노예라고 읽었지.

“……노예 제도가 없는 곳이라 하셨잖아요.”

“뭐, 이쪽 같은 의미는 아니고요, 그냥 어떤 지식과 학위를 얻기 위해 교수의 밑에서 일하는 거였어요. 일의 양이 너무 많아서 노예 같다고 하는 거죠.”

“왜 그런 걸 하신 거죠?”

“글쎄요? 그땐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로나는 이제 너무 지나 버린 과거라고 말했다.

그때 했던 공부, 머릿속으로 욱여넣었던 지식이 아까워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뭐, 다 털어 버렸으니까요. 지금은 그냥 그럭저럭 열심히 사는 제빵사일 뿐이에요.”

“……그래요. 잘생긴 뱀파이어를 애인으로 둔 제빵사요.”

모나한이 로나의 손을 깍지껴 잡으며 말했다.

“아, 그래요. 모나한과 엮이는 순간 평범한 제빵사는 아니게 되긴 했죠.”

로나가 모나한과 깍지낀 손을 눈앞에서 흔들며 키득거렸다.

이것처럼 제대로 엮여서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