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 (88/154)

88

“전 사실 스튜에 크루통을 넣어 먹는 것보다 반대로 크루통에 스튜를 부어 먹는 걸 좋아하거든요.”

로나가 아공간에서 식빵을 꺼내 네모나게 자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크루통을 산만큼 만들어야겠어요.”

“제가 스튜 끓일까요?”

“좋아요. 고기 꺼내 줄게요.”

“감자 넣는 건 별로 안 좋아하셨죠? 양파를 많이 넣을까요?”

“얇게 썰어 주세요. 흐물거리는 양파를 먹고 싶으니까.”

“좋아요.”

밤빵과 고구마, 잡곡 식빵과 단호박빵 등등이 구워지는 오븐 앞에서 통통통거리는 식칼 소리와 자른 식빵을 프라이팬에서 구워 나가는 소리가 부엌에 가득 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나와 모나한이 아침 식사를 가지고 식당에 갔을 때는 한껏 기대하는 얼굴인 모틸라와 발터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이거 먹고 마을에 가서 사람들에게 이야기 좀 해 줄래요? 빵을 가득 만들어 놨거든요.”

식탁에 식사를 차리며 로나가 하는 말에 발터가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온실 정리 먼저 하실 줄 알았는데…….”

“굶고 있는 사람이 많다면서요. 빵 먼저 만들었죠. 점심부터는 국물이 있는 요리도 할 거니까, 마을 사람들에게 식기를 지참해 달라고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식사 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짧은 시간에 두 분이 200명분의 식사를 만드실 수 있으십니까?”

필요하시다면 미리 마을 사람들을 불러 돕도록 하겠습니다.

발터가 마을로 내려가는 즉시 적당한 사람을 고르겠다며 그렇게 말했다.

로나는 그런 발터의 모습을 보다가 그릇에 크루통을 가득 담고 그 위로 수프를 부으며 말했다.

“저희가 인간이 아니라서요.”

오늘 식사 메뉴라도 말하는 듯한 아주 평범한 목소리였다.

로나의 직설적인 대화에 익숙한 모나한은 로나를 따라 그릇 가득한 크루통에 수프를 부을 뿐이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모틸라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로나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던 식당에 모틸라가 떨어트린 숟가락이 굴러가는 소리만 신나게 울렸다.

“……알아차리긴 했습니다만.”

“못 알아차릴 수가 없죠. 지인이라는데 눈은 다들 선홍색이고, 외모는 평범하다고 하면 뺨 맞을 정도고.”

“그렇죠.”

“마법사나 사냥꾼이라고 하기에는 비슷한 능력을 사용하고.”

“맞는 말씀이십니다.”

“제빵사라는 사람은 정말 이상한 능력이 있고.”

“……정체를 밝히기 싫어하시는 것 같아 열심히 모른 척하는 중이었습니다만.”

“모른 척하기 힘들었겠네요.”

“아니라곤 못 하겠군요.”

발터는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확한 정체를 말하긴 좀 그렇지만……. 아무튼 저희는 이인종이에요. 나쁜 짓 할 생각도 전혀 없고, 이 영지에 노리는 것도 전혀 없어요. 그냥 모틸라 씨 고향이라서 온 것뿐이에요.”

“……그건 들었습니다만,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고향이라고 하시는데,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모틸라 님과 닮은 분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아주 예전의 고향이죠. 발터 씨가 태어나기 전요.”

“그렇군요. 의문이 풀렸습니다.”

“아무튼 모틸라 씨는 자신의 고향이 엉망이 돼서 돕고 싶은 거고, 그래서 저희에게 도와 달라고 하신 거고요.”

그게 저희가 여기 머물려는 이유죠.

로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스튜가 가득 적셔진 크루통을 숟가락 가득 담아 입 안에 넣었다.

자신이 만든 크루통은 바삭했고, 모나한이 만든 스튜는 완벽했다.

그녀는 새하얀 크림 속에 갈색빛을 뽐내는 고기와 흐물흐물해진 양파를 가득 담아 한입 더 먹고는 이번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까지 끄덕였다.

미각이 예민해서 그런가? 은근히 요리도 잘한다니까.

가르치는 보람이 있어.

로나의 ‘맛있다’라고 온 얼굴로 외치는 표정을 본 모나한이 뿌듯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비밀들을 다 밝혀 놓고 그렇게 맛있다는 표정이나 하고 있니……. 물론 스튜랑 크루통이 어마어마하게 맛있긴 하지만…….”

모틸라가 지친 목소리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로나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비밀로 하려면 우리 셋이 있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됐죠. 딱 봐도 눈 색깔에서 티가 나는데.”

“그렇긴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희 체력이 아주 좋으니 지칠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예요. 식사는 하루 세끼 차릴 거고, 모틸라 씨는 발터 씨를 잘 도우실 테고.”

로나는 그러니 이젠 걱정하지 말고 밥이라도 먹으라는 듯 손짓하고는 덧붙였다.

“발터 씨는 그냥 힘세고 지치지 않는 일꾼 셋을 얻었다고 생각하세요. 그게 더 마음에 편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발터는 로나의 말에 대답하고는 아직 먹지 않았던 스튜를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직도 그들의 정체를 모르는 것은 매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비밀을 아는데 모른 척’ 하는 것보다야 편했다.

아직도 무슨 비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발터는 그렇게 생각하며 정말 오랜만에 먹는 크림 스튜를 만끽했다.

모틸라 님 말씀대로 스튜도 크루통도 아주 끝내주게 맛있었다.

적어도 앞으로 자신의 식사도 영지민의 식사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발터에게 커다란 안심으로 다가왔다.

그는 조금 전보다 좀 더 안심한 얼굴로 음식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은 훌륭한 식사는 아쉬울 정도로 순식간에 끝났다.

발터는 아쉬움을 감추고 식기를 내려놓으며 비슷하게 식사를 끝마친 로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예?”

“언제든 좋습니다. 필요하거나 혹은 그저 귀찮은 일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허리를 단단히 세우고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밥 먹는 내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모틸라 님이 대신 대가를 내주시기로 하셨고, 제가 어떻게든 갚겠다는 것도 진심입니다. 계약서상으로 최대한 공정하게 처리하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발터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진중하게 말했다.

“이런 망한 영지에 와서 제빵사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 사실, 로나 씨의 손해입니다. 그 점은 생각하지 않으시겠다 하셨지만, 그래도 직접 뭐라도 해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스스럼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면서 발터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남색 머리에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으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우선 지금은 생각나는 게 없으니 다음에-”

“결혼식 어때?”

“네?”

로나가 생각나는 게 없다며 볼을 긁적이자, 스튜를 네 그릇째 먹고 있는 모틸라가 말했다.

“너희 결혼식 해야 할 거 아냐? 아직 안 했잖아. 그렇지?”

“어, 그렇긴 하지만……. 작게 할 생각이었고.”

“에엥? 왜? 결혼식은 크게 해야지! 사람 막 모이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예쁜 드레스에 꽃도 샤랄라 하고!”

모틸라는 생각만 해도 좋다는 듯이 볼을 붉히며 말했다.

“온갖 꽃으로 만든 화려한 부케를 하늘로 날리고, 레이스가 펄럭거리고! 얼마나 좋은데!”

어떻게 이렇게 좋은 걸 안 한다고 할 수 있어!

“그야……. 사람들 모으기 위해서 써야 하는 청첩장, 누구에게까지 보내야 하는지 하는 고민, 그 사람들이 모일 만한 장소 고르기, 드레스, 부케 꽃, 먹을 음식 장만 등등 해야 할 게 너무 많잖아요.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고, 그렇게까지 사람 많은 것도 싫다고요.”

전생에 수많은 결혼식에 갔던 로나의 말이었다.

친척들과 친구들, 직장 지인들의 결혼식들.

호텔이나 식장 결혼식에서 하던 결혼식에 수없이 가본 입장으로서 로나는 그런 것들이 별로였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펜션 같은 데 빌려서 조그맣게…….

진짜 친한 친구들하고 가족들만 불러서 낄낄거리면서…….

“그 정도가 좋은 거 같아요. 지인들만 불러서 작게 하는 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하지만 모틸라는 로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결혼식을 왜 네가 꾸며? 왜 네가 생각해?”

“……네?”

“내가 말하는 결혼식은 귀족 결혼식이야. 발터가 한다니까?”

“……제가 말입니까?”

그런 망해 먹을 만한 말을?

저렇게 완벽한 기사의 표본같이 생긴 사람이 결혼식을 기획한다고?

한 번도 안 해 본 것 같은데?

“물론 고르는 건 내가 할게. 나 그런 거 잘해! 좋아해!”

“아, 응. 그러신 것 같아요.”

“발터는 그거지. 공간 제공! 귀족 이름값 제공! 요리할 장소 제공! 일할 사람 제공!”

“……아하.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발터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나 네가 할 일은 내가 간추려 놓은 선택지 중에 원하는 걸 콕 찍으면 되는 거야! 드레스? 부케? 식장 디자인? 넌 그냥 고르기만 해! 선택지는 내가 주지!”

모틸라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

얼마나 자신 있는지 콧대를 높게 세우고 머리카락을 슬쩍 넘기기까지 했다.

물론 그녀는 아주 고혹적이고 우아한 외모라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앞쪽 과수원은 불탔지만, 뒤쪽 과수원은 괜찮지 않아?”

“예. 뒤쪽은 피해가 없습니다.”

“그럼 늦은 봄에 그곳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겠네! 그 아래서 결혼식 하면 되겠다!”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밭의 수호목인데, 거기에 단상을 하나 세우면 되겠네요.”

“그 나무를 기점으로 식장을 만드는 거야! 오렌지 꽃 부케를 든 신부!”

어……. 저기요……? 갑자기 제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어요.

모틸라와 발터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대고 있어요!

“모, 모나한? 저 둘 좀 말려 봐요. 갑자기 급발진 하잖아!”

“네? 왜요?”

“예? 당연히 말려야죠! 갑자기 봄에 결혼하게 생겼……. 당신, 말릴 생각이 없구나?”

로나가 모나한의 의문 어린 대답에 그를 돌아보았다가 ‘아주 마음에 드는 전개군’이라는 얼굴로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손에 턱을 괸 채로 모틸라와 발터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기까지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