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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 안에 있는 화분은-”
“거의 다 죽었을 겁니다. 저택 자체를 손보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고, 몰락하는 바람에 시종들도 그만두었고, 남은 몇 명은 도적들이 몰려오면서 도망갔죠. 시체도 몇 구 발견했고요.”
“아…….”
“남아 있는 화분들은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음, 그럼 허브를 좀 키울게요. 필요해서요.”
“온실을 장소로 제공해 드리기로 하였으니, 그 안의 물건은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는 방도 2층에서 원하는 곳으로 선택하라고 말했다.
“부엌에 가까운 방으로 할게요. 왔다 갔다 하기 편하게.”
“그쪽 방들은 조금 어둡습니다만.”
“괜찮아요. 어차피 하루종일 온실에 있을 거잖아요.”
“그렇긴 하죠. ……시종들이 다 도망가서 편하시진 않을 겁니다.”
“저 평민이에요. 혼자 하는 건 아주 익숙하다는 소리죠.”
“……그렇군요.”
발터는 믿기 힘든 말이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진한 갈색 머리카락을 땋아 내린 새하얀 얼굴에 주근깨 몇 개로 매력을, 기다란 갈색 속눈썹 사이에 요요한 선홍색 눈동자로 섬세한 분위기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차림에서, 언뜻 보지는 손끝과 말투, 그리고 자신을 대하는 행동은 그녀의 말대로 평민인 듯했다.
그러나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식견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계산과 평민들이 접하지 못했을 고급스러운 단어들을 선택하는 모습을 볼 때면, 또 헷갈리는 것이다.
발터는 머리 한구석에서 다시 피어오른 그들의 정체에 대한 의문을 저 멀리 치워 버렸다.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모틸라를 만났던 내내 그랬으니까.
그는 그런 것들보다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것에 익숙한 이였다.
도움이 안 될 질문을 삼키는 것에 익숙하기도 했고.
“욕실은 방에 있고, 물은 직접 데우셔야 하는데, 땔감이-”
“가지고 있는 것 있으니까 그걸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해가 졌으니 주무시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힘드셨을 테니까요. 오늘은 일찍 주무시고 괜찮으시다면 내일 부엌을 살펴봐 주십시오.”
“그럴게요. 자, 이거 받아요.”
발터는 로나의 손에 든 두툼한 샌드위치를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았다.
“모틸라에게 들었는데, 감자랑 달걀밖에 못 드셨다면서요. 마침 만들어 놓았던 샌드위치가 있어서요. 자기 전에 드시라고요.”
“……감사합니다.”
발터는 두툼한 샌드위치를 받으며 감사하다고 말하고는 망설이는 듯한 얼굴로 잠시 서 있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눈을 감고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망해 버린 영지의 영주가 하는 인사였다.
로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휘저으며 말리려다가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조용히 손을 모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망해 버린 영지의 영주가 아닌, 새로운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을 관찰함으로써 나는 이 상태창을 알아볼 것이므로.
적어도 어떤 이들이 주인공이 되는지.
난 앞으로 어떤 이들을 만나게 되는지.
그리고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아마도 로나가 예상하건대, 봄보다는 오래 볼 것 같으므로.
자신의 빵집이 세워질 영지의 괜찮은 영주님에게.
로나는 자신의 방으로 사라지는 발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허공에 상태창을 띄웠다.
예상했던 것들이 푸르게 빛나며 자신을 알렸다.
-축하합니다! ‘가지 말아요, 그대여’의 남자 주인공을 만났습니다.
-새로운 업적을 얻었습니다.
-<‘가지 말아요, 그대여’의 빵집 - ‘가지 말아요, 그대여’의 남자 주인공 ‘인디고 발터’와 만났습니다. 관련 이벤트가 빵집에서 벌어질 확률이 올라갑니다. 남주인공에게서 얻는 경험치와 빵 코인이 상승합니다.>
-새로운 빵집을 열었습니다. 얻을 수 있는 경험치와 빵 코인이 정상화됩니다.
로나는 그 안내문을 모두 읽고 옆에 서 있는 모나한을 바라보았다.
어떠한 선고라도 내려지기를 바라는 것 같은 표정으로,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로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나한이 무겁게 눈을 내리감았다.
* * *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난 로나와 모나한은 온실을 정리하기 전에 주민들이 먹을 빵부터 만들기로 했다.
모나한은 그런 로나의 결정에 별말을 더하지 않고, 피곤하진 않겠냐며 걱정하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살짝 정돈해 줄 뿐이었다.
로나는 제 앞머리를 만지는 모나한을 올려다보며 설핏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굶은 사람이 많다잖아요. 제가 살던 시골도 흉년이 들거나 아직 아무것도 영글지 않는 계절이면 굶은 사람들이 있곤 했거든요.”
어른들은 어떻게든 모른 척한다 해도 애들까지 그러지는 못했죠.
꽤 큰 지출이었노라고, 로나는 중얼거렸다.
“착하기도 하시지.”
“능글맞기도 하시지.”
모나한이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마차 마부석에서 로나가 마을 사람 중 어린아이들의 마른 팔다리에 눈을 떼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며 말했다.
로나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부러 모나한의 배를 툭툭 치며 말했고.
“어떤 빵을 만드실 생각이에요?”
“글쎄요. 우선은 기본적인 밀 빵하고……. 잡곡을 가득 넣어서 만들까. 어떻게든 영양분을 좀 많이 넣고 싶은데.”
이상하다는 걸 들키지 않으면서 맛있고 영양분도 많은 빵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야채를 넣으면 역시 이상하려나.
“밤이라도 가득 넣어 볼까요? 고구마하고, 달달한 것들 말이죠.”
“호박 같은 것들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작물이니까 넣어도 이상하지 않겠고…….”
“콩? 맛은 없지만, 단백질이 많이 들어가 있으니까…….”
“단백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맛을 따질 사람들은 없을걸요.”
로나는 생각나는 것들을 부엌에 와르르 꺼내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영양분 높은 것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 행동이었다.
모나한은 그 뒤를 따라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정리했다.
“다들 못 먹었다는데 갑자기 먹으면 탈이 나지 않을까요?”
“들어 보니 감자 정도는 먹었다고 하니까, 탈이 나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국물 같은 것도 좀 주고 싶은데. 겨울이니까요.”
“지금은 무리고 점심부터는 각자 그릇을 가지고 오라고 하죠. 어차피 하루 세끼 먹일 거잖아요, 그렇죠?”
“발터 씨에게도 말했지만 일하기 위해서라도 하루 세 끼를 먹어야죠!”
“제가 평민으로 살았던 시절을 돌아보자면-”
“물론 그들은 하루 한 끼도 감사했겠죠.”
“3일에 한 번 밥 먹던 시절도 있답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는 모나한을 바라보며 로나는 자신이 사실은 다른 곳보다 풍요로운 시골에서 살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루 한 끼, 조금 풍족할 때는 하루 두 끼를.
그리고 상태창이 있고 난 뒤에는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먹곤 했으니까.
“지금은 전쟁도 없고 이 나라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죠.”
평민을 소모품으로 보지도 않고요.
모나한이 로나의 생각을 눈치채고 말했다.
“이 나라는 지금 전체적으로 상당히 잘 사는 편이에요. 귀족들 성격도 나쁘지 않고, 세금도 낮은 편이고.”
“……하긴. 세금으로 걱정을 한 적은 별로 없네요.”
“괜찮은 나라죠.”
“잘 몰랐는데 그런가 봐요.”
로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만든 밤 빵 반죽을 오븐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밤과 밀가루가 익어 가는 달콤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맛있는 냄새…….”
냄새가 부엌을 넘어서 그녀의 방까지 풍겼는지, 아니면 그냥 뱀파이어의 예민한 후각으로 맡고 왔는지, 모틸라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니었는지 잠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밤새 어떻게 잔 건지 새까만 머리가 허공 여기저기 뻗어 자신을 주장하고 있기도 했다.
“먹을 것에 이끌려 온 바퀴벌레 같군.”
“이렇게 예쁜 바퀴벌레 본 적 있어?”
“예쁘다고요? 어디요? 어디에 예쁜 게 있어요? 안 보이는데!”
“네 눈앞에! 여기! 이곳! 나!”
로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작한 모틸라와 모나한의 티격태격함에 피식 웃고는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잘 잤어요, 모틸라? 아직 밤빵이 구워지려면 멀었어요. 배고프면 그 대신 제 아공간의 소보로빵이라도 먹고 있을래요?”
“……으응.”
“여기 있어요. 조금 있다 발터 씨가 일어나시면 그에게도 좀 나눠 주실래요?”
“……그럴게.”
모틸라는 로나의 부드러운 행동에 왠지 얌전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모습에 조금 키득거리며 웃다가 아공간에서 쟁반에 쌓아 놓았던 소보로빵들을 전부 넘겨주었다.
“어, 어. 이거 너무 많지 않아?”
“뱀파이어 위장이면 이 정도는 금방 먹잖아요. 발터 씨한테는 두세 개만 줘도 돼요. 어차피 아침은 따로 만들 거니까.”
“나도 아침 먹어도-”
“그럼요. 당연히 되죠. 그건 간식이잖아요.”
그렇죠?
로나가 씨익 웃으며 말했고, 모틸라는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후광이 피어오르는 환영을 보았다.
“혹시 발터 씨가 언제 일어나시는지 알까요?”
“어……. 해 뜨기 전에 일어나던데? 기사잖아. 아침에 훈련하던 버릇이 있다나 뭐라나.”
“그럼 곧 일어나시겠네요.”
“그렇지.”
“그럼 식당에 간단한 식기 좀 놔 주실래요? 저희가 아침 식사를 차려서 갈게요.”
“앗, 응!”
모틸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로나가 씻어 놓았다는 식기를 카트에 실은 채 멍한 표정으로 부엌을 나갔다.
‘내가 이런 걸 왜 하고 있지?’라는 표정이었다.
모나한은 물 흐르는 듯이 모틸라에게 일을 시키는 로나를 보며 소리 없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뱀파이어라는 족속들은 도통 남을 부려 먹기만 하는 이들인데, 자신도 그렇고 모틸라도 그렇고 로나만 만나면 꼼짝도 못 하고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로는 고기를 듬뿍 넣은 따뜻한 크림 스튜예요!”
“와! 좋아!”
그리고 보상이 확실해서 다음 일은 더 열심히 하게 되지.
모나한은 모틸라가 환한 얼굴로 식당으로 사라지는 것을 피식거리는 얼굴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