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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마음 어딘가 소곤거렸던 불안이 로나의 계산과 서류, 계약서라는 말을 듣자마자 사그라들었다.
악마나 마녀가 저러지는 않겠지.
서류를 드린다고 말하는 악마는 들은 적이 없었다.
“어, 그럼 제가 장소를 제공하겠습니다. 영지 중에 가장 좋은 부엌은 제 저택이니까 여기서 만드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그럼 그만큼 금액을 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영지에 직접 와 주시기까지 했는데, 장소 제공은 당연히 해 드려야죠.”
“아뇨.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아야죠. 부엌에만 들어오는 인원을 한정할 거고, 그 외에 자잘한 설거지나 배식 같은 것은 사람을 쓰고 싶어요. 그에 대한 것도 확실히 하고 싶으니까 계산하죠.”
“……알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서재로 가시겠습니까? 피곤하시다면 내일 하시는 것도 괜찮고요.”
“피곤하진 않아요. 우선 서로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정확하지 않으니까 서재로 가서 이야기해 보죠. 종이랑 펜을 제공 받고 싶습니다.”
“그 정도야 당연히 내어 드려야죠. 서재는 이쪽입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순간 쏟아진 엄청나게 현실적인 대화에 모틸라와 모나한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유혹과 낭만, 퇴폐와 현혹에 자신 있는 자들이지 서류와 계산 같은 것들은 철저히 외면해 왔다.
서류 처리하는 왕이 싫어서 서로 만날 때마다 기꺼이 치명적인 척을 하는, 식욕의 노예들일 뿐이었다.
모틸라와 모나한은 제발 저 대화에 자신을 끌어들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공손히 서 있었다.
“모나한, 뭐 해요? 안 따라와요?”
“네, 네? 저요?”
“당신요.”
그러나 이미 24시간 모나한과 붙어 있는 것에 익숙한 로나는 그를 구원해 주지 않았다.
서류 처리와 계산, 협상과 계약서라는 늪에 그를 끌어들일 뿐이었다.
모나한은 순간 로나가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을 매우 익숙하게 만들었던 과거를 후회했다.
애석하게도, 정말 애석하게도 오래된 미식가, 수많은 직업을 가졌던 키메라는 서류 처리를 할 줄 알았다.
계산도, 협상도.
알맞은 계약서 작성도.
로나가 부려 먹기에 훌륭한 인재였다는 소리다.
모틸라는 그 모습을 보며 숨죽인 채로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은 아니고, 모나한만 끌려가는 이 상황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특히 모나한의 절망스럽다는 표정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모틸라 님은 안 오십니까?”
“어, 어? 나는 왜?”
그러나 앞장서서 가던 발터가 뒤를 돌아보며 모틸라를 불렀다.
모틸라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금액을 내어 주시기로 하셨으니까요. 실제로 돈을 쓰시는 것은 모틸라 님이시니 알맞은지 보셔야죠.”
“나는 너희를 믿는데! 그냥 통보만 해 주면-”
“그럴 순 없습니다.”
“이런 건 서로 확실히 해야 해요. 서류로 드릴 테니 꼼꼼히 검토해 주세요.”
그리고 발터 대신에 대가를 내기로 한 모틸라도 같이 서재로 끌려갔다.
혼자 끌려가는 줄 알았던 모나한이 모틸라를 바라보며 비웃었다.
‘너만 빠져나가려고? 가능할 것 같냐?’라는 문장이 얼굴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모틸라는 그 표정에 얼굴을 온통 구기고 씩씩거리며 붉혔다.
“언제까지 여기 있으실지 모르니까, 한 달 단위로 계약하는 게 좋겠습니다.”
“좋아요. 서로 필요한 것의 범위를 정하면 한 달짜리 계산서와 그에 따른 서류를 처리해서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발터 씨가 일차적으로 확인하시고, 그 후 모틸라 씨가 확인한 후 금액을 결제해 주시면 되겠네요.”
“……한, 한 달마다?”
“예, 한 달마다요. 그게 가장 적당한 간격인 것 같습니다.”
“장부 처리하기도 편하죠.”
그리고 한 달마다 서류를 검토해야 한다는 말에 모틸라가 파랗게 질렸다.
이번엔 모나한이 쌤통이라 듯이 조용히 낄낄거렸다.
“모, 모나한도!”
“네?”
“모나한도 서류 처리를, 그, 검토라는 걸 해야 하지 않을까?”
“모나한은 제 가게의 종업원이잖아요. 어떤 종업원이 가계 서류를 검토하죠? 그럴 필요 없죠.”
검토는 제가 해야죠. 내 가게인데.
모나한이 로나의 말에 그녀의 시야 바깥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아했다.
적어도 한 달마다 방대한 결재 서류를 검토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승리의 포즈였다.
“서류, 서류 시키자! 나만 할 수는 없어! 모나한도 시켜 줘!”
“굳이? 지금도 서류 기입 정도는 같이 하는데요?”
“그, 그래?”
모틸라는 로나의 말에 아리송하다는 얼굴이 되었고, 모나한은 조용히 시야 밖에서 침묵했다.
로나가 셈이 빨라서 사실 자신이 할 일은 별로 없다든가, 옆에서 숫자만 또박또박 불러 주면 된다거나, 로나가 불러 주는 숫자만 적어 내려가면 된다든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전생에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보기에 로나는 고등 교육을 철저히 받은 자였고, 그는 로나의 서류 처리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처음 서류 처리를 했던 날 엄청나게 빠른 로나의 계산 속도에 당황한 모나한을 보고 로나가 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 그렇죠. 이쪽은 곱셈조차 생활화되어 있지 않죠. 느릴 만하겠네요. 문맹률이 이렇게 높은 곳인데 글자를 아는 것만으로 대단한 거였죠.>
그리고 로나의 ‘효율 좋아, 빨리빨리 한국인’의 영혼은 모나한의 계산 속도를 기다려 주지 못했다.
서류 처리를 할 줄은 안다고 했지, 잘한다고는 안 했다.
결국 조용히 승리를 이룩한 모나한과 새파랗게 질린 모틸라가 서재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첨예한 대립 속에 여러 요구와 한계, 필요 인력과 금액의 범위 등등을 상의하는 발터와 로나의 모습에 최대한, 정말로 최대한 기척을 지웠다.
몰라, 나는 몰라. 나는 공기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다. 무생물이다. 살아 있지 않다.
고풍스러운 4인용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 중 두 명은 무생물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럼 제가 준비하는 식사는 약 200명분이군요.”
“하루 세끼를 준비하는 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자주 먹지 않고-”
“제가 빵집에서 다년간 노동해 본 결과 하루에 세 번 밥을 먹는 게 일하는 데 딱 좋아요. 이 점은 양보하지 않겠습니다. 식사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금액이 올라간다는 건 알고 있지만, 영지민들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다들 너무 말랐어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그만한 금액을 드리기 힘듭니다. 아무리 모틸라 님이 내주시기로 하셨지만, 사실 당연히 제가 드려야 할 금액이고……. 저택은 습격을 안 당했으니 적지만 남은 재산이 있을 겁니다.”
“내가 낸다니까? 넌 돈 하나도 안 써도 돼!”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자신이 무생물이라며 되뇌며 기척을 죽이고 있던 모틸라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도 이번 겨울 동안 드릴 수 있겠죠. 그 후에는 어떻게든 해 봐야죠. 모틸라 님도 봄까지는 있어 주시겠다 하셨고…….”
“대가는 내가 내겠다니까? 나 돈 많다고.”
“모틸라 님은 봄까지 있으시기로 하셔서요.”
“내가 낼게.”
“봄까지밖에 있지 않으셔서요.”
발터는 로나에게 시선을 맞춘 채 봄까지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말만 들어 보면 삐진 것 같은데, 얼굴은 매우 덤덤한 표정이라 살짝 헷갈렸다.
하지만 모틸라가 와서 발터의 어깨를 잡고 흔들면서.
“내가 내줄게에에!!”
소리치는 것을 보면 삐진 게 맞나 보다.
로나는 모틸라의 손에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는 발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발터는 그런 로나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특유의 덤덤한 표정과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봄이면 사라지시는 분 말씀이라 그런가? 안 들리네요.”
* * *
금액은 결국 모틸라가 내기로 했다.
발터는 어떻게든 갚겠다고 말했고.
“영지를 부흥시킨 후에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뭐라니? 영지를 부흥시키면 영지를 더 돌봐야지. 너 영주잖아.”
“글쎄요. 대리인에게라도 맡겨 놓으면 되겠죠.”
“그러다가 영지 뺏긴 사람을 내가 몇 명 아는데.”
“공교롭게도 저도 몇 명 알고 있습니다.”
“그럼 더더욱 영지 안에 있어야지! 내가 어디 갈지 알고 찾아와!?”
“알아서 잘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발터와 그 바로 옆 의자에 앉아 있는 모틸라가 티격태격하며 하는 대화를 로나와 모나한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로나는 ‘역시 남주와 여주! 티키타카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군!’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고, 모나한은 모틸라가 아까운지 발터가 아까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눈에도 발터는 꽤 괜찮은 청년처럼 보였다.
“어쨌든 이만하면 일차적인 대화는 끝난 것 같습니다. 일주일 정도는 식사를 배급하시면서 인디고 영지에 대해 파악을 해 보고 싶다고 하셨으니까, 최종 계약은 서로 생각해 보고 일주일 후에 하도록 하죠. 우선 빵집을 열 장소는 정했으니, 저택을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이 저택에서 생활하기로 했으니 생활 공간을 알아 둘 필요가 있죠.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택을 안내해 주겠다는 발터의 말에 로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택은 들어올 때 보셨다시피 디귿 형태의 2층짜리 저택입니다. 그중에 왼쪽이 저택과 이어져 있는 작은 온실이에요. 정확히는 반은 저택 안에, 반은 유리로 튀어나온 온실이죠. 그 온실 바로 옆에 저택의 주방입니다.”
“온실이면 정원과 연결된 문이 있겠네요?”
“예. 그 정원과 저택의 쪽문이 이어져 있고요.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오가기도 편할 겁니다. 만드는 건 부엌에서, 쌓아 놓고 나눠 주는 건 온실에서 하시면 편할 겁니다.”
발터는 그렇게 말하며 낮은 목소리로 저택 구조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