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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와 모나한은 마부석에서 슬며시 기척을 지웠다.
잘은 모르겠지만 모틸라가 저 기사님에게 봄까지 있어 주겠다고 말했던 모양이지?
그리고 봄까지 못 기다리고 도망치다가 모나한에게 잡힌 거고.
사내는 보는 누구나 자신이 잘못한 게 무엇이 있는가 돌아보게 만드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무뚝뚝하고, 진중하며 게다가 충성심까지 깊어 보이는 전형적인 기사의 외모였다.
절대 모함이나 거짓말은 하지 않고 제 목숨이 날아가더라도 충심으로 바른말을 할 것 같은 얼굴.
그래서 저런 약해 보이는 표정이 남들보다 더더욱 진실해 보였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처럼 대단하신 분이 머물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 몰락한 마을에도, 저 자신에게도.”
“아, 아니, 나는-”
“먹을 것조차 제대로 드리지 못했죠. 떠나시는 건……. 당연합니다. 제가 이렇게 원망하는 것조차 염치없는 일입니다.”
“아니, 그, 나는-”
“그래도 제발, 간절히 부탁하건대, 부디, 봄까지 만이라도-”
“먹을 걸 구해 왔어!”
“……네?”
“도망간 게 아니라! 저기 봐! 저기 마차! 저기 타고 있는 여자애 있지! 쟤가 도시에서 그렇게 유명한 제빵사야!”
그리고 양심을 얻어맞은 모틸라가 참지 못하고 로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어디 간 게 아니라! 저기 저 회색 머리 남자가 내 치…… 친구! 친구 같은 거야! 지인!”
“……지인요.”
“그래! 그런데 쟤가 요즘 엄청난 실력의 제빵사랑 연애하고 있다지 뭐야! 결혼도 약속했대!”
“그럼 약혼하신 사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맞아! 약혼한 사이야! 그래서 내가 부탁했어! 마침 딱 이 영지에 제빵사가 필요하잖아!”
“그건 그렇죠.”
“내가 또 딱 구해 왔지! 제빵사! 그리고 저 녀석은 사냥을 아주 잘해! 마수 사냥꾼이거든! 유용한 인력!”
“……저를 떠나신 게 아니라요?”
“그렇지! 내가 떠난다니, 그럴 리 있니? 봄까지 있겠다고 그랬잖아!”
“……그랬죠.”
“내가 또 뱉은 말은 언제나 꼬박꼬박 지키는 진실한 모틸라잖아!”
“……그러셨죠. 지금까지는.”
“어머, 어머! 앞으로도 그럴 거란 이야기지!”
모틸라가 사내의 어깨를 토닥이며 “아하하하.” 웃었다.
모틸라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사내의 슬픔과 체념이 가득했던 얼굴은 점점 의심 가득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낮게 가라앉았던 남색 눈동자와 꾹 쥐었던 손은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그거 변명 아니냐’라는 눈초리만 날카롭다.
그는 그 눈 그대로 시선을 돌려 로나와 모나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로나와 모나한이 표정을 빠르게 바꿔 예의 바르게 살짝 웃었다.
그가 그간 배워 온 예절과 기사도로써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지금 이 사람 거짓말하고 있죠?’라고 물어볼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덤덤한 표정을 한 채 로나와 모나한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그 모습에 로나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초면에 무례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인디고 마을의 영주, 인디고 발터입니다. 조그맣게나마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 아뇨! 무례하긴요. 저는 로나입니다. 그냥 로나요. 그러니까 평민이죠.”
“편하게 대하셔도 됩니다.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이미 몰락해 버린 영지입니다. 몰락한 귀족이죠.”
“어, 음. 그러시다면……. 저도 그냥 편하게 대해 주세요.”
로나는 발터의 말에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발터는 특유의 담담한 표정으로 로나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그리고 로나의 귀에 ‘띠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나와 모나한이 예상했듯이 이 남색이 가득한 기사님이 모틸라의 남자 주인공이었던 모양이다.
눈앞에 사람을 두고 상태창을 확인하기는 싫었던 로나는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무시한 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악수한 손을 흔드는 발터를 바라보았다.
“제빵사라는 말은…….”
“아, 틸레아 학원 도시에서 조그맣게 빵집을 했었습니다. 그전에는 시골 마을에서 빵집을 했고요. 어릴 적부터 제빵사를 목표로 했죠. 제법 실력은 좋답니다.”
“제가 그녀의 제빵 실력에 반해서 사냥꾼 일을 그만두고 종업원이 되었을 정도로 실력이 좋은 제빵사입니다.”
뒤에서 침묵하고 있던 모나한이 대화에 참여했다.
“모틸라랑은……. 어릴 적 친구죠.”
“그러시군요. 그럼 제 영지에서 빵집을 하고 싶으시단 말씀은-”
“사실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제빵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들었거든요. 인디고 님도 아시겠지만-”
“발터라고 편히 불러 주십시오.”
“아, 그러시다면, 발터 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모틸라 씨가 조금 막무가내인 성격이시잖아요.”
“아주 막무가내이셨죠.”
“……여기서도?”
“여기서도요.”
로나는 순간 발터에게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꼈다.
전형적인 무뚝뚝한 기사님으로 보여 거리감이 느껴졌던 사람이 순식간에 모틸라에게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린 동지로 느껴졌다.
“……좋은 사람이긴 하십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묘하게 뾰로통한 얼굴이 된 모틸라를 발터가 힐끗 바라보더니 변명하듯 말했다.
그런 발터의 말을 들은 모틸라의 튀어나왔던 입이 슬그머니 들어갔다.
로나는 모나한이 그런 모틸라의 표정을 보고 순간 혀를 차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여동생이 썸 타고 있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친오빠의 표정이었다.
게다가 ‘어린 남자애’라고 표현한 주제에 훤칠하게 큰 청년이 나오니 더더욱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모틸라의 과장법에 익숙해져서 분명 ‘어린 남자애’가 정말로 어리지는 않을 거라 예상한 로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발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 영지에서 제빵사 일을 해 주신다니 감사하긴 합니다만…….”
발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도적들이 쳐들어와 식량 창고도 다 털어 가고, 남아 있는 밀가루가 별로 없습니다. 와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재료조차 성한 게 없으니…….”
“그건 괜찮아!”
발터의 말에 모틸라가 휙 끼어들었다.
“얘가 대단한 사냥꾼이라고 그랬잖아. 모나한이 가진 물품 중에 아공간이 있는데, 그게 마차 한 대 분량 정도는 되거든! 거기에 밀을 가득 실어 오면 될 거야! 사냥꾼이니까 겨울에 움직이는 것도 익숙하고-”
“예? 제가요?”
모나한은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는 표정이 되어 모틸라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처음 듣는 말이기도 했다.
“가능하잖아.”
“가능한 것과 하고 싶은 건 완전히 다른 거죠.”
“왜 싫은 건데?”
“당연히 로나 옆에서 벗어나기 싫으니까.”
“로나도 많이 강해졌잖아! 이젠 괜찮지 않아?”
“그거랑 별개로 그냥 제가 떨어지기 싫은 겁니다만?”
“…….”
“예전부터 멋대로 행동하는 버릇이 있는 건 압니다만.”
“나 혼자만의 버릇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네가 과거에 어떻게 행동했는지 서로 다 아는데.
뱀파이어라는 족속들은 원래 다들 제멋대로잖아.
다들 버릇없는 건 매 마찬가지라고.
“그리고 서로에게는 그 버릇이 안 통하는 것도 잘 알고 계시겠네요.”
“아닌데? 난 잘 통하던데?”
“……그거야 다들 당신한테 빚이 있으니까 그런거고.”
“무슨 빚? 나 뭐 빌려준 적 없는데?”
“…….”
모나한은 ‘네 덕분에 마녀들의 손에서 탈출한 기억이 있어서, 다들 네 말은 최대한 들어주려고 하는 거다’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과거를 모틸라가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그런 성격인 걸 뻔히 알아서 하나라도 더 들어주려고 하는 거고.
모나한은 그냥 한숨이나 푹 내쉬었다.
“뭐, 뭐뭐뭐.”
“아뇨. 됐습니다. 아무튼 전 로나 옆에서 떨어지기 싫어요. 차라리 모틸라 당신이 왔다 갔다 하면……. 아니지. 도망가겠군.”
“도망친 거 아니라니까!”
모틸라가 소리쳤지만, 언덕 위에 있는 사람 중에 그 말을 믿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발터 너도 뭐라 말 좀 해 봐! 모나한이 왔다 갔다 하면 편하다니까! 문제 해결이라고!”
“……괜찮습니다.”
“뭐?”
“제가 아무런 대가도 드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영지에서 제빵사 일을 해 주시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죠. 어떻게든 밀을 들여올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옆 마을에 웃돈을 주고서라도 상인들을 불러들여 보겠습니다.”
“너, 너어…….”
모틸라가 말문이 턱 막혔다는 표정으로 발터를 바라보았다.
이때다 하고 불쌍한 표정 장착! 아련하고 슬픈 눈빛 장착! 그리고 동정심을 일으키는 대사 빡!
그렇게 해도 모자랄 판에 저런 말이나 하고 있다니!!
언제나 모두를 욕망에 빠트려 원하는 것들을 얻어 내 집어삼켰던 뱀파이어 모틸라가 속으로 울부짖었다.
“거기선 최대한 불쌍한 척하면서 뜯어 먹어야지!”
“어떻게 기사 된 자로서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제 영지의 일로 말입니다.”
“이이이익!!”
“……당신, 좀 맘에 드네요.”
“요령 없는 성격일 뿐입니다.”
발터가 모나한의 말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모나한은 그가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잠깐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가 로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직 감각에 익숙해지지 않은 로나의 옆에서 떨어지기에는 불안한 것이 너무 많았다.
로나야 물어보면 괜찮다고 할 게 분명했지만, 모나한은 그래서 더더욱 그녀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모나한은 바들거리는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는 보호자 여우였다!
물론 그 새끼고양이가 사실은 괴수였다거나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다거나 하지만!
그래 봤자 제 눈에는 물에 젖어 오들오들 떠는데도 만지지 말라고 하악대다가 겨우 마음을 열고 머리를 살짝 비비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새끼 고양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