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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는 싸우는 둘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공간에 넣어 놓았던 디저트 3단 트레이를 꺼내 세팅했다.
1층의 한입 크기의 여러 가지 케이크, 2층의 고소함을 자랑하는 스콘, 새하얀 크림치즈와 뽀얀 크림, 그 사이의 노란 자태를 뽐내는 슈크림까지.
그리고 가장 위층에는 초콜릿이 담긴 하얀 그릇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온갖 쿠키와 과일 조각들.
그 옆에 색색의 마카롱을 쌓아 올린 접시를 두고, 슈크림 빵으로 만든 조그만 타워도 놓은 다음에, 달콤한 디저트들과 어울리는 따끈따끈하고 약간 씁쓸한 맛이 나는 차를 아기자기한 찻잔에 따른다.
그리고 디저트 3단 트레이를 꺼낼 때부터 조용히 로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두 식욕의 노예들에게 말했다.
“타- 다! 치명적인 디저트 항상 차림!”
난 제빵사니까 빵으로 승부하겠다!
식욕의 노예들이니까 넘어오겠지!
이걸로 세상도 지배할 수 있다고 그러는 데 치명적이지! 안 그래?
“세상에 모든 이종족을 내 아래로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는 치명적임! 한번 맛본 자들은 다 금은보화를 갖다 바친다는 치명적임!! 모든 이종족을 내 종속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치명적임!!”
외모로 치명적인 척하는 건 자신 없지만, 이런 건 자신 있다!
자, 넘어가라! 넘어가라고, 식욕의 노예들아!
“……치명적이긴 해.”
“확실히 치명적이긴 하네요.”
좋아. 멍청한 식욕의 노예들이 침을 뚝뚝 흘리면서 내 디저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군!
“이걸 이렇게 보여 주고 안 주겠다고 하면 어떨까아? 치명적이라고 아부하지 않으면 주지 않겠다!”
“로나님! 매우 치명적이십니다!”
“아앗!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심장이 아파!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로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순간 엄청난 가능성을 깨달았다.
앞으로 뱀파이어들 만나도 이런 식으로 디저트만 내밀면 치명적인 척 안 해도 되는 거 아냐?
“좋아요. 그럼 저 이제 괜히 치명적인 척 안 해도 되는 거죠?”
“이미 이 3단 트레이에서부터 무척이나 치명적이옵니다!”
“마카롱을 꺼낼 때 저는 쓰러진 지 오래이옵니다!”
로나는 그들의 아부에 고개를 끄덕이며 먹어도 된다고 말했고, 두 식욕의 노예들이 우당탕탕 달려와 디저트들을 먹어 치웠다.
계약진도 인정했는지 그 후 로나의 목에서 어떠한 붉은빛이나 통증이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 * *
“오렌지 꽃이 피는 작은 마을.”
로나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거라고는 재만 남은 과수원이었다.
오렌지 나무는 어디?
겨울이라서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것도 아니고, 그냥 다 타고 남은 나무들인데?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산적한테 습격이라도 당한 것 같군요.”
“맞아. 습격당했지.”
모틸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가 지기 직전에 도착한 모틸라의 고향은 평야의 높은 언덕을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언덕은 한쪽은 완만하고 반대쪽은 가파른 모양새라 완만한 쪽으로 마을이 형성된 모양이었다.
오래된 티가 가득 나는, 그리고 한번 무너져 겨우 수습한 티가 가득 나는 마을.
건조한 겨울 공기에 산적들이 지른 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마을을 넘어 과수원까지 집어삼킨 듯했다.
그리고 그 파괴된 마을의 얼마 남지 않은 마을 사람들이 겨우겨우 복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고 있는 것이 분명한, 아직 완공되지 않은 허술해 보이는 담장.
아직도 무너진 채 수습하지 못한 건물들과 그나마 중심가에 있는 멀쩡한 건물 몇 채.
사람이 몇 명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듯 적은 숫자만 보이는 연기.
남은 사람들이 모여 겨우겨우 겨울을 버티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풍경이었다.
로나는 지금까지 평화롭고 풍족한 마을만 보아 왔다는 것을 깨달으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고향도 가난했고, 겨울을 나는 것을 힘들어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모틸라가 왜 굶었는지 알겠군요.”
“먹을 게 없었거든. 기껏해야 감자와 달걀 정도였지. 그것도 달걀은 나랑 영주만 먹을 수 있을 정도였고.”
“그래서 도망친 겁니까?”
“……정말로 도망친 건 아니었어. 그냥 다른 도시에 가서 먹을 것 좀 사 오려고 했지.”
어느새 마차에서 나와 지붕 위로 올라탄 모틸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씁쓸한 눈으로 마을을 바라보며 마차 지붕 위에 걸터앉는 모습이 더 이상 도망갈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모나한은 그대로 마차를 몰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내가 왔을 때는 초겨울이었는데, 이미 산적들이 마을을 덮치고 지나간 후였어. 건물들은 불타오르고 있었고, 무너진 건물에서 겨우겨우 부상자들을 꺼내고 있었지.”
“……지나가진 못했겠군요.”
“못했지. 그런 성격도 아니고, 게다가 고향이었는걸. 그리고…….”
모틸라는 살짝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인디고 발터. 이 인디고 마을의 영주가 맨손으로 건물 잔해를 치우고 있더라고.”
“영주가요?”
“응. 아주 어린 남자애가 말이야.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눈으로.”
건물 밑에 깔린 사람들을 구하면서도, 부상자들을 살리려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도 짙은 남색의 눈은 건조하게 가라앉아만 있어서.
“원래 영주였던 아버지가 난리 통에 죽었더라고. 영주 기사인데 그가 죽는 순간 바로 계승되었겠지. 작위도, 영지도.”
“…….”
“이 마을 말이야, 그리고 그 ‘인디고’라는 성. 내가 이 마을을 부흥시키면서 내 친구가 받은 성이거든.”
“……후손인가 보죠.”
“응. 남색 머리카락도 남색 눈동자도 아직도 똑같은 색이더라.”
그냥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해가 뜨기 직전의 하늘 같은 색이었다.
겨우 빛이 살짝 닿아 조금 밝아진 새벽의 색.
“같이 도와서 사람들을 구하고, 건물 잔해들도 정리하고, 시체들도 정리하다 보니까……. 한 달도 넘게 흘렀더라.”
그렇게 말하던 모틸라는 손을 뻗어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저택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자.”
“저기가 그 인디고 발터라는 분이 사는 곳인가 보죠?”
“맞아.”
“시골 마을이라도 기사가 영주가 됐으면, 꽤 성공한 건데.”
“글쎄.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문에선 영지가 더 컸었는데, 와 보니 남은 건 저 마을밖에 없더라고.”
“고향이라고 했죠?”
“응. 인디고-”
모틸라가 그 단어를 느리게 내뱉었을 때, 모나한과 로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오래된 후회를 읽을 수 있었다.
“성과 똑같이 남색이 가득한 이들이 다스리던 마을이지.”
마차가, 부서진 마을을 지나 남색의 기사가 사는 저택을 향해 굴러갔다.
시골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고급 마차가,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는 고급 마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데 충분했다.
그리고 그 마차의 마부석에 타 있는 회색 머리의 미남과 이제는 갈색 머리 미녀가 된 로나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보다는 마차의 지붕 위에 앉아 있는 모틸라를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모틸라 마법사님이다.”
“도망가신 거 아니었어?”
“도망은 무슨……! 그냥 이제 떠나신 줄 알았는데.”
여기에 이제 소곤거리는 소리를 못 듣는 귀는 없었으므로 마차에 타고 있는 세 명 모두 그들의 수군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마법사요.”
“이런 시골 마을 사람들은 그게 마법인지 아닌지 구별 못 하잖아.”
“으음.”
“그리고 진짜로 마법도 쓸 줄 알고.”
“변명하기도 좋고요.”
“괜히 입 아프게 설명 안 해도 되고.”
마을이 보였을 때부터 가라앉은 분위기가 된 모틸라가 신경 쓰지 말고 저택으로 가라며 손을 휘저었다.
모나한은 그런 모틸라를 힐끗 돌아보고는 그대로 마차를 저택으로 몰았다.
언덕을 올라가고, 남색 지붕이 특징적인 저택이 보였다.
귀족의 저택이라기엔 작고, 평민의 집이라기엔 커다란, 오랫동안 손질하지 못한 티가 나는 낡은 저택이었다.
그리고 그 저택의 정문에서 모틸라가 말한 것처럼 진한 남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청년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짧게 자른 직모와 햇볕에 그을린 피부, 날카로운 남색 눈, 굳게 다문 입을 가진 무뚝뚝하고 덤덤해 보이는 외모였다.
넓은 어깨와 튼튼해 보이는 허리, 균형 잡힌 근육질 팔다리와 허리에 찬 검이 그가 아주 오랫동안 수련한 기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특징적인 게 있다면 그의 눈동자였는데, 짙은 남색빛의 그 눈은 색깔만큼이나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낮게 가라앉은 눈은 처음 보는 고급 마차도 아닌, 마부석에 타 있는 낯선 사람들도 아닌, 지붕에 앉아서 검은색 곱슬머리를 흩날리고 있는 모틸라만을 바라보았다.
* * *
사내는 마차가 저택에 가까워지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꽉 쥔 주먹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그의 분노를 나타내고 있었다.
모틸라는 그의 그런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어느새 우물쭈물하는 얼굴로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툭 건드리면 휙 하고 도망갈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그걸 눈치챈 모나한이 날 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서 모틸라는 얌전히 마차 위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결국 마차가 사내와 가까워졌고, 모나한이 고삐를 당겨 마차를 세웠으며, 사내는 언덕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틸라만을 바라보았다.
‘너, 내려.’
모나한이 무언으로 눈치를 주었고, 결국 모틸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 풀어진 얼굴을 하기도 잠시 사내의 앞에선 그녀는 완벽히 고혹적이고 우아한 뱀파이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녕.”
“안녕하지 못하겠습니다.”
“뭐?”
사내는 딱딱히 굳은 얼굴을 하고 모틸라의 인사에 대답하고는 한숨을 푹 쉬고 한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더니 말을 이었다.
“적어도-”
목소리가 생각보다 거칠게 나왔는지, 그는 입을 다물고 눈을 한번 세게 감고 떠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적어도 봄까지는 있어 주시겠다고, 하셨잖습니까.”
“…….”
“적어도, 봄까지는.”
그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에는 조금의 원망과 슬픔, 그리고 짙은 체념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