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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틸라가 생각보다 멀리서 도망 왔는지, 아니면 뱀파이어의 속도와 마차의 속도가 많이 차이 나는지 마차는 꼬박 3일을 달려야 했다.
이젠 뱀파이어 세 명이라 3일 정도를 안 잔다고 지치는 이는 없었지만, 말들은 그게 아니었으므로 로나와 모나한, 모틸라는 말들을 휴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중간중간 마차를 멈춰야 했다.
“로나를 만난 건 내 일생의 행운이야.”
저 느끼한 대사를 치고 있는 것은 모나한이 아니라 모틸라입니다.
입 속에 꿀과 버터를 듬뿍 넣은 허니 버터 브래드를 먹고 있는 모틸라의 말씀이시죠.
옆에서 모나한이 모틸라와 똑같이 황홀한 얼굴을 하고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긴 하지만.
모틸라가 합류했더니 느끼한 말을 하는 이도 둘로 늘었다.
막 마차에 가둬진 지 얼마 안 된 모틸라는 마차에서 꺼내 줄 때마다 은근슬쩍 도망가려고 눈치를 보곤 했다.
모나한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결국 쭈그러져서 모닥불 주위에 앉곤 했지만.
하지만 그러던 것도 몇 번, 그녀는 이제 식사 때마다 새로운 음식이, 간식마다 엄청난 맛의 빵이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마차에서 내릴 때마다 기대하는 얼굴을 했다.
마치 자라나는 청소년이 급식 시간 종소리에 반응하는 모습……!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릴 때마다 ‘오늘 메뉴는 뭘까? 오늘 또 뭘 먹는 걸까?’라는 얼굴.
그리고 이틀째 되는 밤.
겨울 하늘에는 별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같이 달려 있었고, 달은 아름다운 빛으로 흘렀으며, 모닥불은 탁탁탁 타오르며 불꽃을 검은 허공으로 날리곤 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에서 달콤한 허니 브래드를 먹는 모나한과 로나의 목에 음산한 붉은빛이 순간 타올랐다.
“응?”
“아.”
“앗.”
로나는 ‘갑자기 이게 왜?’라는 얼굴을 했지만, 다른 두 뱀파이어들은 알아차린 게 있는지 둘 다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두 뱀파이어를 보던 로나도 무언가 깨달은 얼굴이 되어 머리 위로 느낌표를 띄웠다.
“이거……! 이거 그거죠!”
“아, 생각해 보니 안 했네요.”
“뭐였지? ‘치명적인 척하기’?”
“예. 그거 맞습니다.”
생각해 보니 모틸라를 만나면서 ‘치명적인 척하기’를 안 했던 것이었다.
로나도 이제 뱀파이어니 그 규율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이 잊어버린 결과 경고로 목에 붉은 계약진이 떠올랐던 것이다.
“난 계약진이 안 생겼네? 왜……. 아, 그랬지.”
“주름이 생기고 나면 계약에서 해방되죠.”
“맞아맞아.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좋군.”
“네?”
“난 안 해도 돼! 좋아! 모나한! 치명적인 척해 봐! 내가 특별히 점수를 매겨 주지!”
로나는 모틸라의 말에 모나한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감상했다.
제 앞에서는 순종적이거나 유혹적, 잘생긴 표정이나 조금 뻔뻔한 표정 등등등 어떻게든 매력적인 표정만 짓는 모나한이 모틸라를 만나면서부터 오묘한 표정을 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어이없다거나, 사고 칠까 봐 걱정하는 표정, 질색하는 표정 같은 것.
로나는 왠지 모나한의 새로운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조금은 두근거리고 많이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치명적인 척을 할지 매우 기대되는군!
“하……. 진짜 하기 싫다.”
모나한도 모틸라의 놀리는 표정과 로나의 기대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찌푸려진 미간을 풀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두 손으로 몇 번 마른세수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로나는 모나한의 눈빛이 바뀌는 순간을 보았다.
타오르는 불빛에 아롱지던 선홍색 눈동자가 회색 속눈썹의 그림자가 내려앉아 짙게 가라앉는다.
그는 그대로 입가를 한번 느리게 쓸더니, 새하얀 입김을 느리게 내뱉으며 그대로 로나를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더 붉어 보이는 눈동자가 마주치고, 입가를 가리던 기다랗고 창백한 손가락이 천천히 내려가 보이는 붉은 입술.
그리고 흐릿하게, 조금은 장난기 담아 짧게 흐른 웃음.
“우웩!”
“앗.”
로나는 순간 누군가 구역질하는 소리에 모나한에게 집중했던 시선을 뗐다.
엄청나게 좋아진 뱀파이어 시력이 인간 때보다 더더욱 화질 높은 슬로모션을 만들어 냈다.
치명적이라기보다는 유혹적이었던 광경이었지만, 그건 모나한의 연인인 로나에게나 그랬던 거고.
“우웩. 진짜 속 울렁거려. 우웨엑. 안 본 눈 삽니다.”
“……닥쳐. 모틸라.”
“와, 그게 치명적? 치명적? 치명 다 죽었냐?”
“……하…….”
모틸라에게는 보고 있기 힘들었던 광경이었나 보다.
그녀는 다시 떠올리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두 눈을 비비고, 한 번 더 구역질한 다음에야 로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반짝이는 눈동자를 회복한 채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로나 차례!”
“…….”
로나는 그 반짝이는 선홍색 눈동자를 덜덜 떠는 동공으로 피했다.
돌아가는 고개가 삐걱거렸다.
“저 살면서 그런 거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요.”
“이제 자주 하게 될 거야! 연습, 연습!”
“아니 그런 건 보통 모틸라나 모나한처럼 잘생긴 사람들이 해야 좀 효과가 있는 거지.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너 뱀파이어 돼서 평범은 아니게 됐는데? 거울 안 봤어?”
“봤죠. 봤지만, 뭐랄까…….”
평범했던 갈색 머리는 물에 젖은 것처럼 진한 갈색으로, 평범했던 눈동자는 모나한과 같이 묘한 분위기가 있는 선홍색으로.
밀색이던 피부는 창백한 하얀색, 길고 날씬한 몸매는 그대로였지만 묘하게 흐르는 색기가 첨가.
그래,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제가 한평생 인식했던 외모가 있으니까요. 거울 보면 그냥 깜짝깜짝 놀란다고요. 내가 아닌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 시골에서 빵을 팔던 그 모습밖에 생각이 안 났다.
성격도 하나도 안 바뀌었는데 외모만 달랑 바뀌었으니 전혀 실감 나지도 않았고.
만약 주위에 누군가 많아서 자신의 바뀐 외모에 어떤 반응이라도 했으면 모르겠다만…….
뱀파이어가 되고 나서 1년 동안 제 옆에 있던 사람은 모나한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절대로 객관적인 사람이 아니다!
변하기 전에도 ‘귀엽다, 예쁘다, 사랑스럽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가염 버터였는데, 변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었단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실감할 수 있겠는가.
“이젠 익숙해져야지. 자자! 빨리 치명적인 척해 봐!”
모틸라는 로나의 말에도 넘어가지 않고, 어서 빨리 치명적인 척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재촉했다.
자기는 안 해도 된다고, 아주 살판났지, 모틸라!
로나는 엉엉 우는 기분이 되어 이제는 우아한 느낌이 나는 것 같은 팔을 들어 올렸다.
달빛과 모닥불에 로나의 새하얀 손끝이 오묘한 빛으로 반짝거린다.
로나는 그 손을 들어 모나한처럼 턱도 한번 쓸어 보았다.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 닦는 것 같아.
괜히 머리카락도 한번 넘겨 보았다.
……이건 샴푸 광고……?
눈썹 끝도 살랑 만져 보고, 눈도 몇 번 깜박였다.
괜히 전생에 보았던 뷰티 유튜버들이 립스틱 색깔 자랑하는 시늉도 해 보았다!
살짝 입술을 벌리고 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왔다 갔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아니, 거참…….”
“흡, 흡, 흡!”
로나는 모틸라의 ‘너 참 귀엽구나?’라는 얼굴과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는 모나한을 째려보았다.
알아! 안다구! 나 이런 거 진짜 못하는 거 안다고!
“크흡, 큽! 아니, 로나. 평소에 상당히 치명적이시잖아요. 제 심장을 쥐었다 놨다 하시잖아요. 그 로나는 어디 가고……? 푸흡-!”
“……그런 적 없는데요.”
“스스로 치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더 어색해 보이는 것 같은데. 너 엄청 예뻐졌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해 봐.”
“아니, 그러니까 실감이 안 나요…….”
로나가 축 처져서 중얼거렸다.
전생에서도 자신이 치명적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 했다고.
유혹적이라는 생각도 안 했고.
근데 인제 와서 그렇다고 해 봐야 느껴지겠냐고.
“바뀌고 나서 주위에 예쁘다고 말해 준 사람 없었어? 이런 건 주위 반응이 확 바뀌어야 실감이 나는데.”
“그동안 모나한밖에 없었거든요. 그리고 모나한은…….”
“바뀌기 전과 후가 똑같았니?”
“네.”
전이나 후나 주접만 가득했다고요.
로나가 치명적인 척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며 말했다.
“마을에 도착하면 사람들 좀 만나 보는 게 좋겠다. 특히 로나랑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들.”
“……네?”
“그런 애들이 로나의 외모에 반해 얼굴 붉히는 것 몇 번 보면, ‘아, 내가 정말 예뻐졌구나!’ 생각 하겠-”
“제가 그렇게 둘 것 같습니까?”
모틸라의 말에 웃음은 저 멀리 던져두고 굳은 얼굴이 된 모나한이 끼어들었다.
“시커먼 사내놈들이 로나에게 접근?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너도 뱀파이어가 됐으니까 이런 집착 넘치는 놈한테서 벗어나서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자! 엄청 예뻐졌으니까 그 정도는 해 봐야지!”
“로나는 제 애인이란 말입니다. 절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할 것-”
“내가 모나한 잡고 있을게! 걱정하지 말고 시선을 즐겨!”
“하아? 외모만 보고 접근하는 놈들을 어떻게 좋게 볼 있다고! 아니, 애초에 접근하는 놈들은 다 세상에서 말살시켜 버리겠-”
“너의 미모를 뽐내라구-!”
로나는 ‘자신은 그런 거 조금도 관심 없다’라든가, ‘애초에 사람들 눈에 띄는 거 싫다고요’라든가의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보아하니 모틸라도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모나한을 놀리기 위해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했고.
지금도 둘이 투닥거리며 싸우기 바쁘니, 원.
로나는 어느새 치명적인 척하다가 몰려왔던 부끄러움도 잊어버린 채 싸우기 바쁜 둘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밤도 늦어서 씻고 자야 할 것 같은데 저 둘을 어떻게 말려야 할지 감도 안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