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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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리는 듯이 말하는 모나한이었지만 많은 것들을 참고 있다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1년 전이라면 이때다 하고 만지작거리는 가염 버터가 멀찍이 떨어져 손가락만 톡 건드리고 떨어지고, 머리끝만 살짝 만졌다가 웃고, 겨우 입 맞추었다가 떨어져선 자신이 불쾌해하진 않는지 살펴보고.

그녀가 돋아나는 소름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면 훅 물러나서 자신은 괜찮다는 듯이 웃고.

가끔 자신이 겨우겨우 참으며 먼저 손잡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눈을 휘고.

“그래도 이젠 일상생활은 완전히 가능해졌잖아요. 천이라도 사이에 있으면 어느 정도 닿아도 괜찮고.”

“그렇죠.”

“그러니까 이제 다시 여행을 떠나는 건 어떨까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여기 몇 년 더 있어도 되는데.”

“어서 빨리 김치 레시피를 얻고 싶기도 하고.”

“하고?”

“솔직히 더 이상 빵을 둘 공간이 없잖아요.”

“……그건 그렇죠.”

모나한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둘이 장난을 친 곳은 부엌이었다.

그리고 그 부엌의 모든 그릇 위에는 빵이 한가득 쌓여 있었고.

식탁 위? 빵으로 점령된 지 오래다.

찬장 속? 둘 데가 없어서 넣어 놨다.

바닥? 빵이 든 바구니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오븐 속? 지금도 빵들이 뭉글대며 구워지고 있다!

로나의 말대로 산장 안에 더 이상 빵을 둘 공간이 없었다.

모나한의 아공간도 꽉 찬 지 오래, 모나한이 알려 준 마법으로 인해 생긴 로나의 아공간도 빵으로 꽉 찬 지 오래였다.

다름 아니라 로나가 빵을 무지막지하게 만들고 있는 게 문제였다.

전에는 체력적인 문제로 빵을 적게 만들고는 했다.

물론 아무리 많이 만들어 봤자 다 팔지 못한다는 것도 있었지만, 이젠 무한한 위장을 가졌다는 뱀파이어가 둘.

마차 한 대 크기에 가까운 아공간이 두 개.

그리고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지게 된 로나.

그녀는 그만 신이 나고 말았다.

적은 경험치라도 경험치는 경험치!

지치지 않는 체력과 인간보다는 많은 경험치를 주는 모나한!

로나는 오랜만의 레벨 업에 눈이 돌아갔다.

아주 조금이라도 차오르는 경험치 바가 얼마나 황홀한지.

그리고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모나한과 로나의 위장을 꽉 채우고도 남아서 아공간도 꽉 채워 버리고 만 빵, 빵, 빵들…….

“제빵사에서 제빵 공장으로 진화한 줄.”

“아, 그 마법 기계로 찍어 내는 공장요? 군대에 납품하는 무기는 그렇게 만든다고 듣기는 했는데……. 그래요, 검을 빵이라고 생각하면 공장이랑 비슷한 양으로 나오는 것 같네요.”

로나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하는 말에 모나한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마을 하나를 먹여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도시도 가능할지도.”

“박리다매 형식으로 가 볼까. 적은 금액으로 파는 대신 많은 양을 파는 거죠. 이젠 가능할 듯.”

“정말로 군대 납품을 노려도 될 것 같아요.”

“근데 그러다가 잡혀갈 것 같기도 해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양을 제조한다는 죄목으로?”

“제빵의 악마로 불리는 거죠.”

“일리가 있어요. 가능할 것 같아.”

로나와 모나한은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결국 서로 바라보며 낄낄 웃고 말았다.

“근데, 로나. 진짜 더 이상 아공간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빵과 빵과 빵뿐이라고요, 지금.”

“빵 때문에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웃기네요.”

“뭐, 어때요. 전 최고로 마음에 드는 시작인데.”

제빵 용사에게 딱 맞는 첫 문장이죠.

로나는 모나한의 말이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이 웃고는 짐을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했다.

2층에서 가져온 이불을 마차에 집어넣고 허리를 펴며 로나가 말했다.

“겨울에 내려가야 그나마 사람들이 집 안에서 안 나올 테니까 적응하기 쉬울 테고요.”

“그런 것까지 고려하다니, 똑똑하기도 하셔라.”

“주접 그만 떨고 짐 챙기는 거나 도와주세요.”

“하지만 아공간에 들어갈 자리가 없는걸요?”

“먹으면서 집어넣어요.”

그렇게 말하는 로나의 입으로 단팥빵이 하나 우물거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모나한은 그 모습을 보며 드디어 로나의 빵이 지겨워질 수도 있겠다고 중얼거리다가 아공간에서 꺼낸 빵의 황홀한 냄새에 역시 지겨워질 수는 없겠다고 다시 중얼거렸다.

그의 입으로도 로나와 같은 단팥빵이 우물거리며 사라졌다.

1년 동안 기본적인 관리만 한 푸드 마차를 모나한이 다시 정비하는 동안 로나는 산장에 오래 놔두기 힘든 것들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산 아랫마을에 가서 말 좀 사 올게요. 우리가 그때 팔았던 말이 그대로 있을 수도 있겠어요.”

“그 마을 꽤 커다랬으니까 아직 있을 수도 있겠네요. 다시 만나면 좀 기쁘겠다. 다녀오세요.”

로나가 모나한의 말에 손을 흔들어 주고, 모나한은 금방 갔다 오겠다며 산 아래로 달려갔다.

옛날이라면 보이지 않는 속도였겠지만, 이젠 로나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속도로 모나한이 점점 작아져 갔다.

그녀는 1년 전에 학원 도시의 빵집을 닫을 때처럼 팻말을 걸어 놓고 싶은 느낌이 잠깐 들었다가, 이곳은 그곳과 다르게 언제든 원할 때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웃었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말이 다그닥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모나한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말보다 빠르면서 타서 오는 모양이지.

“승마도 한번 배워 볼까.”

“괜찮죠. 여행하는 동안 배우면 되겠네요.”

“뭐든지 익숙한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좋네요.”

“제가 괜히 나이가 많은 게 아니죠.”

“저보다 네 살 많은 거 아니었어요?”

“오, 물론이죠. 그래서 지금은 스물다섯이랍니다.”

“뻔뻔해라.”

어느새 지척까지 온 모나한이 뻔뻔하게 콧잔등을 구기면서 웃었다.

그러고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마차와 연결하기 시작했다.

로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미리 볕에 말려 놓았던 이불을 마차 안 침대에 깔았다.

뽀송뽀송하게 말린 솜이불이 로나의 손짓에 따라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가 가득 부풀며 침대 위를 덮었다.

로나는 그 모습을 보며 뿌듯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미리 입었던 후드를 여미며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추위를 타지 않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습관이었다.

“출발할까요?”

“문은 잠갔어요?”

“조금 전에요.”

“어디부터 가 볼까요?”

“글쎄요, 이웃 나라의 북부 공작을 만나러 가 볼까요?”

“아직 그만큼 사람 많은 곳은 힘들 거예요. 작은 마을부터 들르기로 해요.”

로나가 모나한이 앉아 있는 마부석 옆에 앉고, 모나한이 익숙하게 마차를 몰았다.

절벽 안에 딱 맞게 자리해 있던 산장을 뒤로, 1년 전 그랬던 것처럼 마차가 다그닥거리며 여행길을 나섰다.

* * *

로나는 마차 위로 떨어졌던 솔방울 하나를 손안에서 굴리며 장난쳤다.

옆에서 모나한이 나른해 보이는 모습으로 마차를 몰고 있었다.

1년 전에 여행을 떠날 때는 춥다며 마차 안으로 자신을 들여보내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추위를 타지 않은 것을 알고 있어 별말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같이 앉아 있는 이 순간이 좋다는 듯이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였다.

마부석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모나한이 입으로 길게 숨을 내뱉었다.

차가운 공기 위로 입김이 연기처럼 흐르다가 사라졌다.

로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숨결 모양을 따라 길게 입김을 내뱉었다.

눈앞에서 하얀 김이 흐려졌다.

“이쪽으로 가면 조그만 마을이 하나 있을 거예요.”

“어떤 곳인데요?”

“제가 알기로는……. 작고, 한적하고, 조금 지루하고 오렌지 나무가 많은?”

나른한 목소리가 이야기하는 설명은 묘하게 구체적이고 감성적이었다.

모나한이 지금까지 다른 곳들을 설명한 것과 다른 느낌이라 로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좋아하는 곳이에요? 지금까지 물어봤을 때와는 다른 설명인데.”

“사실 저는 가 본 적은 없지만, 설명을 많이 들었거든요.”

“설명요? ……아, 모틸라?”

로나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이 구겨지는 모나한의 미간에 눈치채고는 모틸라의 이름을 읊었다.

모나한은 결국 그 이름을 들었다는 표정이 되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맞아요. 모틸라. 모틸라의 고향일걸요.”

“잘하면 모틸라를 만날 수도 있겠네요.”

“으음……. 아마도요.”

모나한이 기대감과 떨떠름함이 반쯤 섞인 이상한 표정을 하고 대답했다.

“이상한 표정이네요.”

“네……. 만나고 싶지만, 만나고 싶지 않아요.”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나 보죠?”

“로나 씨는 언제나 보고 싶-”

“가염 버터 하지 마요.”

로나가 모나한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생기면 생성되는 버터를 잘라 내었다.

그러나 모나한은 그 칼질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한 번씩 느끼하게 해 줘야 관계의 질이 올라가지 않을까요?”

“좀 낮출 필요가 있어 보여요.”

“전 높이고만 싶은데. 이왕이면 깊이도 조금…….”

“아, 흙으로 덮어 버리고 싶다는 의미죠? 평평하고, 아- 무 것도 없이.”

“더 깊이 파 들어가고 싶다는 뜻이죠. 깊고 깊게, 전- 부.”

모나한이 로나가 한 대사의 운율을 똑같이 따라 하며 말했다.

로나가 모나한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모나한은 뻔뻔하게 코끝을 찡긋거렸다.

로나가 그 괘씸한 주름을 검지로 펴 주려는 찰나, 갑자기 코끝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맡아졌다.

“우와……. 피 냄새. 가까운 데에서 싸움이라도 난 것- 아니지. 이거 동족의 냄새인가요?”

아직 피 냄새=동족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세워지지 않아 살짝 늦게 깨달은 로나가 피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모나한도 냄새를 인식한 즉시 능글맞았던 표정을 딱딱히 굳혔다.

“맞아요. 싸움이 났으면 음식 냄새가 났겠죠. 뱀파이어 같은데.”

“지금 가까워지는 거죠? 점점 진해지는데.”

“그렇네요. 마차 좀 멈출게요.”

모나한이 고삐를 당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길 한가운데에 멈추었다.

다행히 아무도 오가지 않는 한적한 시골길이라 방해될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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