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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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곳에 고집이 센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었는데, 뱀파이어가 된 이후에도 저럴 줄이야.

아니,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사람이 바뀌진 않겠지만! 괴로우면 좀 참고 가만히 있으라고!

“별빛이 엄청나게 눈부시더라고요. 낮에는 도저히 못 나오겠더라. 불탈 것 같아.”

“집 안에 좀 있어요!”

“몸에 곰팡이 피는 느낌이었다고요.”

“지금 눈물 줄줄 흐르시잖아요! ……콧물이 왜 녹색이에요.”

“허브즙을 적신 솜을 콧속에 박았거든요.”

로나가 코 밑에 흐르는 물을 쓱 닦으며 말했다.

“어떻게 나왔나 했더니!!”

“제 지능의 승리인 거죠.”

“제발 한 번만 져 주시면 안 될까요. 그냥 방 안에 누워 있으면, 아니 집 안에라도 있으면!”

“이제 밤마다 산책해서 밖의 감각에 익숙해져야지!”

“제 말 하나도 안 들을 거죠!?”

“네!”

로나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옆에서 모나한이 속이 터져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밤 산책을 하는 로나의 뒤를 터덜거리는 걸음걸이로 뒤쫓아 갔다.

등 뒤로 모나한의 그런 모습을 전부 느끼고 있는 로나가 웃느라고 들썩거리는 어깨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모나한을 뒤돌아봤다.

뱀파이어가 되면서 진해진 색감의 갈색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흩날렸다.

밤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럴 만한 정신이 없었던 걸까.

로나는 평소처럼 땋은 머리가 아니었다.

풀어져 흩날리는 갈색 곱슬머리.

모나한은 저 색을 어디선가 보았다고 생각했다.

실리의 저택에서, 둘이 같이 자던 방에서, 진한 녹색 이불 위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짙었던 갈색.

흐트러지며 젖어 들었던 갈색.

그 물먹은 갈색이 밤바람에 흩날려, 달빛과 별빛 아래 반짝거리고.

자신과 똑 닮아진 선홍색 눈동자에서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들이 아롱져서 떨어져 내리고.

그러나 그를 돌아보는 얼굴은 환하게 웃고만 있고.

“모나한이 보고 싶었는걸요.”

“……네?”

“보고 싶어서 빨리 나왔다고요.”

아직도 웃음기가 섞인 잘게 반짝이는 목소리가, 활짝 올라간 입꼬리와 눈물이 떨어지는 휘어진 눈가가.

모나한은 그녀가 외모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웃는 얼굴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눈동자 안에 든 감정들이-.

“저도 보고 싶었어요.”

“정말요?”

“아주아주 정말요.”

허브 향이 가득한 푸른 정원에서, 별빛과 달빛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에서, 로나가 모나한을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이 그녀가 바뀌기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서, 모나한은 그대로 웃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종아리 부근에서 허브들이 스쳐 지나가 달콤한 향기를 짙게 뿌리고, 모나한이 로나의 앞에 섰다.

로나의 젖은 갈색 머리카락 끝을 창백한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만지다가, 그가 정말로 기다렸던 것을 본다.

일주일 하고도 3일.

그리고 선홍색 눈동자의 로나.

밀 빵 냄새는 사라지고, 비릿한 피 냄새가 흐르게 되었지만, 모나한은 조금도 역겹지도 싫지도 않았다.

모나한은 평생을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평생 그러고 싶은 대로 로나의 이마 위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톡 하고, 작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코끝이 닿고, 모나한이 장난치듯이 고개를 움직여, 닿은 코끝을 간지럽힌다.

잘게 웃는 소리가 둘 사이에 자글거리다가, 웃음을 흘렸던 입술이 닿았다.

일주일 하고도 3일.

모나한은 그토록 로나가 그리웠노라고 속삭이고, 닿은 입술이 간지럽고.

로나가 자신도 그랬다고 속삭이고, 닿은 입술이 간지러웠다.

누가 웃는지, 둘 다 웃는지.

작은 웃음들이 흐르다가, 입술을 간지럽히고.

둘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허브들이 종아리를 스치고, 하늘 위에서 달빛과 별빛이 찬란히 반짝이는 둘밖에 없는 조그만 정원 안에서.

* * *

“킁, 킁킁! 아, 빼 버리니까 너무 시원하다.”

“초록색 콧물이 흐를 때마다 웃겼죠.”

“사실 허브즙을 낼 때부터 웃겼다고요.”

로나가 초록색 솜을 코에서 빼 버리며 말했다.

그녀는 아직 매캐한 코를 몇 번 킁킁거리고는 ‘그래도 버틸 만해졌다’라고 말하며 코끝을 몇 번 매만졌다.

뱀파이어가 된 지 2주일 즈음 지났을 때, 로나는 드디어 코에 넣었던 솜을 뺄 수 있었다.

그즈음에 가서는 다른 감각들은 모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였다.

“생각보다 적응이 빨리 되네요.”

“……보통은 방 밖으로 나오는 데 한 달은 걸린다던데. 2주 만에 방이 아니라 집에서 나가셨네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게 얼마나 힘들던지, 아휴. 관절에 곰팡이라도 피는 줄 알았네.”

“좀 쉬어요, 좀!”

“빵도 안 만들고 일도 안 하는데, 이게 쉬는 거죠.”

“아냐! 쉬는 건 제 시중을 받으면서 침대에서 꼼짝 안 하는 거라고요! 제가 원하는 건 익숙해질 때까지 로나가 방 안 침대에서 띵가띵가 하는 거였는데!”

“침대에만 누워 있으면 허리 아파요.”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도 스무 살이었고, 이젠 뱀파이어가 되어서 완전 건강하다 못해 날아다닐 텐데 허리는 무슨!”

로나는 모나한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어깨를 휙휙 돌리면서 “그동안 너무 심심했어.”라고 중얼거렸다.

“뭐가 그리 급하시고, 왜 가만히 있지를 못 하시는 건지.”

“그것이 한국인의 종특! 뼛속까지 효율 충이 아닐까…….”

“이젠 시간도 많으신데 좀 천천히 생활하는 게 어때요?”

“빵 만든 지 너무 오래돼서 빵 좀 만들어야겠어요. 이젠 코도 익숙해졌으니까 만들 만하겠지.”

“로나? 제 말 듣고 있어요?”

“힘이 세진 것 같던데 반죽하는 게 훨씬 쉽지 않을까? 난 이제 튼실하고 유연한 어깨를 가지게 되었으니까. 내 몸에 대해 파악도 할 겸 지칠 때까지 만들어 볼까.”

“로나? 그러다가 일주일 내내 빵만 만들겠어요. 로나?”

모나한은 빵을 만들러 부엌으로 가는 로나의 뒤를 따라갔다.

막 뱀파이어가 되어 감각에 적응된 이들은 보통 자신이 얼마나 빨라졌는지, 힘이 얼마나 세졌는지 무언가를 얼마나 더 쉽게 죽일 수 있게 되었는지 따위를 알아보곤 했다.

혹은, 뱀파이어가 되면서 쓸 수 있게 되는 기본적인 마법이나 이능력에 관해서 탐구하든가.

그에 반해 로나라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빵을 많이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러 부엌으로 향했다.

모나한은 그 점이 정말 로나답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밥을 못 먹어서 한식도 만들고 싶은데.”

“배는 안 고프지 않아요? 상당히 고위 마수의 피를 마셔서 쉽게 고프지는 않을 텐데.”

“으음. 배고프지는 않은데, 그동안 꼬박꼬박 하루 세끼 먹었는데, 갑자기 안 먹으니까 이상한 기분이라서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고추 꺼내실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거 꺼내면 진짜 죽겠죠?”

“다시는 이 집 안에 못 들어오게 될 수도 있어요.”

“한식은 매운맛이 생명인데. 하……. 다시 한식 없는 삶이 되고 말았다.”

“해금된 한식 재료가 쌀, 고추, 고추장, 복분자주가 다잖아요. 쌀밥은 드실 수 있겠네요.”

“우선 쌀부터 씻어야겠네요. 계란말이 만들까.”

“으음……. 무리일 것 같은데.”

“네?”

로나가 모나한의 무리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모나한은 해 봐야 안다면서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나는 모나한의 말을 몸으로 체감했다.

감각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갑자기 강해진 힘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었다.

로나는 자신의 손에 가루가 된 쌀과 만지자마자 부서진 날달걀을 보며 어이없어했다.

“유리병도 엄청나게 조심해서 들어야 했잖아요. 요리같이 섬세한 일을 하는 건 무리입니다.”

“아이고! 왜 만들지를 못하니!!”

“특히 달걀 깨는 건 진짜 힘 조절이 필요해요. 지금은 절대 무리.”

“계란말이가 먹고 싶단 말이다아아…….”

“그러니까 제가 해 줄게요. 로나는 힘 조절 잘할 수 있을 때까지 요리 금지.”

“……반죽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빵 반죽은 힘이 강해야 쉬우니까 차라리 그게 낫겠네요. 제가 밥하고 계란말이 해 줄게요. 로나는 그동안 빵 반죽 할래요?”

“후식으로 먹을 타르트 만들래요. 블루베리 타르트.”

“좋아요. ……반죽할 때처럼 힘 엄청나게 주지 말고, 우선 가장 힘을 작게 준다는 느낌으로 시작해요.”

“……식탁을 부술 수도 있나요.”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죠.”

“감각에 겨우 익숙해졌더니……. 산 넘어 산이네.”

“천천히 하시면 되죠.”

“순식간에 익숙해져 주지.”

“아휴.”

“또 이 몸이 이겨 주겠다!”

“아휴휴.”

모나한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 쉬었다.

그 한숨에 웃음기가 가득해서 로나는 키득거리다가 보관해 두었던 밀가루를 꺼내 익숙하게 계량하기 시작했다.

모나한이 충고한 대로 힘 조절을 해서 식탁을 부수는 일은 없었다.

로나는 식탁에서 티격태격하며 반죽을 하고, 모나한은 쌀을 씻어 밥을 만들었다.

로나가 하얀 쌀밥이 익어 가는 냄새를 맡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반죽에 계란 넣어 줄까요?”

“음, 네. 한 개만 풀어서 넣어 주세요.”

“알겠어요.”

모나한이 대답하며 로나가 섞고 있는 반죽 안에 노란 계란 물을 쏟아 넣었다.

어느새 그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음정도 박자도 미묘한 로나가 부르는 콧노래와 똑같은 소리였다.

“힘 조절은 어떻게 배우는 게 좋을까요? 반죽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까.”

“집 안에서 하면 살림살이 다 부수니까 밖에서 이것저것 해 보는 게 좋을 거예요. 우선은 신나게 달려 본다든가.”

“그렇네요. 속도감도 좀 익힐 필요가 있겠다.”

로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타르트지를 꾹꾹 반죽했다.

옛날에는 밀대로 낑낑대며 밀어야 했는데, 이럴 수가! 너무 휙휙 돼서 신기할 정도였다.

“아, 너무 얇아졌다.”

“힘 조절, 힘 조절.”

“네네.”

로나는 너무 얇아진 타르트지를 다시 뭉치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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