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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좀 만들어 놓도록 할까요? 제가 잠들어 있을 동안 모나한이 먹을 건 있어야죠.”
“저 사실 음식 섭취는 안 해도 아무 이상 없는데요?”
“네?”
“굶어도…….”
“네?”
로나는 어디서 헛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모나한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 앞에서 굶는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
“갑자기 제 빵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것처럼 굴지 말고 빵 달라고 빌기나 해요.”
“빵을 주세요, 주인님!”
“오냐, 천상의 맛을 내려 주마.”
“아싸!”
모나한이 장난스럽게 주먹을 쥐며 환호했고, 로나가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예 음식 재료들을 제 아공간에 조금 저장해 두는 게 좋겠어요. 아무래도 막 변한 초반에는 그런 거 신경 쓰는 것도 힘들 테니.”
“음…….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렇게까지 코가 예민해지면 다른 것에 신경 쓰기 싫겠죠.”
“사실 저는 피만 일주일에 한 번씩 섭취하면 밥은 안 먹어도 되지만……. 네, 네.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을게요.”
로나가 모나한의 말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모나한을 째려보자 그는 양손을 항복한다는 듯이 들며 하루 세끼를 챙겨 먹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로나가 표정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밀가루랑……. 모나한 이제 쌀밥도 좋아하죠?”
“아주 좋아하죠.”
“그래요. 쌀이랑……. 이것저것 아공간에 넣어 놓을까…….?”
로나가 중얼거리며 뭘 저장해야 할까 고민했다.
사실 그동안 상점 창이 있어서 요리 재료들을 저장해 놓지 않았었지만, 전생의 로나는 여러 자취생과 마찬가지로 찬장에 이것저것 비상 식품을 구비해 놓고는 했다.
그러니까 컵밥이나 스팸이나 라면 같은 것들.
그리고 어떠한 물건이 떨어지기 전에 예비로 두세 개 챙겨 놓는 습관도 있었다.
환생해서는 사라졌던 그 습관이 모나한의 말에 살금살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나한은 로나가 바닥에 늘어놓은 엄청난 양의 쌀, 밀가루, 식용유, 소금, 설탕, 버터…… 등등등을 식은땀을 흘리며 아공간에 욱여넣었다.
“저기, 로나? 제 아공간은 마차 하나 정도밖에 안 들어가요.”
“쌀이나 밀가루 같은 것들은 안 상하니까 밖에 좀 빼놔요. 넣어 놔야 할 건 버터나 우유 같은-”
“한 달도 더 먹을 양이라고요, 이미!”
“모나한의 위장을 생각하면 일주일 정도밖에 안 갈 거 같은데…….”
“로나랑 있으면 식욕이 샘솟아서 그렇지 원래는 그렇게 안 먹어요.”
“그건 모르던 정보인데.”
“로나가 해 주는 요리가 언제나 특이하고 처음 먹어 보는 게 많아서 그러는 거지, 원래 뱀파이어들은 식사 그렇게 자주 안 해요.”
“네?”
“로나의 음식이 위대한 건 그런 점이죠. 언제나 새로운 레시피인 점, 그리고 엄청나게 맛있다는 점. 그런 것 때문에 로나의 음식에 노예가 되곤 하는 거라고요.”
모나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더 이상 요리 재료를 사지 말라며 로나를 말렸다.
“스스로 해 먹는 음식이면 별 식욕 없어요. 로나가 꼬박꼬박 챙겨 먹길 원하시니까 먹긴 하겠지만…….”
“약간 식욕의 노예가 반역을 저지르는 느낌이다.”
“아무튼, 적당히 챙겨 주세요.”
“……오랜만에 충동구매, 다량 구매의 즐거움에 젖어 있었는데.”
로나는 아쉬워하며 상점 창을 결제하는 손을 멈추었다.
오랜만에 강림한 지름신이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이제 마당에 있는 허브들을 화분에 좀 옮겨 놓을까요?”
“좋아요.”
둘은 갈색 토분에 푸릇푸릇하고 향 좋은 허브들을 가득 채워 2층의 창문 없는 방으로 옮겼다.
방 안을 화분으로 가득 채웠을 때 즈음에는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가고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둘은 작은 부엌에 서서 저녁을 만들었다.
저녁을 만드는 동안, 저녁밥을 먹는 동안, 식후 차 한잔을 하는 동안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뱀파이어가 되고 나서 하고 싶은 것들도, 그것과 상관없이 그냥 하고 싶었던 것들도.
혼자 해 보고 싶은 것들이 둘이 하고 싶은 것들로 바뀌는 순간들이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은 밤.
겨울 달빛은 창백하게 집 안으로 들어왔지만, 창문 하나 없는 방은 초록색 허브들의 향으로 가득하였다.
모나한은 회색 잠옷으로 갈아입고 막 씻은 따끈따끈한 로나를 품에 안아 번쩍 들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모나한은 제 무릎 위에 앉아 갈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있는 로나의 모습에 입꼬리를 조금 올리곤 말했다.
“준비됐어요?”
“음, 네.”
“로나랑 침대 위인 데다가 로나가 제 무릎 위에 앉아 있으니까- 흐음.”
“그런 표정 저리 치워요.”
“무슨 표정인데요?”
“음흉한 표정요.”
“그럴 만하죠? 드디어 마차도 남의 집도 아닌 곳에 단둘이 있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 궁금하지 않아요?”
“제가 뱀파이어가 되겠죠.”
“에이이.”
“힘 조절도 못 하는 주제에.”
“……명령을 내려 주시죠.”
“싫은데요.”
“이런 말 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던 로나는 어디 갔죠?!”
“제 나이가 몇인데.”
“스무 살이시잖아요.”
로나는 그 말에 전생의 나이까지 합치면- 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때 서른 살 초반이었으니까, 합치면 거의 50에 가깝-.
“그러면!”
“네?”
“그러면 모나한은 몇 살인데요?”
“몰라요. 안 센 지 오래돼서.”
“아니 진짜로요. 몇 살이에요? 생각해 보니 들은 적이 없잖아.”
“전 영원한 24세인데요.”
모나한이 갑자기 매우 뻔뻔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
그 말에 로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모나한을 바라보았다.
스물네 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무리 순수한 얼굴이라고 해도 당신이 어떻게 스물네 살이라는 비양심적인 숫자를 말할 수 있어!?
상태창조차 당신을 <오래되고 집요한 미식가>라고 했었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 나이를……?”
“네 살 차가 점술도 안 본다잖아요.”
로나가 양심 어디 갔냐는 표정으로 물어보자 모나한은 뻔뻔한 낯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 대답에 로나가 더더욱 기겁했다.
“지금 제가 스무 살이라서 스물네 살을 고른 거예요?”
“네. 천생연분 하려고요.”
“와, 뻔뻔해라.”
“뻔뻔하게 웃을까요?”
모나한이 코끝을 찡그리며 물었고, 로나가 그 모습을 보다가 그거라도 하라고 말했고, 모나한이 뻔뻔하게 웃었다.
입꼬리 씨익- 눈을 찡긋- 약간 거만스럽게.
로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입고 있던 잠옷의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나한이 딱딱히 굳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로나는 그대로 단추를 몇 개 풀어 옆으로 젖혔다.
그녀는 어차피 일어날 일 빨리 끝내자는 심정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모나한에게 그 모습은-.
모나한은 자신도 모르게 로나의 드러난 쇄골을 핥듯이 바라봤다.
“오, 미친.”
“네?”
그리고 그런 자기 자신에 놀라 그대로 눈을 ‘콱-!’ 감았다.
이분은 왜 이렇게 경계심이 없어서!!
아니지. 다른 사람에겐 경계심이 넘쳐나는데 왜 나한테만 없어서!!
좋지만, 좋지만! 힘들다고요!!
“이건 불가항력이에요. 어쩔 수 없다고요.”
“네? 뭐가요?”
“젠장.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게 아니었는데.”
“갑자기 왜 이런데?”
로나는 이유를 몰라 갸웃거리며 모나한을 바라보았지만, 모나한은 로나의 셔츠를 여며 줄 생각도 못 하고 눈을 감은 채로 부들거리기만 했다.
그런 모나한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던 로나는 금세 뚱한 얼굴로 돌아가 제 드러난 목덜미를 몇 번 쓰다듬고 그 손으로 모나한의 꽉 감긴 눈주름을 톡톡 건드렸다.
“오, 젠장.”
“뭐라는 거야.”
뱀파이어의 무지막지하게 예민한 후각이 로나의 목덜미에서 풍기던 체향, 그 목덜미를 쓰다듬어 손에 묻은 체향, 그리고 그 손으로 제 눈가를 만지는-.
“저 점점 밀 빵 냄새에 흥분하는 미친놈이 돼가는 것 같은데.”
“원래부터 그런 거 아니었어요?”
“로나 씨 때문이었죠! 아니지, 로나 씨 때문 맞나? 이건 그냥 내가 변태 아닌가. 와, 제 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네요.”
“아까부터 좀 이상한데. 저 뱀파이어로 안 만들 거예요? 목덜미 물어야 하지 않나?”
“와……. 목덜미라니, 미쳤구나. 모나한.”
“진짜 이상한데?”
모나한이 방금 눈에 담았던 밀색의 뽀얀 목덜미를 떠올리는지도 모르고 로나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모나한의 둥실한 앞머리나 꾹꾹 눌러 댔다.
“안 물 거예요?”
“물어야죠, 물어야죠. 저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해요.”
“그동안 마음의 준비 열심히 한 거 아니었어요?”
“방금 그 준비가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평소에 단정한 옷을 주로 입는 로나라서 더 파괴력이 강했다.
모나한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으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평정심. 평정심’이라고 중얼거렸다.
제 긴 인생에서 여성의 목덜미가 이만한 파괴력을 가진 적이 얼마나 있던가?
뱀파이어가 되기 전 청소년이었을 때나 그랬던 것 같은데!
뱀파이어가 된 이후에는 오히려 제 목덜미로 남을 유혹하는 쪽이었지, 유혹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살려 주세요.”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어디 아파요?”
“아픈 곳이 좀 있긴 한데.”
“네!? 어디요!?”
“아뇨, 아뇨, 아니죠. 안 아파요. 네. 안 아파요.”
“아니, 정말로 어디 아픈 것 같은데.”
“후……. 좋아. 열어 놓은 지 오래돼서 좀 날아갔네요.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모나한이 셔츠를 열어 놓은 지 오래되어 아까보다 옅어진 로나의 체향에 커다란 다짐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로나의 눈에는 모나한이 혼자 이상한 생쇼를 하는 모습일 뿐이었다.
“뱀파이어 되는 일이 물론 제 일생을 확 바꾸는 큰일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긴장할 일인가?”
“방금 다른 의미로 매우 긴장했을 뿐이에요. 옛날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로나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파괴력이 강하군요.”
“아, 뭐. 그래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강해요.”
“네. 로나가 세상에서 제일 강해요.”
저를 방금 들었다가 놨죠.
모나한이 중얼거리고 한숨을 한번 길게 내쉬고, 심호흡도 한번 한 다음에 드디어 눈을 떴다.
눈 바로 앞에서 갈색 눈동자에 갈색 속눈썹을 팔랑거리는 로나가- 뽀얀 목덜미를 드러내고 갸웃거리는 로나가-.
“좋아요. 물면 되는 거죠, 물면.”
“음, 그렇죠.”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왜 평소보다 눈동자 색이 짙어진 것 같지? 배고파요?”
“오, 무척요.”
“빵 좀 먹고 할-”
“아뇨. 바로 하죠. 좋아요. 고개 살짝만 젖혀 볼래요?”
모나한의 말에 로나가 고개를 살짝 젖혔다.
밀색 피부가 유려한 선을 내며 기울여졌다.
모나한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가 침을 한번 삼키고 눈을 떴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더 한 다음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로나에게 다가갔다.
회색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리며 로나의 볼을 간지럽혔다.
로나는 그 고갯짓에 흐르는 머리카락, 벌어지는 옷깃, 드러나는 모나한의 목선-.
어? 갑자기 모나한의 심정이 이해됐어!
목덜미가 생각보다 파괴력이 강한 부분이잖아!!
로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입술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모나한이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등허리를 토닥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알고는 있었다.
목덜미를 물어서 뱀파이어로 만드는 거야 온갖 미디어와 소설 속에 나오는 장면 아닌가.
그게 매우 야하고 퇴폐적인 모습인 것도, 실제로도 상당히 은밀하고 예민한 부분인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제는 다르지!
이거 생각보다 무지막지하게 야하잖아!!
로나는 방금 모나한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꽈악-!’ 감고 속으로 외쳤다.
어느새 모나한의 가슴에 올린 손이 그의 셔츠를 꽉 움켜쥔 채였다.
모나한은 로나가 긴장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등허리를 몇 번 더 토닥였지만, 로나의 굳은 몸은 풀릴 생각을 못 했다.
그는 아예 빨리 끝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목덜미에 닿았던 입술이 벌어지고, 입 안의 뜨거운 숨이 흐르고, 날카로운 이가 섬뜩하게 닿는 것까지- 전부.
목덜미가 이렇게 예민한 부분이었던가.
아니면 지금 이 상황, 분위기가 날 그렇게 만드는 건가.
로나는 정답을 찾을 수 없는 것들에 휩싸여 모나한의 셔츠만 더 세게 쥘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날카로운 이빨이 목덜미의 얇은 피부를 파고드는 것이 느껴진다.
고통은 차라리 반가웠다.
이성을 차리게 해 줬으니까.
그러나 그 후에 오는 열감, 몸속으로 무언가 흐르는 감각, 자신도 모르게 떠진 눈.
어느새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 모나한의 회색 머리카락만 몇 번 흔들리고, 로나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모나한을 둘러 안았다.
그의 가슴 쪽 셔츠를 쥐었던 손이 이제는 등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주름이 어떻게 생긴지도, 근육이 어떻게 만져지는지도 모르겠고, 느껴지는 것은 오싹한 추락감.
그리고, 쾌락.
로나는 모나한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온몸이 추락하고, 떨어져, 시야가 점멸하고 까맣고-.
몰려오는 쾌락 사이에서 로나는 정신을 잃었다.
모나한의 등에 매달렸던 손이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