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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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와 모나한은 안내받은 방에 짐을 풀고, 방을 구경했다.

로나는 마치 전생에서 호텔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기분이 되었다.

방에 뭐가 있는지 휙휙거리면서 구경하면서 신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는 뜻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지런히 정돈된 이불 위로 몸을 던지고 싶었지만, 깨끗하게 씻고 나서 하자고 자신을 다독일 정도였다.

모나한과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정말로 전생에 한 번쯤 상상해 본 판타지 세계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자신의 능력으로 언제나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완전 고급진 마차라 잠드는 곳이 폭신 편안하다는 점.

제일 처음 마주친 도시가 판타지의 왕도를 달리는 오래된 도시이자 커다란 성이 보이는 수도라는 점.

그리고 그 수도에서 엄청나게 커다랗고 아름다운 저택에서 머물게 됐다는 점.

“가장 판타지적인 것은 저 말도 안 되는 외모의 남친인가?”

로나는 새하얀 레이스 커튼을 젖히고 아름다운 장미 정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뒤에서 남은 짐을 풀고 있던 모나한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는 것을 창문에 비친 모습으로 알아차렸지만, 로나는 혼잣말이었다는 듯이 손을 내젓고는 정원을 구경했다.

장미의 5월에 왔으면 엄청나게 아름다웠겠다는 중얼거림은 덤이었다.

“욕실이 준비되었습니다. 로나 님 먼저 모시겠습니다.”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실리의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근 후에 남이 차려 주는 진수성찬을 먹고 막 햇빛에 말린 새하얀 이불에 푹 둘러싸여서 잘 생각 없니?’라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방에서 짐을 푼 지 얼마 안 돼서 한 시종이 욕실이 준비되었다고 알려 왔다.

당황하는 로나가 모나한을 한번 바라보자 모나한은 잘 다녀오시라며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니 위험한 일은 아니겠다 싶어서 로나가 시종을 졸졸졸 쫓아갔다.

새로운 환경에 당황하기도 잠시, 실리의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근다’라는 말이 최고급 스파의 동의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나는 새하얀 대리석 욕조에서 이름 모를 허브의 향이 올라오는 물에 목욕한 후, 이름 모르지만 엄청나게 좋은 향기가 나는 향유로 피부 결을 정돈하고, 마사지를 받고, 얼굴과 머리카락 팩은 기본에 후반부에는 잠들 듯 말 듯 한 기분으로 엄청난 서비스를 받았다.

사실 로나는 딱히 귀족의 삶에 대해서 별생각이 없었다.

일반 현대인이었으니 특히 판타지 귀족의 삶을 상상할 일은 없었고, 이세계에 전생하고 나서도 평민이었으니 더더욱 귀족의 삶을 생각할 일은 없었다.

하루하루 오늘은 어떤 빵을 만들까 고민만 했지.

하지만 이 순간, 로나는 난생처음으로 ‘귀족 좋네…….’라며 감탄했다.

권력이나 엄청난 부, 신분이 아닌 스파를 받으며 깨달은 로나였다.

“마사지 쩔어.”

“행복했나 봐요? 피부가 반짝반짝 빛나네.”

모나한이 키득키득 웃으며 정말로 달걀 피부가 돼서 돌아온 로나를 보며 물었다.

평소와 다르게 시원하게 올려 묶은 로나가 깊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최고였다고 답했다.

“하……. 중독될 것 같아서 무섭네요.”

“지금 많이 즐겨 놔요. 뱀파이어가 되면 싫어지니까.”

“이게 싫어질 수 있어요?”

“몸에 신경이 너무 예민한 데다가, 인간의 손아귀 힘으로는 별 자극도 안 오거든요.”

“엄청 좋았는데…….”

로나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자, 모나한이 풀려서 평소보다 내려간 로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뱀파이어가 되면 어깨 결림이 없어지는……. 음.”

“왜요? 안 없어져요? 사실은 어깨 결림이 있어요?”

로나는 아주 중요한 걸 묻는 듯이 진지하게 말했다.

빵집을 하면서 매일 밀가루 반죽을 해 대니 로나에게 어깨 결림이란 언제나 같이 사는 삶의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

지금의 로나는 마사지를 받고 가벼워진 어깨에 감동 중이었으니, 어깨 결림이 없는 삶은 그녀가 진지해지기 충분한 이유였다.

“그게 아니라……. 어깨 결림은 확실히 없어요. 그보다는 인간의 손아귀 힘이 적다면 뱀파이어의 손아귀 힘으로는 충분히 마사지가 되겠다 싶어서요.”

“마사지를 배운 뱀파이어가 있을까요?”

있다면 한번 받아 보고 싶네요. 뱀파이어가 된 후에 말이죠.

로나가 아무리 그래도 마사지를 배우는 뱀파이어는 없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중얼거림을 들은 모나한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지금은 없겠죠.”

“아, 역시. 없군요. 밥 먹고 한 번 더 받을까……. 아쉬운데.”

로나는 모나한의 말에 살짝 아쉬워하며, 저녁 식사 시간이라며 안내하는 시종의 말에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뒤따라가며, 모나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글쎄요.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네?”

“저녁밥 기대된다고요.”

“저도요.”

로나는 모나한의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되물었지만, 모나한은 그냥 잘생기게 웃으며 저녁밥을 먹자는 소리만 할 뿐이었다.

로나는 오랜만에 자신이나 모나한 말고 다른 누군가가 해 준 밥을 먹었다.

실리와 그란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손을 흔들면서 가 버렸고, 로나와 모나한만이 거대한 식당에 앉아 식사했다.

처음에는 어색해했던 로나지만 이내 특유의 무심한 뻔뻔함과 적응력을 보여 주며 맛있게 식사를 끝냈다.

로나는 식사 전에 말했던 대로 한 번 더 스파를 즐기러 떠났고, 모나한은 시종을 불러 마사지에 대한 속성 강의를 들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였고, 지금 모나한이 가장 원하는 것은 로나의 사랑! 안정! 행복! 기쁨!

로나가 최상의 스파를 한 번 더 만끽하고 돌아왔을 때 즈음 모나한은 이미 마사지에 대한 속성 강의를 끝내고 자신도 간단한 샤워를 마친 후였다.

로나는 푹 젖어 평소보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새하얀 수건으로 토닥거리며 침대에 앉았다.

그녀는 목욕 후의 시녀가 입혀 준 엄청나게 촉감 좋은 회색 잠옷을 입은 채로 높은 발을 몇 번 동당거렸다.

“잠옷을 사야겠어요.”

“잠옷요?”

“이거 너무 촉감이 좋거든요. 실리 씨에게 어디서 샀는지 물어봐야지.”

로나가 살짝 큰 소매를 파닥거리면서 말하다가 젖은 머리 그대로 침대 위에 풀썩 엎드렸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걸맞게 진한 초록색의 두꺼운 이불 위에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멋대로 흐트러졌다.

모나한은 침대 반대쪽에서 올라가 로나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침대 구석으로 떨어진 수건을 들어 올려 엎드려 있는 로나의 머리카락 위를 덮었다.

아주 부드러운 손짓이 로나의 갈색 머리카락을 토닥이며 말려 주었다.

로나는 그 손길을 반쯤 감긴 눈을 깜박이며 즐겼다.

매일 일하던 가게가 아니라 작은 마차 안에서 장사해 본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 긴장한 것이 몰려오는지 졸음이 나긋이 쏟아졌다.

“하아아암…….”

로나는 길게 하품하고는 그대로 손을 쭈욱 뻗어 커다란 침대의 중간에 경계를 그으려다가 손에 힘을 툭 빼며 그만두었다.

풀썩하고 진한 초록색 이불이 풀썩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굳이 경계선 그어야 해요?”

“네?”

로나가 작게 “귀찮아…….”라고 중얼거리고 쭉 뻗었던 손을 다시 걷어 와 졸린 눈을 비비적거렸다.

“모나한이 옆에서 자는 거 생각보다 괜찮았거든요.”

“……네?”

전 누가 옆에서 자는 걸 싫어해서.

로나가 어느새 반쯤 잠든 목소리로 나른하게 흘렀다.

수마가 찾아와 그녀의 얇은 눈꺼풀을 톡톡 밀고 있었다.

로나는 잠들기 직전의 멍한 정신으로 말을 이었다.

“……옛날에 시골에 살 때요.”

“네.”

“빵집을 하기 전에, 부모님 집에서 살 때. 언니들이랑 같이 잤거든요. 짚 냄새가 가득한 낡은 이불에 싸여서.”

곰팡이가 슬기 직전까지 덮었던 짚들은 퀘퀘한 냄새가 흘렀고, 낡은 이불은 조금만 잡아당겨도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은 딱딱했고, 잘 닫히지 않는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가웠다.

가끔 얼굴 위로 부스러기들이 떨어지면, 천장 사이로 쥐가 지나갔다는 의미였다.

밤은 새까만 색이었고,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소름 돋았다.

지독히도 익숙하면서도, 지독히도 낯설은 밤들.

차라리 집에서 독립했을 때, 작은 빵집의 작은 방에서 혼자 잠이 들었던 순간이 더 안정되곤 했다.

비슷한 짚 냄새, 비슷한 낡은 이불, 비슷한 차가운 바람들.

어차피 낡은 시골 건물이라 잠드는 환경은 다를 바 없었지.

그러나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자신은 완전히 혼자였고,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던 일들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밤이 되곤 했다.

로나는 혼자가 편했다.

“옆에서 누가 자면 오히려 불안했거든요.”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는 입 밖에 꺼내지 않을 말들이, 눈을 감고 있는 사이 멋대로 새어 나올까 봐.

로나는 혼자가 편했다.

“잠도 잘 안 오고, 악몽이나 꾸고.”

빛 하나 없는 새까만 밤이 악몽인지, 전생의 행복한 기억들이 악몽인지 구별할 수 없었던 밤들.

로나는 혼자가, 편했다.

어차피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이야기라면, 그냥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잠들기 직전에 나른하게 흐르는 목소리였다.

과거의 힘들었던 일들을 이젠 그저 흘러간 것들이라는 듯이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

그래서 오히려 보는 사람을 걱정하게 만드는 목소리.

모나한은 침대에 앉은 그대로 로나를 내려다보았다.

로나의 졸음 담긴 갈색 눈이 몇 번 깜박인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조금은 불안한 듯이 경계선을 그으려던 손을 뻗어 모나한의 새하얀 손가락을 쥐었다.

차가운 손가락에 따듯한 손가락이 닿았다.

“근데, 괜찮더라고요.”

그녀는 차가운 체온을 느끼며 손가락을 조금 꼼지락거리면서 말했다.

“옆에 누군가가 같이 자는 걸 알고 있는데도, 괜찮았죠.”

별로 차갑지도 않았고, 좋은 냄새도 났고, 이불은 포근했고.

잠은 달콤했고, 낮게 들리는 목소리는 따뜻했으니까.

어떤 비밀들이 새어 나가도 괜찮을 밤.

“그럼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자도, 괜찮겠죠.”

로나는 어떤 날에 그랬던 것처럼 모나한의 동그란 손톱 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명령은-”

모나한의 목에서 붉은색이 빛나고, 로나의 입술 사이로 주문이 흘렀다.

첫 번째 주문보다 더욱더 나른한 목소리로.

“저를 만질 때 힘 조절 아주 잘되기.”

그리고 조금의 장난기를 담은 목소리로.

“……제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래요? 힘 조절이 잘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할지도 모르는데.”

“처음을 마차에서 할 수 없다면서요.”

로나가 그대로 키득이며 몸을 움직여 녹색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짙은 녹색의 베개 위로 물에 젖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흩어진다.

그 사이에서 로나가 잠에 둘러싸여 나른하게 웃었다.

그럼 남의 집에서도 할 수 없겠네-.

조금의 놀림을 담은 목소리, 조금 약 올리는 목소리, 조금 장난기를 담은 목소리.

그녀는 마치 자신의 표정이 세상에서 가장 얄밉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다.

자신이 마치 가장 얄미운 짓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굴었지.

악동이나, 작은 악마나, 얄미운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야.

녹색 이불 속에 파묻힌 물먹은 갈색이 얼마나 유혹적인지도 모르고.

잠기운 담긴 눈이 나른하게 접히며 동그랗게 웃음 짓는 것도 모르고.

살짝 빨개진 볼과 동그란 코끝이, 올라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이가, 살짝 느려진 목소리가.

괜찮다는, 그 말이.

모나한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밀색의 동그란 이마에 새하얀 이마가 닿고, 물젖은 갈색에 물젖은 회색이 닿고.

자신이 얼마나 유혹적이었는지도 모르고 잠들어 버린 로나에게, 모나한이 입 맞췄다.

떨어지는 창백한 입술에 조금의 한숨이.

“이렇게 달콤하게 굴어 놓고, 잠들어 버리는 거예요?”

조금의 웃음이.

모나한은 엎드려 잠든 로나를 들어 그녀가 매일 밤 잠들었던 바른 자세로 만들어 주었다.

흐트러진 갈색 앞머리를 정돈해 주고, 녹색 이불을 따뜻하게 덮어 주고, 볼을 몇 번 쓰다듬고.

경계선을 그었던 마차의 그날 밤, 새하얀 이불을 만졌던 손끝보다 더 부드럽게.

그동안 그토록 원했던 것만큼.

“잘 자요, 로나.”

부드럽고 온화하고, 평온하고 평화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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