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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 수도에 있는 뱀파이어들은 다른 뱀파이어들의 위치나 행동들을 간단하게 기록하거든요. 뭐랄까……. 인간들로 치면 관공서 같은 거죠.”
“인간들에 비하면 완전 헐렁해. 그냥 서로 소식은 알고 지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거니까.”
“정확한 정보라기보다는 뱀파이어들끼리의 소문을 모아 놓은 것에 가깝습니다. 누가 어디 있다더라, 어디서 봤다. 어떻게 살더라- 뭐, 그런 것들을 모아 놓은 거죠.”
“자기가 알아서 말하러 오는 애들도 있긴 한데, 사실 다들 혼자 놀기 바빠서……. 깨어난 지 10년 만에 어슬렁거리면서 오는 애들도 있고, 자기 전에 얼굴 한번 보러 왔다는 뱀파이어도 있고…….”
이제 뱀파이어가 될 거니까 간단한 건 알아 두면 좋으실 것 같아서요.
모나한이 그렇게 말하면서 서류 하나를 넘겨주었다.
그건 아주 간단히 신상에 관해 기재할 수 있는 서류였다.
“간단한 사진하고……. 그냥 쓰고 싶은 것만 쓰면 돼. 신경 쓰이면 뱀파이어가 된 이후에 써도 되고.”
“생각보다 체계적이네요.”
“인간 사회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걸? 우선 종족 수가 적기도 하고, 오래 사는 이들이 많으니까.”
“으음…….”
“새로운 정책도 상당히 느리게 도입되는 편이야. 그 서류 원래 있긴 했는데, 사진을 넣는 건 이번에 새로 생긴 거야. 내가 그란을 뱀파이어로 만들면서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아하.”
“새로 생긴 뱀파이어를 소문으로만 알리다 보니까 이상한 오해가 많이 생겨서……. 짜증 났거든.”
나는 쇼타콤이 아니라고…….
실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쇼타콤요?”
“그렇다니까!? 그란의 나이만 보고 쇼타콤이니 뭐니! 얘가 어딜 봐서 어린 소년이니?”
로나는 실리의 말에 옆에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있는 그란을 바라보았다.
소파에 뒷머리를 비볐는지 곱슬거리는 검붉은색 머리카락이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긴 앞머리 사이로 마주친 황금색 눈동자가 느긋하게 휘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소년미는커녕 오히려 나른한 중년미가 느껴지는 사내였다.
“제가 좀 노안인지라.”
그란은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몇 살에 뱀파이어가 된 건데요.”
“몇 살일 거 같아요?”
“……서른넷?”
“와우.”
그란이 로나의 말에 웃으며 목덜미를 느긋하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으음-” 이라며 뜸을 들이더니 장난기를 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내려 주세요.”
“……스물일곱?”
“거기서 열 살만 더요.”
“……네?”
“하하하하.”
“아니, 잠깐만. 열일곱 살이에요?”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는요. 지금은 열아홉 살이죠.”
“……나보다 어려.”
“아, 그런가요? 그럼……. 누나?”
입술을 씨익 끌어올리며 웃는 얼굴과 수염 난 턱을 살짝 매만지는 손, 느긋한 웃음과 여유로운 분위기.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열아홉 살은 절대, 절대, 절대 아닐 것 같은 외모!
로나는 순간 누나라는 단어가 이렇게 어색한 사람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그 단어 정말 안 어울리네요.”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나이도 얼굴하고 안 어울리고.”
“그 말도 많이 들어요.”
하하하- 낮게 웃는 목소리가 동굴 속처럼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실리가 엄청나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지!! 난 쇼타콤이 아니라고! 진짜 억울한 건, 얘랑 연애하고 나서야 나이를 알았다니까!?”
“성인이라고 했잖아요.”
“그래! 서른은 넘는 줄 알았다고!”
“흐음.”
“꼬시기는 얼마나 잘 꼬시고, 능글맞기는 얼마나 능글맞은지! 연애 500번은 해 본 거 같은 사람이라 나도 잠깐 만나서 놀 생각이었는데……!”
“첫사랑, 첫 연애인데요.”
“그렇다니까! 말이 되니!?”
“제가 열심히 잘 숨긴 거죠. 많이 긴장했습니다.”
“어찌나 잘 숨기던지! 할 거 다 한 다음에 알았다니까!? 뱀파이어인 것까지 알리고 나서 알았어!”
근데 다른 놈들은 내가 열일곱 살짜리 소년을 꼬셨다는 소리나 하고!!
실리는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란은 그런 실리의 허리 즈음을 부드럽게 감싸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간지럽게 비비며 말했다.
“너무 화내지 마, 응?”
“이것 봐! 이러니까 내가 안 억울하겠냐고!!”
그 모습이 너무나 여유 넘치는 사자 같아서 로나는 별말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여러모로 반전미 넘치는 커플인 듯싶었다.
로나가 서류를 기입하고 넘기자 실리는 대충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은 내일 사진사를 불러서 찍어 줄게.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아, 잘 만한 곳은 있는데-.”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근 후에 남이 차려 주는 진수성찬을 먹고 막 햇빛에 말린 새하얀 이불에 푹 둘러싸여서 잘 생각 없니?”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
로나는 훌륭히 넘어갔고, 실리는 뿌듯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한두 번 꼬셔 본 솜씨가 아닌 듯싶었다.
“둘이 같은 방이면 되지?”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어차피 저택에 있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동족이 있는 곳에서 허튼짓할 생각은 없는 모나한이 로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마차와는 다르게 다른 침대, 다른 방에서 잘 수 있으니 로나가 각자 자자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모나한의 시선을 받은 로나는 무언가 생각하듯이 눈을 데굴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괜찮겠죠.”
“그래? 그럼 침대 넓고 욕실이 좋은 방으로 줄게. 거기가 쉬기 편할 거야.”
“감사합니다.”
“뭘, 이제 같은 종족이 될 건데 이 정도 즈음이야.”
실리는 안내할 사람을 불러 주겠다며, 여기 머물 동안 그를 시종으로 쓰라는 말도 덧붙였다.
로나와 모나한은 시종을 따라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었다.
시종은 잘 교육받았는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적당한 거리에서 안내했다.
그 프로페셔널한 등 뒤로, 로나는 아직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보며 구경했고, 그런 로나를 모나한이 빤히 바라보았다.
“괜찮겠어요?”
“뭐가요?”
“저랑 한방 쓰는 거요.”
“……? 지금까지 마차 안에서 같이 잤잖아요.”
“그렇긴 했지만……. 하긴, 오늘 밤도 명령하고 자면 되긴 하죠.”
“네. 그럴 거예요.”
로나는 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모나한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불편해요?”
“네?”
“다른 방에서 잘까요? 저는 같이 수다 떨다가 자는 거 나쁘지 않았거든요.”
모나한이 로나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아가씨는 자신이 올려다보는 표정이 얼마나 귀여운지 알고는 있는 건가?
갈색 땋은 머리가 흔들거리고, 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올려다보고, 묘하게 삐죽 나온 입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고는 있는-.
“불편하면 어쩔 수 없죠. 실리 씨한테 가서 다른 방을 달라고-”
“빠르기도 하지-”
모나한이 잠깐 침묵한 걸 불편하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로나가 몸을 휙 돌려 응접실로 돌아가려 했다.
모나한은 그런 로나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돌렸다.
“저 아직 대답 안 했어요.”
“침묵하길래 불편한 줄 알았죠.”
모나한은 그 말에 반사적으로 혹시 생긴 오해에 로나가 상처받았을까 봐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나는 평소와 같은 맑은 눈동자로 모나한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긴, 이런 거로 상처받기보다는 그냥 ‘그렇구나’라고 생각하는 성격이긴 하지.
모나한은 왠지 모를 아쉬움에 작은 한숨을 쉬었다.
“싫을 리가 없잖아요.”
“싫을 거라곤 안 했어요. 불편할 거라고 했지.”
“불편할 리가 없죠.”
“불편할 수 있죠. 애인인 성인 여성이 같은 침대에 자는데, 손도 못 대잖아요.”
“……그, 그건.”
“안 불편해요?”
“안 불편하다고 하면 제가 이상한 놈이 되잖아요!”
“정답!”
로나가 피식 웃으며 밝게 말했다.
“불편해요! 엄청나게 불편합니다!”
“알았어요. 각방 써요.”
“싫어요! 그렇게 단호하고 깔끔하게 말하지 마세요!”
모나한이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외치고는 한숨을 한 번 더 짙게 푹 내쉬었다.
“저도 좋아해요. 로나랑 수다 떨면서 자는 거요. 하지만…….”
“하지만?”
“솔직히 그걸 수다라고 할 수 있어요!?”
모나한이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잘생긴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눈꼬리를 아래로 내린 채였다.
“로나는 머리만 대면 잠들잖아요! ‘잘 자요’가 대화의 끝이잖아요!”
“어, 음, 음.”
“어제도 제가 ‘로나 씨, 오늘 하루도 즐거웠어요.’라고 했는데, 숨소리 고롱고롱거리면서 잠들었던데!”
“아, 음, 음.”
“뒤척이지도 않고 아주 바른 자세로 꿀잠을 주무시던데!”
“오, 음, 음.”
“그 신음 소리는 무슨 의미예요!?”
“……할 말이 없다고요.”
로나가 ‘이걸 어떡하지?’라는 표정으로 눈을 데굴 굴리면서 대답했다.
모나한의 말대로 로나는 머리만 대면 자는 타입인지라 사실 침대에서 수다를 떨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그래도 옆에서 자는 거 좋지 않아요? 그, 뭐랄까. 모나한은 제 숨소리만 들어도 좋잖아요!?”
“그건 무슨 자신감이래!? 사실이지만!”
“……내가 말했지만 긍정 받으니까 매우 부끄럽다.”
로나가 방금 뱉은 말을 후회하며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 모습을 보며 모나한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말했다.
“숨소리만 들어도 좋답니다. 가게에서는 잠자리가 익숙해서 새근거리면서 잤는데, 마차에서는 힘들었는지 코를 고시던데, 고롱거리는 소리가 매우 귀여웠죠.”
“응아아아아악!”
“좋아요. 매일 밤 절 두고 자 버리는 로나에게 복수도 했으니 이제 또 기쁜 마음으로 같이 자러 가 볼까요.”
“뭐가 ‘좋아요’예요!”
이제는 로나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고.
“어, 아, 오, 음, 음.”
모나한은 로나가 했던 이상한 신음 소리로 화답했다.
“무슨 뜻이에요!?”
“할 말이 없다고요.”
이번엔 모나한이 눈을 한번 데굴거리고 말했다.
다른 점이라면 로나는 진짜로 당황한 표정이었고, 모나한은 진짜로 뻔뻔한 표정이었다는 점.
지금까지 계속 그랬던 것처럼 입꼬리 씨익, 코끝 찡긋.
“난 모나한의 뻔뻔함은 절대 따라잡을 수 없을 거야.”
“오, 포기하지 말아요, 로나. 사랑하면 닮는다잖아요.”
둘은 티격태격하며 복도를 걷다가 드디어 그들의 방에 도착했다.
문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고, 곧이어 서로에게 장난치듯 티격태격하는 그림자 두 개가 방 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