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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자리를 좀 피해서 이야기하죠. 어차피 실리가 여기 빵을 전부 샀으니까.”
“어, 좋아.”
실리가 고개를 끄덕였고, 로나는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에게 빵이 전부 팔렸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투덜거리면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들도 실리의 ‘여기부터 저기까지, 전부 다- 살래’라는 대사를 들은지라 순순히 물러났다.
로나와 모나한은 실리라는 뱀파이어와 그 옆에 있던 남자 뱀파이어까지 마차에 태우고 실리가 안내하는 주소로 마차를 몰았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귀족 저택들이 모여 있는 구역의 한 저택이었다.
옷이 비싸 보이더니 역시 두 뱀파이어는 귀족인 듯했다.
하긴, 모나한도 뱀파이어들은 귀족 사회에 섞여 있을 확률이 높다고 했었고.
그들은 뱀파이어들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저택은 중세 판타지의 전형적인 귀족 저택이었다.
실리와 다른 뱀파이어의 색인 검붉은색과 황금색이 메인으로 치장된 우아하고 고풍스럽지만 묘하게 퇴폐적인 저택이었다.
로나는 은근히 뱀파이어인 티가 난다고 생각하며 처음 수도에 들어왔을 때와 같이 ‘오오! 판타지!’라는 기분이 되어 저택을 구경했다.
전생에는 한국 도시에서, 현생에서는 평민으로 살아왔기에 이러한 풍경을 직접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딱히 ‘지금 열심히 구경하고 있다’라는 모습을 감출 생각도 없었기에 로나는 대놓고 이곳저곳을 관광하는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응접실에 도착하고 나서 자리에 앉자 당연하게 자신의 빵이 포함된 티 세트가 차려졌다.
그 티 세트조차 아름다운 새하얀 도자기에 금박을 하나하나 입힌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티 세트였다.
로나는 자신의 몫으로 내밀어진 찻잔을 들어 올리며 감탄했다.
“오오오. 저 지금 ‘저 지금 수도 문물을 처음 접하는 시골 소녀’가 된 기분이에요.”
“그거 사실 아닌가요?”
“아, 그렇군요. 사실이네요.”
그녀가 모나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실리가 우아한 손짓으로 방 안에 대기하는 시녀들을 내보냈다.
시녀들이 나가고 나서 복도 밖에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모나한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과 있는 동족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불문율은 어디다 버려두고 접근했습니까?”
“으음……. 그렇긴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예의잖아요. 그리고 당당하게 빵을 전부 사 간다니. 아주 눈에 제대로 띄는 짓만 하셨네요.”
모나한이 기분이 나쁘다는 듯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말했다.
로나는 관광하던 기분으로 방 안을 둘러보던 것을 그만두고 모나한을 바라보았다.
뭐지, 싸우는 건가.
“미안. 사실 너 있는지도 몰랐어.”
“하?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피 냄새가 이렇게 진동하는데, 무슨-”
“빵 냄새가 너무 맛있게 나서.”
“…….”
“피 냄새? 그런 것 따위는 맡아지지도 않았다! 그저 엄청나게 달콤하고 맛있고 고소하고 천상의 향기에가까운무언가가내코를감싸도돌아서내정신을갉아먹고나를황홀하게하여-”
실리가 갑자기 로나의 빵을 찬양하는 랩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유혹, 천사의 숨결. 향기만으로 나는 홀려 버렸고, 가까이 다가가자 점점 보이는 황홀한 자태. 동그란 갈색과 새하얀 설탕. 사이사이 흐르는 잼과 눅진눅진한 치즈-”
로나가 그녀를 말려 보라고 말하려고 모나한을 바라보았을 때, 모나한은 실리의 말을 들으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실리의 옆에 앉아 있는 남자 뱀파이어도 마찬가지였다.
“페이스트리의 아름다운 레이스와 버터의 향기,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천국의 광경에 나는 홀려 뱀파이어의 역겨운 피 냄새 따위 한 톨도 코에 들어오지 않았고, 너의 얼굴 따위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나는 네가 있는지도 몰랐다!”
실리는 당당하게 말했고.
“그럼 어쩔 수 없죠!”
모나한이 쿨하게 받아들였다.
방금까지 화냈던 주제에 그래도 되는겨?!
로나는 이제 모나한이 티 테이블에 있는 자신의 빵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랑하는 모습과 다른 두 뱀파이어들이 진지하게 감탄하는 얼굴로 감사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세계로 전생했더니 내 빵이 세계관 최강자!?
로나는 오랜만에 현실 감각이 저 멀리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뱀파이어들을 말리려고 손을 뻗었다가 다시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가, 다시 내리고 이내 포기했다.
진지하게 저기 끼어들기 싫다.
알아서 찬양 끝나면 말 걸겠지, 뭐.
당황했던 로나의 얼굴이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바뀌고, 그녀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전부 소음으로 분류한 뒤 휘황찬란한 응접실을 다시 관광했다.
와! 천장까지 그림을 그려 놨잖아! 대단해!
와! 커튼이 하나하나 짠 레이스잖아! 대단해!
와! 카펫의 자수가 엄청나게 정교하잖아! 대단해!
로나가 응접실을 천천히 공들인 완벽한 구경을 끝냈을 때 즈음, 그녀는 제 주위 소음이 사그라들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그린 듯한 얼굴로 뱀파이어들을 돌아보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끝났나요?”
“으, 응. 미안. 너무 훌륭한 빵이라서 신나 버렸어.”
“그, 음. 죄송합니다. 로나 씨 빵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에 신나서 그만.”
“딱히 화난 거 아닌데요.”
“웃는 얼굴 무서워…….”
“응접실이 참 예쁘네요. 저택도 멋있었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구경하시옵소서.”
“딱히 됐어요. 이제 질렸어.”
“그, 음.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지만, 테이블을 보니 내 빵으로 뱀파이어들을 지배한 듯싶다.
그릇의 빵들은 부스러기 한 톨 없이 깨끗이 비어 있고, 찻잔에 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로나는 ‘이 미천한 식욕의 노예들!’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무튼! 이제 됐어요. 전 로나예요. 모나한이 뱀파이어인 건 알고 있고, 모나한이랑 연애하고 있고, 모나한이 절 뱀파이어로 만들 예정이에요.”
로나는 더 이상 변명은 듣기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젓고는, 자신의 소개와 알고 있는 진실과 모나한과의 관계와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이야기했다.
한 문장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완벽한 설명이었다.
실리는 그 완벽히 요약된 문장에 잠깐 당황했다가, 그거면 충분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과 옆에 있는 남자를 소개했다.
“어, 난 실리야. 이쪽은 그란. 내 남편.”
“안 그래도 못 보던 얼굴이다 싶었더니. 새로 뱀파이어로 만든 사람입니까?”
“맞아 맞아. 인사해.”
“안녕하세요오.”
그란은 마치 바람둥이 사자를 인간화시키면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모습이었다.
검붉은 곱슬머리를 단발로 덥수룩하게 기르고, 시원하게 찢어지며 올라가는 입꼬리에 더더욱 그런 분위기를 냈다.
둘이 붙여 놓으니까 뭔가 뒷골목 여자 보스와 능글맞은 부두목 같았다.
“그란입니다아아. 2년 전에 뱀파이어가 된 막내예요.”
느긋하게 늘어지는 굵은 목소리가 묘한 매력이 있었다.
“막내라기보다는 제일 베테랑 같은데요.”
“그런 말 많이 듣고는 하죠. 뭔가 여유 있어 보인다는 말.”
그란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동자가 거의 사라지듯이 부드럽게 접히는 눈웃음을 지었다.
자글거리게 접히는 눈가의 주름이 시원하면서도 묘하게 야살스러운 사내다.
“성격도 상당히 느긋한 편이라서요.”
“맞아. 게으름뱅이라구.”
실리가 그란의 허벅지를 찰싹찰싹 두드리며 투덜거렸고, 그란은 “아야, 아야야.”라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받더니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그 모습이 정말로 능글맞은 사자와 똑같아 보였다.
모나한은 그런 실리와 그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알릴 사항도 있고, 물어볼 것도 있는데, 마침 잘됐네요.”
“으응?”
모나한의 굳은 얼굴에 실리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모틸라가 주름이 생겼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모나한의 말은 조금 빠르게 흘러나왔다.
가장 하기 싫은 일을 제일 먼저 해치워 버리는 직장인 같기도 했고, 혹은 가장 아픈 이야기를 억지로 덤덤히 내뱉은 사람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만큼 슬픈 말이라 느긋했던 실리도 얼굴을 딱딱히 굳히며 그란의 옆에 늘어져 있던 몸을 세웠다.
“그 애가?”
“눈가에 주름이 생겼다면서 찾아왔더군요.”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인데?”
“아직 한 달이 안 지났습니다.”
상당히 빨리 알리러 왔네. 잘했어.
실리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 안을 손짓해서 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어디로 간지 알고 있어? 혹시 사고를 치고 다니면-”
“그러진 않을 겁니다. 사랑했던 것들을 돌아보러 간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네. ……기분 나빠 하지는 마. 주름이 생기면 폭주하는 뱀파이어들이 한둘이어야지.”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폭주하기도 했고.”
“어?”
“저한테 해서요. 심하지도 않았고, 제가 말리기도 했고요.”
“……정말 다행이네.”
실리는 안심했다는 듯이 가슴께를 쓰다듬으며 한숨 쉬었다.
“알다시피, 죽을 때가 되면 사고를 치는 뱀파이어들이 있어서……. 모틸라는……. 뭐랄까…….”
“사고를 많이 쳤죠.”
“맞아. 뱀파이어와 관련된 사고는 아닌데, 이상한 사고를 많이 쳐서.”
“왜 세 나라의 왕자들을 다 꼬셔서 자길 두고 싸우게 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자기는 꼬신 거 아니라고 소리쳤었지.”
“은근히 인기가 있긴 하죠.”
“도도해 보이는 얼굴로 허당짓 하니까.”
“그러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타입은 맨날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놈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힘내게 하는 걸 좋아하지.”
“자기는 그거 하기 싫다고 하던데.”
“근데 맨날 신경 쓰여서 옆에 맴돌잖아.”
“투덜대면서 도와주고.”
“나쁜 사람인 척하면서 이것저것 퍼 주고.”
“결국 그 사람이 괜찮아져서 모틸라를 좋아하게 되면-”
“갑자기 무서워졌다고 도망가고.”
로나는 모나한과 실리가 모틸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니……. 그런 타입이었어?
처음엔 분명히 모틸라를 걱정하는 이야기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갈수록 모틸라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상한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닌 모양이었다.
“또 어디 가서 그런 거 사고 치고 있는 거 아니겠지……?”
“괜찮을 겁니다. 저한테 한번 치고 가서 정신 차리기도 했고, 한때 사랑했던 것들을 보러 간다고 했으니까, 평온하게 여행이나 하고 있겠죠.”
“그럼 좋겠네…….”
실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모틸라에 관한 서류를 뒤적거렸다.
뱀파이어들이 정착한 곳과 그곳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정리해 놓은 서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