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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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해도 역겨운 일들이 물밑에서 물 위에서 첨벙거리며 구정물을 쏟아 내는 시대였다.

“제가 태어난 것도 전쟁 막바지였고, 이유도 모른 채 이용당하기만 했었죠. 그 후에는 알고 싶지도 않았고요.”

아주 나중에서야 마족을 물리치기 위한 신전의 단죄 어쩌구 하는 역사서를 보며 비웃었을 뿐이었다.

어느 쪽이나 똑같은 작자들이었지.

마녀 쪽은 소식도 안 들리는 반면, 신전 쪽은 거머리처럼 살아남은 것을 보아하니, 신전 쪽이 이겼는가 싶었다.

“그 후 둘 다 크게 쇠퇴해서, 도망간 키메라들이 도시로 나오기 시작했죠. 아무도 우리들을 잡지 못했으니까.”

“으으음…….”

“전쟁 후라서 범죄가 난무하던 시기기도 했고, 새로운 신분을 얻기도 쉬웠죠. 모나한이라는 이름도 그때 같이 도망갔던 이들이랑 지은 거예요.”

“원래 이름은요?”

“으음……. 그때 즈음엔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실험실이나 전쟁 중에는 번호로 불렸고.”

“최악.”

“뭐, 지금은 로나랑 알콩달콩하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모나한은 그렇게 말하며 어느 순간부터 로나가 건네주기 시작하는 모카 쿠키를 입에 넣었다.

자신이 그녀의 빵을 좋아하는 걸 뻔히 아는 로나는 제 기분이 조금이라도 우울해 보이면 입에 쿠키들을 넣어 주고는 했다.

“모나한이라는 이름 좋은 것 같아요. 기억도 잘되고, 입에 착착 붙어요.”

“로나 씨가 불러 주니까 더 좋네요.”

“버터는 적당히 발라요.”

“평생 로나 씨가 불러 줄 거니까 더 좋구요.”

“아주 산처럼 바르고 있네.”

“그럴 거죠?”

모나한이 로나와 눈을 맞추고 사르륵 웃었다.

로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그 선홍색 눈동자를 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고, 표정이었지만-.

“그러죠, 뭐.”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그 후에 지어진 웃음이 더욱 그랬고.

* * *

그들은 해가 져서 노을이 짙게 깔릴 때 즈음에야 수도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로나가 마차를 세울 수 있는 곳을 찾아야겠다고 두리번거렸다.

여관 안에서 잘 수도 있었지만, 온갖 마법을 걸어 놓고, 좋은 이불로 무장한 마차의 침대보다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시대에 청결을 따지는 것도 어려웠고.

“어디 호객꾼 한 명에게 물어보면……?”

“이쪽일걸요?”

호객꾼을 찾으려는 로나를 말리며 모나한이 익숙하게 마차를 몰았다.

“수도에 와 봤어요?”

“몇십 년 정도 전 즈음? 마차를 두는 곳은 큰 공간이 필요하니까 안 바뀌었을 거예요.”

“……몇십 년 전?”

“으음……. 제가 긴 잠에서 깨자마자 로나를 만났거든요. 그 잠을 한 30년 정도 잤어요. 자기 전에 활동했던 곳은 바다 건너의 항구 도시였고, 그 도시에서 여기로 몇 번 관광을 왔었거든요.”

“……갑자기 모나한이 엄청나게 멀어 보이네요.”

“어쩌겠어요. 그런 저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죠.”

“뭐지? 원래는 ‘제발 받아 주세요’라는 포지션 아니었어요?”

“로나한테 배웠어요.”

“이상한 거 배우지 말아요.”

“생각해 볼게요.”

“계속 배우겠다는 말이군요.”

“네.”

“흠.”

“흠.”

모나한은 익숙하게 로나와 농담하며 마차를 몰았고, 그의 말대로 곧 마차들을 주로 세워 놓는 커다란 공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관리만 맡기실 거요? 아니면 직접?”

“직접입니다.”

“그럼 저쪽으로 가시오.”

모나한이 익숙하게 공터의 관리인과 대화하고 그가 안내하는 데로 마차를 몰았다.

다른 마차들보다 좀 더 대로에 가까운 공터였다.

“직접이 뭐예요?”

“마차에서 잘 거냐는 소리예요. 마차로 작게 상행을 하는 상인들은 여관이 아니라 마차에서 자는 경우도 많거든요. 짐을 지키려는 이유도 있지만,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이들도 많아요. 마차째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만고요. 좌판을 까는 게 아니라 그냥 마차를 세워 놓고 장사를 하는 거죠. 그런 이들을 위해서 대로와 가까운 공터를 주는 거예요.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모나한 생각보다 아는 게 많군요.”

“저를 뭐로 생각하고 있는 거죠?”

“글쎄요. 잘생기고 뻔뻔한 가염 버터?”

“아는 것도 많고 잘생기고 몸매도 좋고 힘도 세고-”

“…….”

로나는 모나한이 뻔뻔하게 자신의 장점에 대해 어필하는 모습을 보며 끔찍하다는 표정을 했지만, 모나한은 멈추지 않았다.

“옷도 잘 입어, 목소리도 좋아, 센스와 배려심도 넘쳐-”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군요.”

“그리고 로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죠.”

모나한이 뻔뻔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당연한 진실이고 진리라는 당당한 표정이었다.

“……재수 없어.”

“요즘 그 말이 다른 뜻으로 들리고 있는 거 알아요?”

“재수 없어.”

“로나는 부끄러우면 재수 없다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맞죠?”

“……그 느끼한 입 좀 다물어요.”

“섹시한 입이라고 하면 다물게요.”

“후…….”

로나가 한숨을 푹 쉬고는 모나한을 째려보았다.

모나한은 여전히 뻔뻔한 표정으로 제 입을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그녀는 그 꼴을 빤히 보다가 피식 웃고는 손끝으로 모나한의 입술을 가볍게 톡톡 쳤다.

“그래요. 그 섹시한 입 좀 다물어요.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네.”

“……지금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 쪽은 저 같은데요!?”

“뭐라니.”

“하……. 심장 터져 죽는 줄 알았네. 제발 공격할 거면 경고 좀 하고 들어와요.”

“흠……. 공격할게요.”

“어, 지금요!?”

“네. 지금요.”

로나의 말에 모나한이 눈을 데굴 굴렸다가 준비됐다는 표정과 함께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뭘 원하는 건지 눈까지 사뿐히 감은 채였다.

그래서 로나는 공격했다.

“억!”

“공격했어요.”

“옆구리를 찔렀잖아요!”

“공격한 거죠.”

“그 공격이 아니죠!”

“공격.”

“아구구. 제 옆구리 좀 그만 찔러요. 마차 몰고 있잖아요.”

“흥.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 가지고.”

“절 요즘 가르치는 사람은 로나 씨밖에 없거든요?”

“섹시한 입 좀 다물어요.”

“아니, 그.”

“다물어요.”

“……네”

모나한은 자신이 한 말이 있어서 더 이상 별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불만이 가득한지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어서 로나는 그 입술 끝을 뚱한 표정으로 보다가 모나한의 손을 훅 가져왔다.

그리고 손등에 짧게 입술을 대었다가 툭 하고 놓아주었다.

“됐죠?”

“……밥 주던 고양이가 처음으로 따르면 이런 기분일까.”

모나한은 최고로 행복해졌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도 종종 부탁한다는 말은 덤이었고, 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 * *

모나한과 로나는 저녁을 먹는 김에 짧게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해가 이미 완전히 져서 가로등 아래에서 저녁 시장이 열릴 시간이었다.

“간단하게 길거리 음식을 먹을까요?”

“좋아요. 여러 가지를 왕창 먹어 봐야지.”

“못 먹겠으면 제가 먹어 줄게요. 마음껏 사요.”

모나한이 제 배를 쓰다듬으며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그 말에 로나가 모나한의 손을 잡아끌고 잔뜩 신이 난 걸음을 옮겼다.

로나가 맛있을 것 같은 음식을 사서 한입 먹고 “오오-” 감탄사를 내고 모나한에게 휙 넘기면, 모나한이 남은 음식을 와르르 먹고 “오오오-” 감탄사를 내곤 했다.

둘은 여러 가지 길거리 음식들을 오물거리면서 한가롭게 길거리를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뱀파이어를 만나러 가는 건 언제쯤 할 예정이에요? 수도에서 장사 한번 해 보고 싶은데.”

“장사밖에 모르는 로나가 또 나왔네요.”

모나한이 로나가 건네주는 고기 꼬치를 받아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이쪽에서 찾아가는 건 어려울 거예요.”

“네?”

“맛있는 음식을 찾으려고 수도에 온 만큼 귀족들 사이에 섞여 있을 테니까요. 실제로 귀족에게만 파는 음식도 있으니까.”

“으음.”

“우린 평민이고 그들을 찾으러 귀족 사회에 뛰어들긴 어렵죠. 걸리는 것도 많고.”

“그럼 어떻게 하게요.”

“간단해요.”

모나한이 다 먹은 꼬치의 나뭇가지를 가벼운 손놀림으로 휙 던져 정확히 쓰레기통 안으로 넣으며 말했다.

“장사밖에 모르는 로나를 하면 되는 거죠.”

“음?”

“로나의 빵이라면 분명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가 날 테고, 식욕의 노예들은 그걸 지나칠 수 없죠. 마치 저처럼.”

그냥 지나쳐 가려던 시골 마을에서 황홀한 빵 냄새에 홀렸던 것처럼.

그리고 결국 빵뿐만 아니라 그걸 만드는 사람한테까지 홀렸던 것처럼.

“분명 로나 씨는 식욕의 노예들을 빵 냄새로 홀리고 맛으로 홀리고 인격으로 홀리겠죠.”

“제가 무슨 유혹 킹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네요.”

“오. 그거 맞는 것 같아요. 유혹킹.”

“흠. 그럼 세상의 모든 식욕의 노예들을 꼬셔서 하렘을 만들어 볼까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섭다.”

로나가 담담한 얼굴로 말한 농담을 창백한 얼굴로 받으면서 중얼거렸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로나의 빵으로 왕국을 건설하는 거죠.”

“아니, 이걸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로나의 버터 쿠키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아부하는 뱀파이어들…….”

“무슨 치즈케이크 한 판이면 피 튀기는 혈전도 일으킬 수 있겠네.”

“가능할 것 같은데……. 저 로나 씨의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먹었을 때 그런 기분이었다고요.”

“이걸 위해서라면 혈전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기분?”

“네. 그런 기분요.”

“그럼 마들렌은요?”

“흠. 화려한 꽃다발을 들고 와서 바치면서 찬양한다든지.”

“크림빵은?”

“세상에 온갖 보석 반지들을 가져와서 손가락에 끼워 드리고.”

“커피 번?”

“고급 초콜릿들을 아름답게 조각해 식탁 위에 올려 드리고.”

“딸기 케이크와 페이스트리, 에그타르트와 슈크림 빵.”

“온갖 산해진미와 와인들, 휘황찬란한 보석들과 비단들을-”

모나한이 수도의 화려한 길을 가벼운 걸음으로 걸으며 로나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의 등 뒤에서 가로등의 빛이 하얀색으로 빛나 반짝거리고.

“발밑에, 어깨 위에, 온 주변에 깔아 드리고-”

웃음은 황홀하고 목소리는 달콤해서-.

“가장 어여쁘고 아름답고 귀한 것들만 가득 담아서-”

수백 수천 명이 오가는 길이, 아무것도 아닌 돌길이, 그 위에 비추는 가로등 빛,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과 별빛.

“행복하게 해 드려야죠.”

그리고 모나한.

로나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어떠한 단어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입술만 오물거렸다.

모나한과 있다 보면 때때로 올라오곤 하는 그것들이 발끝을 간지럽히고 손끝을 저리게 하곤 하였다.

“모나한이 잘하는 거네요.”

“네?”

로나의 말에 그녀를 보고 있던 모나한의 눈이 동그래졌다.

로나가 그 눈을 보며 속삭였다.

“절 행복하게 하는 거요.”

그 눈이, 선홍색 눈동자가 기쁨으로 휘고, 입술 끝이 올라가 예쁜 호선을 그리는 것을.

수십 수백 번 보아도 기쁘고, 앞으로 수천 번 보게 될 것임에도 언제나 두근거릴 게 분명한 것을.

로나가 마주 보며 웃었다.

발끝이 간지럽고, 손끝이 저리고 입술이 비실비실, 눈가가 살랑살랑.

초겨울의 바람이 흩어져 하늘거리는 밝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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