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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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아암-”

로나는 끓는 물에 자른 채소들을 퐁당퐁당 집어넣으며 하품을 길게 했다.

아무리 순식간에 잠든다고 해도 새로 바뀐 잠자리가 익숙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피로가 살짝 남아 있었다.

밥 먹을 때 국이 있어야 한다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아침 식사로 따끈하고 걸쭉한 국물을 먹는 걸 좋아하는 로나는 아직 졸음이 머무는 눈으로 수프를 끓였다.

“밤에 잘 자던데, 졸려 보이네요?”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봐요.”

말에게 아침 식사를 주고 온 모나한이 로나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새 오븐도 예열했어요? 부지런하기도 하지.”

“오븐이 떡하니 있는데 써먹어야죠. 버튼 하나 누르면 되는데.”

“보아하니 오븐에 넣을 요리도 다 준비한 것 같은데.”

“단호박 고기찜이에요. 오븐에 넣어 줄래요?”

로나가 새하얀 접시에 담긴 단호박을 건네주자 고개를 끄덕인 모나한이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로나는 겨울 아침 공기에 두꺼운 로브를 한 번 더 여미고는 수프를 휘적휘적 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냄새가 주위를 감싸고, 둘은 든든하고 맛있는 아침을 먹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가야 하죠?”

“수도는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이틀만 더 가면 돼요.”

“이틀…….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죠?”

“여기는 관리되는 가도라서 무슨 일이 일어날 확률은 아주 낮아요. 기껏해야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정도인데, 말 걸 거 아니시잖아요?”

“각자 갈 길 가야죠.”

“길에서 장사할 것도 아니고요.”

“피곤해요.”

“그럼 정말로 무슨 일 벌어지기 힘들겠네요.”

로나는 모나한의 말에 “꼭 그런 말 하면 무슨 일 생기던데…….”라고 중얼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틀 동안 있었던 특별한 일이라곤 로나가 전생에 캠핑하면서 먹고 싶어 한 음식들을 줄줄이 먹은 것뿐이었다.

모나한의 말대로 수도로 가는 상인이나 용병으로 보이는 이들을 몇 번 만나긴 했지만, 그쪽도 말 안 걸고 이쪽도 말을 안 거니 정말 각자 갈 길 가게 되었다.

마차를 타고 수다를 떠는 것도 한참, 마차를 타기 전부터 로나와 모나한은 잠자는 시간만 빼면 붙어 있었고, 이제는 잠자는 시간도 붙어 있으니 할 수 있는 수다가 다 끝난 지 오래였다.

둘은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로나가 차라리 장사하는 게 더 재밌겠다고 말할 정도로 지루한 시간이었다.

평화롭게 새하얀 뭉게구름이 하늘 위로 두둥실 떠다니기만 했다.

모나한이 말의 고삐를 쥐고 있었으므로 정말 할 일이 없었던 로나는 어느새 고개를 모나한의 어깨에 대고 졸고 있었다.

겨울 공기는 차가웠지만, 털이 가득 달린 커다란 후드 로브와 규칙적인 흔들림은 단잠을 자게 하기 충분했다.

모나한 또한 그런 로나를 깨우지 않고 오히려 편히 잘 수 있도록 천천히 마차를 몰았다.

그렇게 가기를 한참, 모나한이 마지막 언덕을 넘으며 자고 있는 로나를 부드럽게 깨웠다.

“로나, 로나. 일어나 보세요.”

“으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풍경이 곧 나타날 거예요.”

그 말에 로나가 졸음이 섞인 갈색 눈동자를 멍하니 떴다.

모나한의 말대로 언덕을 넘자 로나가 좋아할 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드넓게 펼쳐진 인간의 흔적.

밀밭이 거대한 평야를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밭 너머 저 멀리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언덕에 세워진 거대한 도시.

“오오! 판타지!”

로나는 잠이 완전히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달리는 마부석에서 감탄하며 손뼉을 짝짝 쳤다.

겨울이라 황폐한 밭이었지만, 가을에 황금빛 파도가 얼마나 출렁였을지 상상되는 넓이였다.

언덕에 있는 도시는 높은 돌벽과 그 사이사이 화려한 깃발, 가운데의 거대한 성문이 전형적인 중세 판타지의 성이었다.

“드넓은 평야에 지어진 오래된 도시죠.”

“와와. 무슨 게임 트레일러 같다. 여정이 시작된다아! 그럴 것 같네요.”

“학원 도시 틸레아도 상당히 큰 도시지 않았나요?”

“근데 거기는 왕성 같은 게 없었잖아요. 묘하게 젊은 느낌의 건물도 많았고.”

“말 그대로 젊은 도시니까요. 커다란 학원이 지어지면서 도시가 생긴 거고, 최근 시행된 많은 마법이 쓰였죠. 그에 반해 수도는 오래됐으니까-”

“-고전 판타지이.”

로나가 어디선가 들은 음으로 ‘판타지이’를 외치며 키득거렸다.

고향에 살 때는 거기서 벗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데, 벌써 학원 도시를 거쳐 수도까지 왔다.

정말 무슨 모험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옆에 앉아서 마차를 모는 모나한의 미모가 특히 소설의 일러스트 같았다.

겨울 햇살이 반짝거리는 아래에 회색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매끄럽고 잘생긴 이마를 보여 주고 있는 미남!

자신의 앞머리도 뒤로 휘영청 날려서 이마를 다 까 보여 주고 있지만 괜찮다! 여드름 안 났으니까!

“왠지 머리를 좀 풀고 싶은 느낌?”

“예?”

“바람에 제 머리가 이렇게 휘날리면 소설 속 한 장면 같을 것 같아서요.”

로나는 소설 족 장면을 만들어 보겠다며 땋은 머리끝의 머리끈을 주섬주섬 풀어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나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서 뒤로 흩날렸다.

달리는 마차에 따라서 갈색 곱슬머리가 풍성하게 휘날리다가-.

“으업.”

“아하하하핳!”

모나한의 얼굴 위로 직격했다.

“모험 소설이 머리카락에 얻어맞은 걸로 시작됐는데요?”

“꽤 괜찮은 시작이네요. 머리카락에 얻어맞는 걸로 시작하는 용사 모험담!”

“반대 아니에요? 동료를 머리카락으로 때리면서 시작하는 용사 모험담.”

“아, 제가 용사예요?”

“그럼요. 저는 굳이 따지자면 숨겨진 흑막?”

“응? 왜요?”

“순수한 얼굴에 퇴폐미 한 방울을 떨어트려서?”

“뻔뻔해라.”

“그것도 흑막의 소질 중 하나죠.”

모나한이 코끝을 찡긋거리면서 말했고, 로나는 다시 모나한의 얼굴을 칠 뻔한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웃었다.

“우와.”

“응?”

“머리카락에서 맛있는 냄새 장난 아니네요.”

“……네?”

모나한이 로나가 머리카락을 풀었을 때부터 맡아 왔던 냄새에 감탄하며 말했다.

아까부터 로나의 체향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진하게 맡아졌기 때문이었다.

“밀 빵 냄새가 화악 풍기는데 끝내주네요. 그거 아세요?”

“왠지 모르고 싶어지는데.”

“이런. 꼭 알려 드릴 건데. 저 요즘 밀 빵 냄새만 맡으면 두근거려요.”

“배고파서요?”

“네. 여러 가지 의미로 배고파지죠.”

“오, 이런. 모나한이 변태가 됐나 봐요.”

“그게 다 로나 씨 때문이래요. 그분 체향이 밀 빵 냄새라던데요?”

“그런……. 불쌍해라. 어쩌다 밀 빵에 흥분하는 변태가 된 걸까.”

“밀 빵에 흥분하는 건 아닌데요.”

로나에게 플러팅을 하려다가 본전도 못 찾은 모나한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면서 말했다.

자기 체향이 밀 빵 냄새인 걸 잘 알면서, 자신이 로나의 냄새라서 그런다는 걸 알면서 이상한 걸로 몰아가고 있다.

“설마 방 안 가득 밀 빵을 쌓아 두고 하악하악거리는 걸까!?”

“아니, 저기. 그러진 않아요.”

“아니면 밀 빵을 코에 대고 킁킁거리면서 막!”

“절 뭐로 만드시는 거예요!?”

“밀 빵에 흥분하는 변태요.”

거기다가 이상한 취향의 변태로 만들기까지!

오래 살아온 퇴폐한 뱀파이어로서 수많은 취향을 섭렵해 봤지만, 밀 빵에 흥분하는 변태는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런 취향까지는 무리입니다!

“제발 이상한 취향 만들지 말아 주세요. 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워지네.”

“반쯤 그렇게 된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 밀 빵에 흥분하지 않아요. 밀 빵 냄새에 흥분- 아니지. 밀 빵 냄새에도 흥분하지 않아요.”

“저한테 밀 빵 냄새가 난다면서요. 저한테 흥분하지 않는다는 거죠. 알겠어요.”

“아니죠! 로나 씨한테는 흥분하죠!”

“오, 지금 저한테 흥분한다고 하신 거예요? 변태.”

“아니, 그럼 제가 제 애인한테 흥분하지, 누구한테 흥분합니까?”

모나한이 한껏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로나는 제 몸을 팔로 가리며 상체를 뒤로 무를 뿐이었다.

“가리려면 거기가 아니라 머리카락이나 잡아요. 지금은 목덜미에서 나는 냄새가 더 유혹적이니까.”

“……변태.”

“그거 방금 진심이었죠.”

로나가 모나한의 말에 상체가 아니라 머리카락을 붙잡고 목을 가리며 말하자, 모나한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변태가 뭔지 보여 줘요?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치를 보여 주는 수가 있어요?”

“……경험치가 많나요?”

“제가 오래 산 만큼 있죠. 걱정하지 말아요. 로나 씨는 전부 알게 될 거니까.”

“……알고 싶지 않아요.”

로나가 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전생의 미디어와 인터넷으로 알고 있는 정보가 꽤 됩니다만, 왠지 그것보다 엄청난 게 튀어나올 것 같은 예감.

“방금 그건 거짓말이네요.”

“아뇨. 진심인데요.”

“거짓말.”

“진짜.”

“거짓말.”

“정말.”

“거짓말.”

“어차피 뱀파이어로 변하기 전에는 손도 못 대면서.”

“……어떻게든 손대는 수가 있어요!?”

“내게는 명령이 있다, 노예야!”

로나가 승리의 미소를 짓자 모나한이 짧게 투덜거렸다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따라 웃기도 잠시, 둘은 수도를 둘러싼 성벽의 입구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수도에 들어가기 위해 줄줄이 서 있는 줄에 도착한 거지만.

“와……. 사람 진짜 많다.”

“아무래도 수도니까요. 검사도 더 심한 편이고.”

“근데 수도에 엄청나게 큰 신전이 있지 않아요? 신전에 뱀파이어인 거 안 걸리나?”

로나가 마차를 줄 마지막에 붙이는 모나한을 보며 물었다.

“요즘 신관들이 얼마나 신력이 부족한데요 신전 안에 들어가도 모를걸요? 실제로 신관인 척 살았던 적도 있어요.”

“……그 정도예요?”

“수도의 신전이라도 들어가면 걸릴 위험이 크지만, 작은 도시나 마을의 신전들은 안 걸려요. 애초에 뱀파이어들이 만들어진 이유가 신관들한테 안 걸리려고 만들어진 거라서요.”

“그래요?”

그는 자신이 학살하고 다니지 않는 이상 낌새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말하며, 로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 사람들은 모를 게 분명한 옛날이야기들을 말해 주었다.

“키메라들은 마녀하고 신전의 전쟁에서 만들어진 생명체거든요. 인제 와서는 마녀들도 거의 없어지고 제대로 된 신관도 거의 없어졌죠. 아이러니하게도 남은 건 그때 만들어진 실험체들이나 그들의 후손들뿐이죠.”

“뱀파이어 말고 뭐가 있나요? 늑대 인간?”

“음. 맞아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들 중에는 천인족도 있을걸요?”

“천인족요?”

“날개 달려서 신성력 쓰는 애들요. 신전 쪽에서 만들어 낸 키메라죠.”

“신전 쪽이 착한 쪽 아니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마도 전쟁이 ‘사악한 악마들을 물리치기 위한 신전의 단죄’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처음에는 어떤 이유로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전쟁 끝 즈음에는 둘 다 똑같아졌죠.”

오래 싸우면 닮는다잖아요.

모나한은 어느 쪽도 끔찍하긴 매한가지였다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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