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좋아, 전 이제 준비가 되었어요.”
“그렇게 준비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럼요!”
로나가 마치 최종 보스의 방 앞에 서 있는 용사 같은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가 하나밖에 없잖아요!”
로나의 말대로 마차 안에는 새하얀 이불에 싸인 침대가 딱 하나 존재했다.
그 말은 어쩔 수 없이 둘이 한 침대에서 자야 한다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었죠. 오븐이 생각보다 컸으니까.”
“오븐이냐, 침대냐. 저는 매우 고민했어요.”
“아뇨. 바로 오븐을 골랐잖아요.”
“오븐을 고르면 어쩔 수 없이 모나한과 한 침대에서 자야 해서……. 기나긴 시간을 고심했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븐을 골랐죠.”
“그리고 그 고민 끝에! 저는 침대를 포기하기로 했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로나 씨는 조금도 고민 안 했어요.”
모나한이 옆에서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로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고민했는지 나열했다.
“후……. 어쩔 수 없죠. 제가 희생하는 수밖에. 모나한과 한 침대에서 자는 수밖에.”
“로나 씨가 그렇게 불편하시다면 저는 밖에서 자도 돼요. 전 추위도 안 타고.”
“네?”
모나한의 말에 로나가 매우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제가 아는 모나한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얼씨구나 하고 자신을 품에 안고 잘 인물 아닌가.
오히려 안고만 자겠다고 온갖 끼를 부릴 인물 아닌가.
그런데 그런 모나한은 어디 가고 얌전히 밖에서 자겠다고 말하지?
“너는 누구냐.”
“네?”
“내가 아는 모나한이라면 바로 같이 자자고 온갖 끼를 부릴 텐데, 너는 누구냐!”
“오, 로나.”
물론 저도 그러고 싶죠.
모나한이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하지만 낮에 말했잖아요. 요즘 점점 힘 조절이 안 된다고요.”
“네?”
“로나 씨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힘 조절이 안 되더라고요.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는 만큼 꼬옥 끌어안고 싶은데……. 그러면 로나 씨 허리가 부러질 거예요.”
뭐야. 진심이었어?
로나가 멍한 표정으로 모나한을 바라보자 모나한은 한숨을 한 번 더 푸욱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요즘은 야한 짓 하자는 말도 못 꺼내겠어요. 아니, 꺼낼 순 있는데, 로나 씨가 진짜로 승낙할까 봐 무서워요.”
“승낙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제 마음의 이성과 본능이 다투겠죠. ‘아싸! 당장 침대로 데려가!’ 하고, ‘힘 조절할 수 있어?’ 하고.”
“아하.”
“하……. 왜 저렇게 귀여워선, 힘 조절도 못 하게 만들고…….”
모나한이 양손으로 마른세수하며 중얼거렸다.
“흠. 뭔가 나, 안전하게 된 건가.”
“안전이라뇨? 안전이라뇨!? 제가 위험인물입니까!?”
“아닌가? 오히려 위험하게 된 건가.”
“저는 절대로 로나 씨를 위험하게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만!?”
모나한이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지만, 로나는 오히려 신기한 걸 본다는 표정으로 모나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하기에는 모나한은 힘 조절을 정말 잘했다.
정말로 그가 힘 조절을 못 했다면 집안 식기가 남아나지 않았겠지.
알려 준 젓가락질도 얼마나 잘했는데.
뱀파이어의 힘이라면 얇은 나뭇가지 정도는 스티로폼 막대보다 약한 거 아닌가.
얇은 갈대 줄기 정도나 되겠지.
그런 그가 힘 조절을 못 한다고?
나 때문에, 내가 너무 좋아서?
흐흐흥.
“흐흐흥.”
“뭡니까, 그 웃음.”
“힘내요.”
로나가 두 손을 주먹 쥐어서 “파이팅!” 했다.
“와, 진짜 귀여운데 재수 없다.”
“그거 내 대사인데.”
“어디서 그런 뻔뻔한 미소를 배운 거죠?”
“아, 제 남편이 그런 미소를 잘하거든요.”
“그 남편이 참 잘 가르쳤네요.”
“그분이 좀 잘생겼는데 재수가 없어요.”
“제 부인도 좀 귀여우신데 재수가 없으시죠.”
로나와 모나한이 피식거리며 대화하기를 한참, 모나한은 정말 밖에서 자려는 모양인지 이불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로나는 그런 모나한을 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모나한이 아무리 추위를 안 탄다고 해도 그를 밖에서 재우기는 싫었다.
실제로는 추운 공기에 하얀 입김을 내뱉는 창백하고 아름다운 뱀파이어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선홍색 눈동자를 깜박이는 그림이겠지만, 제 상상 속에 떠올려지는 것은 쭈그렁 해진 모나한이 이불을 부여잡고 덜덜 떠는 그림인 걸 어쩌겠는가.
양심에 찔려서라도 모나한을 안에서 재워야겠다.
“으음……. 근데 제가 주인인데도 저를 상처입힐 수 있는 거예요?”
“이건 신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거에 영향이 강하거든요. 제가 로나를 해치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데, 너무 흥분해서 몸에 힘을 줘 버리면-”
“제 허리가 ‘뽀깍!’ 하는 건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멍 정도는 남겠죠.”
모나한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제가 명령하면 어떻게 돼요?”
“명령요?”
“예를 들어 이렇게 침대를 반으로 나누고요.”
로나가 검지로 침대의 반에 가상의 선을 주욱 그으며 말했다.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할까……. 명령- 한다?”
그리고 로나가 ‘명령’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자마자 모나한의 목에서 언젠가 보았던 음산한 붉은 계약 진이 섬뜩한 빛을 내며 피어올랐다.
그리고 로나의 입에서 언젠가 모나한이 그랬듯이, 천사의 유혹, 악마의 웃음, 진득이 녹아내린 초콜릿, 혹은 쏟아지는 설탕의 단내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내일 아침잠에서 일어날 때까지, 이 선을 넘어오지 말지어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명령한 대로, 모나한의 계약 진이 한 번 더 진득이 빛났다가, 사그라들어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모나한이 조금 멍한 얼굴로 그의 아름다운 손을 천천히 뻗었다.
조금은 창백하고 하얀 길쭉한 손가락이 천천히 허공을 가르고, 로나가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선을 침범했을 때-.
“크윽-!”
모나한의 목에서 순간적으로 붉은빛이 반짝이며 고통이 일었다.
“오! 됐어요?”
“……제 주인님이 내린 첫 번째 명령이 무려 ‘이 선 넘지 마’라니…….”
“와! 진짜 됐나 봐! 저 명령 처음 내려 봐요. 방금 목소리 엄청 이상하게 나오더라! 주문도 처음 외워 봐!”
“……저도 제 생애 이런 명령을 받아 본 건 처음입니다.”
모나한이 ‘자신의 뱀파이어의 자존심이 부서진 기분’이라고 중얼거리며 터덜거리는 몸짓으로 들고 있던 이불을 내려놓았다.
“적어도 제 힘을 확 줄인다든지! 안을 때 조심하라든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잖아요! 이게 뭐예요!! 진짜 못 안고 자게 됐잖아!!”
“뭐래? 처음부터 안고 자게 해 줄 생각 없었는데.”
“그럼 왜 침대 하나만 했어요!? 왜 기대하게 했어!?”
“오븐을 위해서죠. 당연한 소리 하고 있어. 그리고 기대는 무슨. 그럴 생각도 없었으면서.”
“……그건 그렇죠.”
“네?”
로나는 모나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오히려 놀란 표정이 되어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마차에서 처음을 맞이할 수는 없죠. 로나 씨 말이 맞아요.”
“…….”
“아, 로나 얼굴 빨개졌다.”
“……조용히 해요.”
“뭘 생각하든 상상 그 이상으로 할 예정이거든요.”
“……조요옹히 해요.”
“기대하고 있어도 좋아요.”
그리고 모나한은 로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아직 침대 옆에 서 있던 로나만 ‘저 자식을 어떻게 해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라는 얼굴로 모나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슬프게도 제가 힘 조절이 안 되는지라, 로나가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못 할 예정이죠.”
“와아! 하나도 안 슬프네요!”
“전 매우 슬프답니다. 수도에 비싼 호텔을 잡고 싶었는데……!”
“싫어요. 안 해요. 안 가요.”
로나는 모나한의 말에 콧방귀를 팽 하고 뀌고는 자신도 침대 이불 속으로 주섬주섬 들어갔다.
침대를 두 개 두지 못했을 뿐이지, 크기는 상당히 커서 두 사람이 누워도 충분히 편했다.
게다가 마법이 가미된 최고급 매트와 엘프의 실로 만들었다는 최고급 이불은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풍겼다.
보온, 습도, 빛 모두 완벽한 마차 안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손도 못 잡는 건 아쉽네요.”
모나한이 손을 올려 검지로 선을 톡톡 쳤다가, 붉은빛이 파직하고 번지자 아쉽다는 듯이 손을 내렸다.
“손 정도는 들어올 수 있도록 풀어 줄까요?”
“아뇨.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결국 더 많은 걸 바라게 될 거예요.”
“으으음.”
“명령하신 거 잘했어요. 전 정말 마차 밖에서 잘 생각이었다고요.”
“춥잖아요.”
“뱀파이어잖아요. 추위를 잘 안 탄다고요.”
“그래도 모나한이 밖에서 자는데, 제가 어떻게 편히 잘 수……. 아함-”
“로나는 머리만 대면 자잖아요.”
“네, 그렇죠. 졸려요.”
“그래 보여요.”
로나는 말도 다 끝내지 못하고 한 번 더 길게 하품했다.
벌써 반쯤 감긴 눈이 느리게 깜박이고 있었다.
“주무세요.”
“……진짜예요.”
잠에 취해 살짝 느리게 흐르는 목소리가 말했다.
“네?”
“모나한이 밖에서 잤으면, 편하게 못 잤을 거예요…….”
이야기하면서 자니까아……. 좋네요…….
그리고 거의 사그라들 듯 잠에 빠지는 목소리가 말했다.
모나한은 고개를 돌려 로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눈꺼풀 사이로 사라져 있었다.
매일 꼬박꼬박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잠드는 로나는 베개에 머리를 대면 바로 잠드는 사람이었다.
자기 전 씻으면서 풀어 내린 땋은 자국이 남은 갈색 곱슬머리가 새하얀 베개 위에 흐르고, 밀색 피부의 동그란 이마, 갈색의 속눈썹, 코끝, 주근깨 자글거리는 볼, 부드럽게 다문 입술 위로 아직 끄지 않은 등잔불의 빛이 아른거렸다.
옅게 숨 쉬는 소리가 조용한 마차 안을 채우고, 포근한 이불에 들어가 있는 몸이 조그맣게 올라갔다 내려간다.
모나한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천장을 보고 누워 있던 몸을 돌려 로나를 향해 누웠다.
그리고 손을 올려 로나가 그어 놓은 선 바로 앞에 내려놓는다.
그는 로나의 어느 날 로나의 손을 잡았을 때처럼, 그녀의 볼을 만졌을 때처럼 아주 부드럽고 나긋하게 손끝을 움직여 새하얀 천을 쓰담아 내렸다.
그리고 아주 나직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저도 아주 좋았어요.
당신과 대화하면서 잠드는 순간이.
평생을 상상하게 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