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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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요. 사실 저도 김치가 엄청나게 먹고 싶기도 하고, 사실 그 정도로 이 도시에 애정이 강하진 않아요.”

“그런 사람이 어젯밤 내내 단골들에게 줄 레시피를 적어요?”

“주고 싶었거든요.”

“그러다가 레시피가 하나도 남지 않으면 어떡해요.”

“비싼 빵들의 레시피는 안 남겼다고요. 게다가 아직도 많이 남았는걸요.”

“떠나는 마을마다 이러는 건 아니죠?”

“그러면 제빵의 요정이나 신으로 불리게 될 수도 있겠다.”

“이미 그 손맛은 신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던데.”

“그렇게까지 띄우는 거예요? 푸흐흡. 걱정 마세요. 여기만 그럴 거예요.”

“정말요?”

“여기가 처음이었잖아요. 뭐, 정말 정들게 되는 곳이 있으면 또 남길 수도 있죠.”

“나중에 역사책 보면 정말로 제빵의 신으로 불리는 거 아닌가 몰라.”

“그거 보는 재미도 있겠네요.”

로나와 모나한은 티격태격하며 1년 사이 이상할 정도로 정이 많이 든 도시에 대한 아쉬움을 삼켰다.

로나가 위로해 줘서 고맙다는 듯이 모나한의 손을 한번 꾹 잡았다가 놓아주었고, 모나한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아직 다 구워지지 않은 빵들을 살필 모양이었다.

로나는 진열대를 한 번 더 쓸고는, 손끝에 남은 빵가루를 미련과 함께 툭툭 털어 버리고 뒤돌았다.

아직 오후.

손끝에서 갈색 빵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나무 바닥 아래로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초겨울이었지만 창가로 들어오는 햇볕은 따뜻한 주황색이었다.

아실라는 그 후 한 번도 빵집을 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 다른 남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조금 웃었다.

언제나 당연하게 알고 있던 대로, 게임 속 스토리대로 흘러가리라고 생각해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오히려 궁금해지고 말았다.

“뭐 하고 있는지 예상이 안 가네.”

원래 게임은 아실라가 루트를 고르고 약혼식을 하는 일러스트로 끝났는데, 현실에선 어떻게 되는 걸까?

그녀가 아무런 루트도 고르지 않게 되어서 끝이라는 걸까.

아니면, 게임의 선택지가 아닌 다른 선택지를 고르게 되어서?

로나는 처음으로 아실라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것에 화답하듯 딸랑-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들어온 것은 익숙한 갈색 곱슬머리였다.

“안녕하세요, 로나.”

“리앙 씨. 오랜만이에요.”

“하하. 그동안 바빴거든요.”

솜사탕이 둥실거리는 것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은 아니었지만, 아실라의 남주인공 중 가장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던 상인 캐릭터 폴먼 리앙이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조금은 능글거리고, 조금은 소년 같은 웃음으로 초록색 눈동자를 휘며 다가왔다.

“앞에 안내문을 봤어요. 빵집 문을 닫는다면서요?”

“맞아요. 여행을 떠날 생각이거든요.”

“아쉽네요.”

리앙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평소보다 빵을 더 많이 사 가야겠다는 말만 붙였다.

다른 단골들과 달리 퍽 깔끔한 태도였다.

“붙잡진 않으세요?”

“네?”

“다른 단골손님들은 다 그만두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냥 빵집이 사라지는 걸 아쉬워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여행을 떠난다는 것 자체를 걱정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음……. 그렇네요. 이상하게 걱정이 안 돼요.”

리앙은 습관대로 앞머리를 넘기다가 긁적거리고는 씨익 웃었다.

“왠지 어디 가서든 잘 사실 것 같거든요. 즐겁게요.”

로나는 그 웃음에 눈을 깜박이다가 따라 웃었다.

“맘에 드는 아부였어요.”

“오! 제가 또 말을 잘하죠.”

“서비스로 빵 좀 더 넣어 드려야겠네요.”

“정말 기쁘네요.”

로나는 키득거리며 리앙이 골라 온 빵 위에 다른 빵들을 잔뜩 쌓아 올렸다.

리앙은 신나 하다가 들고 갈 수 있을 정도로 부탁한다고 말했고.

“그리고 이건 선물이에요.”

“네? 무슨- 커피번 레시피잖아요!”

“맞아요. 제일 좋아하는 빵이시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리앙은 이런 건 받을 수 없다고 말하려다가 로나의 웃는 얼굴에 조용히 종이를 받았다.

“……제가 이걸 팔아먹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리앙 씨가 평생 어떤 음식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요.”

“…….”

“전 그런 음식들이 있거든요. 아주 그리워하는 음식들요. 그건 생각보다 상당히 힘든 인내를 요구하거든요.”

“……감사합니다.”

리앙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말했다.

갈색 곱슬머리가 두둥실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로나는 동글동글한 정수리에 있는 가마를 보고 조금 웃었다.

분명 이 세계의 사람들보다 어떠한 레시피에 관한 애착은 덜했다.

여기는 레시피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훔치기 위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고는 하는 세계였으니까.

자신이 생각한 것도 아니고, 그냥 게임 창이 알려 준 레시피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로나가 그 레시피에 숙달되기 위해 흘렀던 시간들이 있었다.

손에 익지 않던 반죽이, 계량이, 온도가 흘러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고 만 시간들.

그리고 손에 가득 남은 그 흔적들.

하지만 그보다 로나는 그리움이 더 컸다.

먹지 못하는 음식, 맛들이 문득 생각나곤 했던 까만 밤들이 더 컸다.

그래서 로나는 자신의 빵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기꺼이 그 레시피를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이것도 가져가요.”

“이건-”

“아실라 님 거에요. 아실라 님은 워낙 많은 빵들을 좋아하셔서 다 챙겨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미니 슈크림 빵 레시피예요.”

그녀가 그 미니 슈크림을 보면서 얼마나 눈을 빛냈는지 기억난다.

물론 그 뒤에 있었던 참사가 더 충격적이긴 했지만, 그 슈크림 빵을 보면서 순수하게 기뻐하고 감격했던 얼굴은 진짜였으니까.

리앙은 로나가 건넨 미니 슈크림 빵 레시피를 받고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품속에 넣었다.

품속에서 종이 두 장이 바스락거렸다.

“아실라 님은 요즘 뭐 하시나요?”

“아주 바쁘세요.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지셨나 봐요.”

그는 종이를 넣은 품을 두어 번 다독거리고 나서는 활짝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요즘 법률 공부를 하고 계세요. 사회적 제도에 관련된 것들도 공부하고 계시고요.”

“네?”

“하루 종일 도서관에 계시거나, 아니면 교수님이나 선생님, 심지어 귀족분들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 물어보고 조사하고 계세요. 신전 소속이 아닌 국가 관련 고아원 설립을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로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깜박거리며 리앙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아실라의 이야기를 하면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평민과 관련된 학교 설립에도 관심이 있으시고요. 미혼모, 미혼부와 관련된 제도나 전쟁 피해자, 부상자에 관한 제도, 노인들을 위한 법 설립, 재난 피해자, 이종족 노예 제도와 노숙자 관련 일자리 주선-”

“잠깐, 잠깐만요. 그걸 다 하고 계신다고요?”

“다는 아니죠. 지금 모든 것을 하는 건 무리지만 언젠가 전부 다 해 버리겠다고 하시던데요? 이틀 전에는 전염병이나 불치병 환자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고민하시다가 의학 공부를 해야 한다고 중얼거리시는 걸 들었죠.”

“와…….”

“이것까지는 무리 아니야? 라고 하시다가 결국 관련된 책을 한 아름 들고 가시더라고요.”

그 덕분에 프리먼 님과 라이언 님, 니켈스 님도 바쁘세요.

아실라 님이 워낙 날카로운 질문들을 많이 하시고, 그에 관한 토론을 하길 원하시거든요.

리앙은 자신도 휘말려서 요즘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 얼굴에는 아실라를 향한 존경과 감탄, 애정이 넘실거렸다.

“……대단하네요.”

“맞아요. 대단하시죠.”

전부 즐겁게 하고 계세요. 할 게 너무나 많아서 힘들어 보이시긴 하지만요.

리앙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품에 담긴 종이를 다시 한번 토닥거렸다.

“이건 아실라 님께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 빵집에 신세 진 게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여기 오시는 걸 조금 부끄러워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저도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뭔가 이루고 나서 오시고 싶으신가 봐요. 이 빵집이 아실라 님께 아주 중요한 곳인 것 같았어요. 없어진다고 말씀드리면, 우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로나가 그렇게 말했지만, 리앙은 그녀가 이 레시피까지 받으면 끝내 울고 말리라고 생각했다.

지금 쟁반 가득히 쌓아 올린 빵들도 아실라 님에게 드리기 위한 거였다.

자신이 로나 씨에게 한 말대로, 아실라 님에게 이 빵집은 어떠한 성역에 가까운 듯했으니까.

자신도 이렇게 아쉬운데, 아실라 님은 더 그렇겠지.

그러나 리앙은 로나를 붙잡는 말은 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그는 로나 씨가 이런 말에 붙잡혀서 남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되었고, 아실라 님이 그렇게 되었듯, 로나 씨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갔으면 했다.

리앙은 조금 무겁고, 조금 따뜻한 것 같은 주머니의 종이를 한 번 더 토닥거리고는 로나가 품에 안겨 준 빵 봉투를 들었다.

봉투는 안의 빵들로 인해 따끈따끈했고, 맛있는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여행 재미있게 하세요.”

“그럴게요. 리앙 님도 즐거운 나날들 되세요.”

리앙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소리를 남기고 빵집을 나갔다.

로나는 진열대의 쟁반을 정리하면서 손끝을 조금 매만졌다.

아실라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었지.

로나는 그 말에 별로 무게를 두지 않았었다.

그냥 착한 아이가 성장했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실라는 생각보다 더, 상상보다 더 커다란 것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게임 속 그녀는 남주 후보 중 한 명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봉사나 구호 정책을 펼쳤다는 설명 글도 있었다.

그러나 저런 것들은 아니었다.

그냥 한 번씩 일어나는 이벤트 같은 것들이었지.

“엄청나게 크고, 넓고, 대단하고-”

힘든 것들을 할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힘들고, 괴롭고, 아프더라도. 누군가를 돕고, 위로하고, 일어서게 할 모양인 것 같았다.

그녀 주위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전부.

“주인공이네.”

게임의 끝은 생각보다 더 다르게 흐를 모양이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처럼 끝이 아니라, 죽음까지, 혹은 죽음 그 이후까지 계속될 모양인가 보지.

엔딩을 말할 수 없게 되어서 상태창이 끝났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게임이 완결된 것이 아니라, 그냥 이제 더는 게임이 아니게 된 것이다.

삶이 된 거지. 현실 말이야.

로나는 그만 활짝 웃고 말았다.

리앙이 아실라를 생각하며 웃는 얼굴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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