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로나는 모틸라에 대한 걱정을 털어 버리고는 가게를 한번 둘러보았다.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떠나야 한다면 지금 이 가게는 정리해야 하겠지.
“그럼 여행이 아니라 아예 가게를 접어야겠네요. 좀 아깝긴 하다.”
“가격에 비해 제법 괜찮은 건물이기도 했고, 열심히 꾸미셨으니까요.”
모나한이 자신도 정이 많이 들었다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정리하는 게 좋겠어요. 뱀파이어가 되면 이상함을 느낄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고, 다른 소설과 만나려면 다른 도시로 가는 게 좋을 테니까요.”
“어차피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면 마차를 사는 건 어때요?”
“마차요?”
“네. 요리 마차를 말하는 거예요. 이번에 유행하고 있다는 마차에 요리 기구를 집어넣어서 장소를 바꾸면서 요리를 하는 마차요.”
로나는 모나한의 말에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계산대 아래에서 종이를 꺼내 ‘요리 마차’를 적고 연필 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괜찮은 거 같아요. 어딘가 정착했다가 다시 떠나기도 쉬울 거고.”
“계속 여행하다가 새로운 이야기와 만나면 그 마을에 적당한 건물을 사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정착하는 거죠.”
“그리고 끝나면 다시 요리 마차와 함께 여행을 가고요.”
“요리 마차는 보통 도시 안에서나 커다란 길을 따라서만 움직이지만, 뱀파이어가 되면 안전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겠네요.”
로나는 모나한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손을 움직여 자신이 상상하는 요리 마차를 그렸다.
그녀의 그림 솜씨는 미묘하기 그지없어서 모나한은 연필의 까만 선들을 보며 키득거렸다.
로나는 그 웃음을 넘기며 네모를 그리고 그 안에 ‘오븐’이라고 쓰고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리면서 말했다.
“게다가 요즘 신상 마법 오븐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온도 조절이 더 섬세해지고, 빨리 데워지는 데다가, 열도 골고루 퍼지는!”
“아, 카탈로그가 왔었죠.”
“맞아요! 그거 보고 얼마나 가지고 싶던지…….”
“다른 건 별 욕심 없으면서 이상하게 제빵 도구에만 관심이 높으시다니까.”
“전 제빵사잖아요.”
로나가 반짝이는 눈을 하며 말했다.
어렸을 때야 자신이 왜 제빵사가 돼야 하냐고 투덜거렸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직업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로나였다.
“그럼 마차 빵집에 신상 오븐을 넣어서 만들어 달라고 해요. 견적 한번 보러 갈까요?”
“좋아요.”
“우선 오늘 장사 끝나고 가요. 가는 김에 저녁도 밖에서 먹을까요?”
“아주 좋네요.”
둘이 그렇게 계산대에서 도란거리기를 한참,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오는 종소리가 ‘딸랑-!’ 하고 울렸고 둘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손님을 보며 인사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둘은 장사를 끝내고 가게를 정리한 후 손을 잡고 마차 견적을 내러 상점으로 향했다.
* * *
“대형 마차는 역시 비싸네요.”
“좋은 원목으로 만든 거라 더 그렇죠. 거기다가 여러 가지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잘 부서지지 않게 하는 마법에, 방수 기능에다가, 화염 내성에-”
“흔들림 방지, 공간 확장,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실드 마법.”
“여기에 신상 마법 오븐이랑 냉장고, 조리대까지 넣으면…….”
이것이야말로 풀 옵션인가.
전생에 생각지도 못했던 풀 옵션 자동차를 풀 옵션 마차로 갖게 되는 건가.
“뭐, 전부 넣으면 그렇게 되는 거요. 장거리용 마법 마차에 노점상을 합치면 그렇게 된다- 이 말이지.”
상인은 탁자에 깃펜을 툭툭거리며 말했다.
로나와 모나한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빵집을 하기 위한 푸드 트럭- 아니, 푸드 마차를 만들러 마차 공작소에 들렀다.
그리고 지금은 상인과 탁자에 앉아서 견적서를 뽑는 중이었다.
“뭐, 가장 좋은 것들로만 채우면 이렇게 된다- 이 말이고, 사실 이제 하나씩 빼 가면서 가격을 맞춰 봐야지. 이거 이대로 하면 집 한 채 값 떡하니 나와요.”
“집 한 채 값…….”
“그리고 이렇게 만들면 마차만 만들고 끝이 아니라, 주위를 지켜 줄 호위도 고용해야 할 거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마차가 돌아다니는데, 산적이나 도적들이 잘도 가만 놔두겠소. 그렇게까지 하면 돈 먹는 오크지!”
상인은 으하하 웃으며 말하고는 이것과 이것, 이것을 빼는 걸 추천한다면서, 견적서의 부분 부분을 콕콕콕 찍었다.
견적서 위에 깃펜의 검은 잉크가 똑똑똑 남았다.
로나는 그 검은 잉크 자국을 보며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생각보다 엄청 많은 기능이 있네요.”
“마탑이 여기에 뛰어들면서 여러 가지로 발전했습죠. 그리고 이게 생각보다 돈이 되는 데다가 여기저기 잘 쓰이다 보니 여러 돈 많은 이들이 뛰어들고, 그러다 보면 또 발전하고- 그런 거요.”
“어디까지 해야 가장 적당하려나…….”
“저는 제일 좋은 걸로 했으면 좋겠어요.”
로나가 고민하는 얼굴로 마차 상인이 건네준 기능 목록을 읽고 있자, 옆에 앉아 있던 모나한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돈이 부족하면 제가 보탤게요. 아니면 제가 사도 되고요.”
“음……. 돈은 안 부족해요. 제 주머니 안은 생각보다 든든하거든요.”
로나는 가방 안에 넣어진 든든한 돈주머니를 툭툭 쓰다듬으며 말했다.
원래 그 정도로 돈이 많지는 않았다.
1년 전 즈음에 지금의 빵집 건물을 사려고 큰돈을 쓰기도 했고, 그동안 많이 벌긴 했지만 턱 하니 집 한 채 값을 낼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틸라가 사과하면서 주고 간 주머니.
그녀의 외모에 어울리게 아름다운 검정에 붉은 실과 황금색 실로 우아한 무늬를 수 놓은 비싸 보이는 돈주머니.
로나는 그날 밤 방에 들어와 별생각 없이 침대 위에 주머니를 뒤집었다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금화와 보석들이 와르르 쏟아져 새하얀 이불 위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오색찬란하게 반짝였던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계산해 보니 광장 상점 세 개는 살 수 있는 금액…….
모틸라 님, 엄청난 부자셨다.
로나가 순간적으로 모틸라가 한 열 번 정도는 더 폐를 끼쳐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무튼, 주머니가 든든해진 로나는 금액 걱정은 저 멀리 밀어 넣은 채, 마차 상인이 건넨 견적서를 톡톡 건드렸다.
“이거 오래 쓸 순 있는 거겠죠?”
로나는 마차 견적서를 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마차는 온갖 고생을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정말 뱀파이어가 된다면 아주 오래 사용하게 될 거고, 포장된 길뿐만 아니라 정비되지 않은 길들도 돌아다니게 될 예정인 데다가, 이야기 속 등장인물을 만나면서 갖가지 이벤트에 시달리게 될 것 아닌가.
이왕 사는 거 아주 오래 쓸 수 있는 튼튼한 놈이 갖고 싶었다.
“이걸 좀……. 뭐랄까. 직접 수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 순 없을까요?”
“으잉?”
“그러니까 아마추어들도 수리할 수 있게요. 아니면 수리 방법을 공부하기 쉽게.”
“……그야 좀 더 손을 쓰면 가능한데……. 그보다는 마을 대장간이나 마차 만드는 데 가서 고쳐 달라 하는 게 편할 거요.”
“산 같은 데서 멈추면 손색없이 버려야 하잖아요. 그러기에 이건 너무 비싼 마차고요.”
“그건 그렇지……. 으음……. 그쪽 기술은 있수?”
“없어요.”
“전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럼 좀 곤란한데…….”
마차 상인은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다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제가 직접 배울 의향도 있으니까요. 그 점을 좀 신경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뭐, 우리 쪽에서 좀 신경 쓰고, 설계도도 좀 드리고 하면 되겠지. 다만 그러면 좀 더 뭐랄까…… 금액이…….”
“드리죠.”
로나는 망설이지 않고 온 안쪽에 넣어 놓았던 돈주머니를 주섬주섬 꺼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많은 데다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면 더더욱 돈은 문제가 아니게 될 것 같았다.
앞으로 수많은 시간 동안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여기서 아낄 필요는 없겠지.
망설임 없이 뻗어지는 로나의 손을 모나한이 살짝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반 내게 해 주세요.”
“네?”
“로나가 마차를 전부 사지 말고요. 저도 반 낼게요.”
“어, 음…….”
“저랑 계속 같이 다닐 거잖아요. 설마 절 두고 가실 생각은 아니시죠?”
“그런 생각 해 본 적도 없는데요.”
“그럼 로나의 마차로 하지 말고, 우리 둘의 마차로 하게 해 주세요. 괜찮죠?”
그 얼굴은 오랜만의 순종과 애교를 넣은 토끼 같은 얼굴이어서 로나는 순간 그의 볼을 쓰다듬으려는 손을 멈췄다.
이런. 모나한의 미모에 너무 적응돼서 이제는 물러나기보다 쓰다듬으려고 손이 나간다.
위험해, 위험해.
로나는 겨우겨우 손을 멈추고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고, 모나한이 해사하게 웃으며 자신의 돈을 넣어 놓은 주머니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상당히 묵직한 돈주머니 소리가 ‘짤랑!’ 하고 울리며 탁자에 올려졌고, 그 뒤를 따라 로나의 돈주머니가 ‘짤랑!’ 하며 무거운 소리를 내었다.
로나가 돈이 있다는 소리를 할 때부터 침을 꿀꺽 삼키고 기대에 찬 눈빛이 되었던 마차 상인이 그 묵직한 소리에 침을 한 번 더 꿀떡 삼켰다.
눈앞에 신혼부부로 보이는 이 남녀는 생각보다 엄청난 부호의 손님들이었던 모양이다.
“그, 그럼 이대로 계산해 드리면 되는 걸깝쇼?”
“혹시 뭐 더 추천할 만한 게 있나요? 이왕이면 가장 제대로 된 걸로 하고 싶은데.”
“이야- 물론 있습죠! 우선 이 외관을 더 고급스럽게-”
“외관은 필요 없어요.”
“아이구, 손님. 내부를 더 중시하시는 분이시구나! 그럼요, 그럼요. 그게 더 깔쌈하고 좋죠!”
묘하게 저자세가 됨과 동시에 싱글벙글한 얼굴은 한 마차 상인을 보며, 로나는 익숙한 자본주의의 냄새를 맡았다.
“이게 뭐랄까아……. 마차도 마법 쪽으로 가면 무궁무진하단 말이죠. 공간 확장을 좀 더 해서 더 넓게 쓸 수도 있고, 이 무게를 줄이는 마법 진은 꼭 넣으십쇼! 적은 수의 말로도 움직일 수 있게 되니까! 온도 조절 마법도 좀 넣고, 조명에다가-”
응? 자본주의가 아니라 덕후의 냄새였나.
상인 아저씨의 얼굴이 마치 자신이 생각하던 궁극의 마차를 생각하는 표정이 됐는데.
“요즘 정령석을 넣는 기술도 시중에 풀렸다고 들었는데요. 그걸 활용할 순 없습니까?”
“아이고! 뭘 좀 아시는 손님이구만! 이거 이거, 바람의 정령석을 활용하면 이런 식으로-”
“속도가 높아지는 데는 이 마법 진이-”
“연료 효율은 이쪽을-”
로나는 갑자기 상인의 말에 끼어들어 상기된 얼굴로 말하기 시작하는 모나한을 바라보았다.
어라, 이거 그건가?
전생의 자동차 덕후들의 연비 어쩌고? 속도 저쩌고?
로나는 갑자기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