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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에는 조금 이상한 이야기와 엮이긴 했지만, 저런 이야기보다는 다른 내용이 많거든요.”
“아실라 이야기는 솔직히 너무…… 유치……. 음, 오글…… 이걸 뭐라고 한다 했죠?”
“중2병.”
“네, 사춘기의 비대한 자아에서 탄생한 괴물 같았어요.”
“그런 이야기는 많지 않아요. 어쩌다 한 번씩 있거나 개그용으로 쓰일 뿐이죠. 보통은 음…….”
피폐, 북부 공작, 악녀, 신녀, 구원, 후회물- 등등등의 생각나는 키워드를 중얼거리면서 모나한에게 설명했다.
“바로 기억하라는 건 아니고요. 사실 저는 로맨스 소설뿐만 아니라 판타지 소설도 많이 봤거든요. 근데 그런 건 너무 스케일이 커서…….”
“빵집인데도 스케일이 그만큼 커질까요?”
“어, 잘 모르겠네요. 솔직히 닥쳐 봐야 알 것 같아요.”
“그럼 하나는 확실하네요.”
“네?”
“로나가 뱀파이어가 돼야 한다는 거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면 우선 로나가 강해져야죠.
모나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계산대 위에 올려져 있던 로나의 손등을 도닥거렸다.
“뱀파이어가 되면 신체적으로 강해질 테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더 버틸 수 있겠죠.”
“으음…….”
“그러니까 하루빨리 수도에 가는 걸로 하죠!”
모나한의 말에 로나는 그러는 게 좋겠다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오늘로 아실라의 이야기도 끝난 것 같은데, 며칠 즈음 여행을 갔다 와도 괜찮으리라.
그러다가 로나는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미간을 좁히며 모나한에게 물었다.
“……혹시 수도에 갔다가 소설 속 등장인물을 만나게 되는 건 아니겠죠?”
“그것참 무서운 말이네요. 근데 이미 왕자도 만났잖아요.”
“아직 공작을 못 만나서요. 이 왕국에 젊은 나이에 공작이 된 인물 없죠? 예를 들어 북부라든가, 북부라든가, 북부 같은 곳의 공작 말이죠.”
“……북부가 많은데요? 온 세계의 북부 공작은 다 모으실 생각이신지. 아무튼, 마침 옆 나라에 한 분 있긴 하죠. 젊은 북부 공작.”
“있었냐!”
“이 왕국에는 나이 든 공작들밖에 없는 걸로 알아요. 소설 속 남주들 중 북부 공작이 많나 보죠?”
로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이 나라 수도에 가는 것은 괜찮겠다고 중얼거렸다.
“굳이 소설 속 주인공들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잖아요. 만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우리가 찾으러 다니지는 말자고요.”
로나가 귀찮다는 목소리로 말하자마자, 그녀의 귀에 ‘띠링-!’ 하는 이제는 짜증 나기까지 하는 알림 소리가 울렸다.
로나는 미간을 와락 찌푸린 채로 투덜거리며 상태창을 열었다.
-다음 이야기와 조우할 시 보상으로 한식 레시피 하나를 제공합니다.
-첫 번째 한식 레시피 특전으로 다음 보상은 ‘김치 레시피’입니다.
“헐.”
“왜 그러세요, 로나?”
“한식 레시피 떴어요.”
“……네?”
“그것도 김치 레시피를 준대요.”
“……네?”
모나한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뒤로하고 로나는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푸르른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뭐냐? 지금 나랑 밀당하냐?
밀당은 모나한이랑 하는 걸로 충분하거든?
감히 한식 레시피로 날 꼬실 생각을 했나 본데, 그거면 내가 넘어갈 줄 알아!?
“얘 참 어이없지 않아요? 아니, 다른 소설과 조우하면 한식 레시피를 준다잖아요! 한식 레시피 같은 걸로 내가 넘어갈 줄 알아? 물론 김치 하나 있으면 온갖 한식을 해 먹을 수 있겠지! 김치찌개라든가, 김치볶음밥이라든가, 김치전이라든가-”
콩비지 찌개, 돼지 김치찜, 김장 김치에 수육, 고기 구울 때 같이 구워 먹어도 맛있고, 김밥에 넣어 먹어도 맛있고, 묵은지 감자탕이라든가, 두부김치랑 김치말이 국수랑-.
“-등등을 만들 수 있겠지만, 전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넘어간 것 같은데요.”
“전 이런 걸로 흔들리지 않아요!”
“충분히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로나가 비장하게 외쳤지만, 말하고 있는 로나도 모나한도 믿고 있지 않았다.
모나한은 그런 로나의 울부짖음을 잠깐 듣고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고민하기를 잠깐, 그의 머리 위로 노란색 느낌표가 ‘팟!’ 하고 떴다.
순간 무언가 엄청난 것을 깨달은 얼굴을 한 모나한이 갑자기 표정을 매우 부드럽고 너그럽게 바꾸었다.
그리고 로나의 어깨에 하얗고 잘생긴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넘어가 주세요. 상태창 이 아이도 얼마나 힘들면 한식 레시피를 걸었겠어요.”
“……네?”
목소리까지 매우 나긋나긋해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 가는 행동이었다.
그런 모나한에게 로나가 뭐라 묻기도 전에 그가 활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새로운 레시피 하나면 그만큼 많은 새로운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 쓰읍- 아니, 제가 먹고 싶은 건 아니고.”
“침 흘러요, 모나한.”
“이래 봬도 제가 미식가인지라. 식욕의 노예인지라.”
“그건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지 말고 로나, 로나도 먹고 싶잖아요? 김치라면 그거 맞죠? 로나가 고춧가루로 무언가 열심히 만들려고 했던 그거. 세콤, 매콤, 짭조름하면서 약 5,000만 인구수의 대한민국 사람들의 식탁에 언제나 올라갔다는 그거죠?”
“……모나한?”
“수도에 들렀다가 옆 나라로 가서 그 북부 공작님 영지에 한번 가 볼까요? 거기가 위쪽이라 눈이 많이 오는데, 거기 첫눈 축제가 그렇게 멋있다고-”
어이, 식욕의 노예 씨.
당신이 나보다 김치에 더 진심인 것 같소?
잘 생각해 보니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섰나 보지?
“모나한은 제가 상태창에 넘어가면 말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뇨? 물론 로나를 힘들게 한 점에 대해서는 맘에 안 들지만, 온갖 화려한 제빵 레시피와 새로운 한식 재료를 줄 때는 ‘어화둥둥.’, ‘아이고, 예뻐!’ 해 주고 싶은데요. 그래서 전 중립입니다.”
모나한이 단호한 목소리와 표정을 하고 말했다.
“어차피 제가 상태창을 미워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마음 같아선 검으로 한번 썰어 보고 주먹질도 좀 해 보고 싶은데……. 눈에도 안 보이고 만질 수도 없는걸요.”
모나한은 그렇게 말하며 실제로 상태창이 있는 허공을 손으로 휘저었다.
로나의 눈에만 보이는 푸르른 상태창이 그의 손짓에 따라 잠깐 어그러졌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왔다.
“으음……. 사실 저도 주먹질도 해 보고 밀대로도 패 봤는데, 허공에 일렁이기만 하고 안 되더라고요.”
“그렇죠. 어차피 해결 방법 없는 거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좋죠. 이용해 먹어요, 이용.”
그건……. 그렇지…….
로나는 모나한의 말에 동감하며 눈앞의 상태창을 빤히 바라보다가 푹 한숨 쉬었다.
모나한의 말이 맞았다.
이걸 없앨 수도, 때릴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없애 버리고 싶다고 하기에는, 솔직히 지금까지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상태창이 없었으면 제빵사가 되지도 못했을 거고, 이만큼 많은 돈을 벌지도 못했을 테니까.
지금까지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상태창 덕분이기도 했다.
시골의 제 친구들은 아직도 하루 종일 집안일이나 농사를 하거나 다른 집 바느질거리를 받아 하루 일당으로 먹고살곤 했으니까.
성인이 되자마자 집에서 뛰쳐나올 수 있었던 것도, 결혼 적령기를 놓치고도 마을에서 별소리를 듣지 않은 것도, 어딘가에 팔리듯이 시집가거나, 하루하루 밥 먹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상태창 덕분이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의 시골 평민 여자의 삶이란 전생에 비해선 아주 지옥 같았으니까.
“하긴, 상태창이 없었으면 저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어, 음.”
“저한테 열다섯 살에 시집가서 아이를 낳으라고 했으면, 도망갔을걸요? 하루하루 바느질해서 먹고살라고 하면, 괭이로 하나하나 밭을 일궈서 농사일하라고 하면, 죽을 때까지 이불 속에 있는 것들이 지푸라기와 기운 천, 벌레들이라고 하면. 전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상태창이 있어서, 버텼는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은 깨끗한 건물에서 깨끗하게 씻고, 보드라운 이불 속에서 잘 수 있잖아요.
로나는 조금은 밝고, 조금은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모나한이 뭐라고 위로하기도 전에 말끝을 돌렸다.
“그러면 이 도시에 계속 있을 필요가 없는 거네요? 다음 이야기를 찾으러 가는 게 좋잖아요.”
“그럼 수도에 들러서 제 동족들을 만나고, 로나 씨가 뱀파이어가 된 다음에-”
“새로운 공작님을 찾아 옆 나라로 가 본다!”
그리고 모나한도 로나가 말을 돌리는 것에 동참하여 밝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모틸라를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네?”
밝은 목소리로 맞장구치던 모나한의 목소리가 삑사리 났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여행하다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만나고 싶으세요?”
“저는 별로 생각 없지만, 모나한은 만나고 싶을 것 같아서요.”
그녀가 사랑하는 것 중에는 모나한도 있을 것 같거든요.
로나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고, 모나한은 기겁한 표정이 되어 소리쳤다.
“사랑이라뇨!!”
“가족 같은 사랑요. 딱 봐도 남매 같던데.”
“그런 걸로 엮지 말아 주겠습니까아아!! 그건 뭐랄까, 뭐지, 그- 악우 같은 거라고요. 옆에 있으면 짜증 나고, 성질나고, 한심해 죽겠고, 사고 좀 그만 쳤으면 좋겠고!!”
“와. 오빠가 여동생 보는 시선 같다. 모틸라도 찐 여동생이 오빠 보는 눈으로 모나한 보던데.”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런 사이 아닙니다!”
모나한이 온몸으로 부정하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어느새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웬만해선 숨이 거칠어지지 않는데, 감정의 동요가 진짜 컸나 봐? 그렇게 싫냐.
“아무튼 전 모틸라가 그냥 그렇게 가 버린 게 신경 쓰였어요. 전 웬만하면 ‘그런 갑다-’ 하고 넘기는데……. 모나한의 친구잖아요.”
모나한은 작게 “친구도 아니에요…….”라고 중얼거렸지만, 괜찮다거나 만날 필요 없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이야기를 한번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술도 한잔 마시든지, 밥을 한번 먹든지.”
“……알았어요. 여행 가는 길에 모틸라가 좋아했던 곳을 한번 들러 봐요.”
“제 빵도 한번 먹이고 싶단 말이죠. 탁자에 있던 빵에는 손도 안 대고 가서…….”
“그럴 정신이 없었나 보죠. 모틸라를 만나면 그때는 꼭 먹이기로 해요.”
“그래도 만나긴 어렵겠죠? 그, 얼마 안 있으면……. 음, 수명이…….”
로나는 모나한에게 직접적으로 ‘죽는다’라고 말하기 힘들어 말끝을 흐렸다.
그 배려에 모나한이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60년 남았으니 한 번은 만나겠죠.”
“……60년요?”
“뱀파이어에게 주름이 생기면 약 60년 정도 더 살고 죽거든요.”
“……60년요!”
“네. 60년요.”
그건 그냥 인간으로 치면 한평생이잖아!
이 세계에서 평민의 평균 수명이랑 똑같잖아!
몇 년 안 남았다며! 몇 ‘십’ 년 안 남은 거잖아!!
몇십 년을 몇 년으로 줄이냐!!
말 똑바로 안 할래!?
“아직 한참 멀었잖아요!”
“뱀파이어한테 60년이면 짧은 세월이라고요.”
“아니 무슨-”
로나는 그런 헛소리하느냐고 소리치려다가 말을 줄였다.
순간 그녀는 햇빛이 가득 들어오던 창문가에 앉아 있던 모틸라를 떠올린다.
햇살 아래서 눈물을 흘리던 모틸라.
햇살 사이로 사라지던 모틸라.
섧게 웃던 얼굴.
소중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에 둘러싸일 60년.
그런 시간이 그만큼이나 되면.
“그래요, 뭐.”
로나는 조금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로 길면 최소 한 번쯤은 꼭 보겠네요.”
사랑하는 것들에 둘러싸인 또 다른 뱀파이어를, 만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