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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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는 아실라의 치마가 문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언젠가 검은 복도에서 아실라의 눈을 바라보았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때와 다르게 아실라는 조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멈추지도 않고 나아갔다.

로나는 깨달았다.

게임이 끝났다.

현실이 되었다.

띠링-!

언제나 들리던 소리가 오늘따라 멀고 아득하게 울렸다.

로나는 반사적으로 상태창을 켜서 그 푸르른 빛 위로 떠오르는 알림을 읽어 내려갔다.

-축하합니다. ‘틸레아의 분홍 꽃’이 끝났습니다. 이제 ‘틸레아의 분홍 꽃’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에게 얻는 경험치와 빵 코인이 정상화됩니다.

로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문장의 ‘끝’이라는 단어에 손을 올린다.

언제나와 같이 푸르른 상태창은 손끝에서 일그러져 일렁일 뿐이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단어는 분명 ‘끝’이었고, 그 말은-.

“……현실이다.”

로나는 스스로 내뱉은 말에 흠칫 놀랐다.

꼭 어떠한 연극이 하나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언제나 맡았던 평범한 공기가 왠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눈을 감고, 냄새의 끝을 붙잡았다.

빵 냄새, 설탕 냄새, 햇빛에 달아오른 나무 냄새-.

띠링-!

그러다가 울리는 알람 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뜬다.

방금까지의 아련하게 울리던 소리와는 달리 이상하게도 조금 더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

푸르른 상태창이 다시 눈앞을 비추고 로나의 갈색 눈동자가 그것을 읽는다.

-보상으로 새로운 명칭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명칭?”

-받으시겠습니까? (네/아니오)

로나는 반사적으로 ‘네’의 위에 손을 올렸다가 멈추었다.

손끝에 푸르른 빛이 넘실댄다.

로나는 왠지 이 순간이 무언가의 끝임과 동시에, 또 다른 시작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수없이 그랬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만두었던 것을 했다.

상태창에 대화를 거는 것.

단 한 번도 답이 없었던 상대에게 물었던 수많은 질문들.

“……아니오를 누르면 어떻게 되는데?”

로나는 이번 물음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버릴 줄 알았다.

그러나 귓가에는 띠링- 하고 맑은 음이 울렸고, 생애 처음으로 시스템 창이 대답했다.

-‘네’를 누를 시에 당신은 뱀파이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수많은 이야기들과 접촉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오’를 누를 시에 당신은 뱀파이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어떠한 이야기도 마주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로나는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그 답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어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시절 그토록 원했던 어떤 이야기의 초반부가 방금 지나갔다는 것을 불현듯이 깨닫는다.

잠깐 지나가는 엑스트라, 조연, 악녀- 주인공.

“……옴니버스식 구성.”

한 가지 공통된 주제나 소재를 중심으로 독립된 짧은 이야기가 여러 편 엮어 나가는 이야기 형식.

모든 이야기에 한 번쯤은 나오기 쉬운 평범하고 작은 빵집.

그 빵집에서 일어나는 이세계 주인공들의……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명칭인 ‘빵집의 주인’.

로나는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던 어떠한 순간이 생각났다.

모나한이 자신을 하수인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떠올랐던 알람.

-당신의 명칭은 ‘빵집의 주인’이므로, ‘뱀파이어의 하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과거 빵을 처음 만들었던 순간이 아니라, ‘빵집 주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순간 울리던 알람.

-빵집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명칭의 레벨이 오릅니다.

Lv.1이 아니라 Lv.0에서 시작했던 명칭.

그리고 이상하게도, 정말로 이상하게도.

한 번도 지으려고 하지 않고, 그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던 자신의 빵집 이름.

그저 ‘빵집’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곳.

로나는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울렁거림에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리며 몸을 숙였다.

가게 한쪽에서 테이블을 닦고 있던 모나한이 놀라며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로나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푸르른 상태창만을 바라보았다.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내가 언제 시작되냐고 미친 듯이 소리쳤던 이야기의 시작은 거기서부터였다.

전생에 죽던 순간이 아니라, 기억을 가지고 환생했던 순간이 아니라, 상태창을 열었던 순간도, 빵을 처음으로 만들었던 순간도 아닌.

바로 ‘빵집의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그래.

활자로 적히는 이야기들은 때로 10년이란 시간을 몇 줄짜리로 없애 버리고는 하니까.

자신의 그 흔들렸던 시간들, 울었던 나날, 뭉개져 버린 반죽들이 그저 몇 줄짜리 활자들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로나는 반사적으로 차오르는 분노와 울분에 ‘아니오’의 앞으로 손을 올렸다가 멈추었다.

어느새 다가온 선홍색 눈동자가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얼굴엔 온통 푸르른 상태창의 빛으로 가득할 텐데, 모나한은 그저 평소와 같았다.

부스스한 회색 머리, 조금은 창백한 피부, 선홍색 눈동자.

얼굴에 내리쬐는 빛은 창문 가득 들어오는 햇빛이고, 그 얼굴을 채운 감정은 선명한 걱정과 사랑이었으므로.

로나는 푸르른 빛을 피해 눈을 감았다.

그녀가 ‘아니오’를 누르는 순간 자신은 두 번 다시 이세계의 이야기와 엮일 일이 없으리라.

제 인생은 언제나와 같이 빵을 반죽해서 오븐에 구워 내는 것으로 끝날 것이리라.

그녀가 포기해서, 그리하여 결국 가장 원하게 되었던 평범한 생활로.

그러나 그 순간, 로나는 자신이 모나한을 영원히 외롭게 하리란 걸 알았다.

왜냐하면, 다른 명칭을 갖지 못하게 될 테니까.

‘뱀파이어의 하수인’을 갖지 못했던 것처럼, 아무리 모나한이 피를 나누어 주더라도 ‘뱀파이어’가 될 수 없게 될 테니까.

“모나한.”

“네, 로나.”

모나한이 무언가 직감한 것처럼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다가와 저를 붙잡는 손이 서늘했다.

그리고 그 차가움이 오히려 로나를 굳세게 하였다.

“온 평생 어떠한 이야기 속에 끌려다니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아무런 이유 없이요?”

“글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가는 알겠어요.”

“어떤 대가를 받는 거죠?”

“……당신요.”

모나한은 로나의 말에 무언가 가늠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로나의 눈에만 보이는 그 푸르른 창을 보려고 허공을 헤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갈색의 나무, 햇빛, 땋은 머리의 로나, 평범한 빵집이라서.

모나한은 다시 천천히 시선을 돌려 로나를 바라보았다.

어떠한 푸른빛도 비치지 않는, 그저 갈색빛으로 일렁이는 눈동자를.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 아주 이기적으로 물어볼게요.”

그는 그 눈동자의 불안을 보면서 물었다.

“우리가 함께인가요?”

그리고 사랑을 말했다.

로나는 모나한의 선홍색 눈동자가 너무도 선명해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네.”

푸르른 상태창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귓가에 울리는 선명한 알림을 들으면서-.

-축하합니다. 이제 새로운 명칭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웃었다.

그런 노래 가사가 있었지.

이렇게 빌어먹을 세상인데도 당신이 있어 괜찮은 세상이라 생각하게 된다고.

모나한의 말이 맞았다.

대가가 당신이라면, 괜찮았다.

* * *

로나는 모나한에게 자신이 상태창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알려 주었다.

아실라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는 것을,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을 줄 알았던 자신이, 사실은 어떠한 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로나가 그렇게 엄청난 얼굴을 하고 있었군요?”

“엄청난 얼굴요?”

“음……. 세상이 완전히 뒤바뀐 얼굴?”

“그런 기분이긴 했죠.”

모나한은 로나의 말에 조금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했다가 부러 가볍게 농담을 건넸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레몬차가 들려져 있었다.

달콤하고 시큼한 냄새가 따뜻한 수증기와 함께 코끝에서 넘실거렸다.

아실라를 처음 만나면서 불안해했던 자신에게 그가 해 주었던, 불안이 사라졌던 어느 순간부터 마시지 않았던 레몬 차가 다시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데워 주고 있었다.

“모나한이 저에게 주문을 걸려고 했던 순간 기억나요?”

“제 머리를 밀대로 빠개려고 했던 순간요?”

“네. 그 순간요.”

로나는 모나한의 장난기 섞인 말에 조금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데우는 레몬티와 모나한의 농담에 울렁거리며 몰려왔던 불안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상하게 제가 뱀파이어 하수인이 안 됐잖아요. 그게 상태창 덕분이었나 봐요.”

“아, 그래서…….”

“제 명칭은 단 하나, ‘빵집의 주인’이니까. 다른 명칭은 가지지 못하는 거죠.”

“……설마-”

“맞아요. 모나한이 저에게 피를 나눠 주어도 저는 뱀파이어가 되지 못하는 거죠.”

저는 ‘빵집의 주인’이니까.

로나의 말에 모나한이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그런 모나한의 굳을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검지를 들어 턱 끝을 살짝 찔렀다.

레몬티로 데워진 따뜻한 손끝이 차가운 피부에 닿았다.

“선택하라고 하더라고요. 뱀파이어가 되는 대신에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날 건지, 아니면-”

“뱀파이어가 되지 않는 대신에, 다시는 어떠한 이야기와 만나지 않겠군요.”

당신이 원하던 그저 ‘현실’에서 살게 되겠네요.

모나한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홍색 눈동자를 회색 속눈썹 사이로 낮게 가라앉힌 채였다.

“제 이기적이란 말이……. 정말로 이기적이었네요.”

그는 로나가 어떤 선택지를 골랐는지 알아차렸다.

자신이 했던 ‘함께’라는 단어가 그녀를 부추겼으리라.

로나는 모나한의 그 죄책감 어린 표정을 보다가 턱 끝을 찌르고 있던 손을 펴 모나한의 볼을 감쌌다.

차가운 피부가 뜨거운 손바닥과 닿아 선명히 느껴졌다.

“그렇게 하자면 제 선택도 이기적이었어요.”

그리고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온기는 섞여서 따뜻한 색으로 같아졌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고,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이제 제 평범에는 언제나, 당신이 있거든요.

로나가 같은 온도의 뺨을 쓰다듬으며 조금 여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모나한은 이제 강제로 온갖 이야기들과 엮이게 될 거라고요? 제 선택 때문에 말이죠.”

“으음……. 계속 제 옆에 있어 주실 거죠?”

“그건 제가 할 질문인데요. 제 옆에 있어 줄 거죠, 모나한?”

로나는 모나한이 그녀가 ‘네’를 골랐으리라 당연하게 믿었던 것처럼, 그가 당연하게 자신의 옆에 있어 줄 거라 확신하며 물었다.

모나한은 그 물음에 입술을 올리며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로나.”

미안하지만, 솔직히 조금 만족스럽네요.

모나한은 그렇게 말하며 눈꼬리를 낮추자 로나가 모나한의 미간으로 콕 찍으며 말했다.

“됐어요. 조금도 아니면서.”

“음. 사실 많이 만족스럽군요. 제가 로나에게 제 사랑을 주입한 보람이 있네요. 이럴 수가! 로나도 그만큼이나 절 사랑하게 됐다니!”

“흐음.”

“물론 제 사랑이 훨씬 크지만요. 알고 있죠?”

“그래요, 뭐. 그렇다고 치죠.”

로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계산대에 손끝을 몇 번 토닥였다.

앞으로 수많은 이야기들과 엮일 것 같은데 그에 대해 조금 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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