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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마치 이야기 속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하며.
피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는 것이- 왠지 매우 느리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바라보았다.
피아나는 방에서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던 금발이 아니라, 평소보다 늘어져 처연하게 세팅된 머리를 하고 있었다.
금발이 아름답게 살랑거리고, 평소의 화려한 옷이 아니라 수수한 옷과 화장이 그녀를 처연하고 불쌍하게 보이게 하였다.
“미안해.”
피아나가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너무 질투 나서 그랬어. 너는 인기가 많으니까…… 질투가 나서.”
그녀는 손을 다소곳이 잡고, 몇 번 매만지고, 눈을 깜박였다.
“아버지가 와서 크게 혼이 났어. 너한테 사과하지 않으면, 절연해 버리겠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확 들더라. 내가 너한테 참 큰 잘못을 한 거 같아.”
그 말을 한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두 손을 꼭 잡아, 가슴에 대고, 입술을 깨물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용서해 줄 거지? 응?”
그리고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실라는 그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왠지 멍한 얼굴의 자신이 그 눈에 비치다가, 감기는 눈꺼풀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대답을, 해야 했다.
“쟤 진짜 용서해 주는 거야?”
“그럴걸. 아실라 진짜 착하잖아.”
“정말? 와, 진짜 무슨 성녀다. 자신을 죽일 뻔한 사람도 용서하고.”
괜찮아. 용서할게. 사과를 받아들일게.
“근데 쟤 진짜 반성하는 거야?”
“공작님이 절연한다잖아. 무서워서라도 사과해야지.”
네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
아실라가,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하는 말.
착한 말. 위로되는 말. 구원하는 말.
그리고 그녀에게 주어진 대사.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야 했다.
자신이 불쌍한 피아나를 용서하고, 피아나는 제 용서에 감격하고, 남주들은 그런 저의 착한 모습에 감동하고.
주위의 엑스트라들은 박수를 쳐야 한다.
화려한 파티장 안에서, 군중들의 가운데에서, 새하얀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착한 여자 주인공이 해야 할 대사.
그녀는 입을 열어 말을 뱉으려다가, 왠지 시야가 흐려져서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눈을 한번 세게 감았다가 다시 뜨며 생각했다.
착한 말을 해야 해. 나는 착한 아이니까.
그래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시야에, 손을 들어 눈을 조금 비볐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하니까, 착하게 굴면, 모두가 나를-.
그러다가, 의문이 든다.
나는 언제나 착하게 행동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애썼다.
언제나 좋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그러면 모두가 자신을 사랑해 주니까.
그러나, 정말?
저기 봐.
피아나는 너를 싫어하는걸.
생각해 봐.
로나 씨와 모나한 씨는 너를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걸.
지금까지 정말 모두가 너를 사랑하기만 했어?
지금까지 정말 모두가 너를 좋아하기만 했니?
너는 정말로, 정말로.
저 사과를 받아들이고 싶어?
“……싫어.”
“뭐?”
아실라는 갑자기 명확해진 시야를 들어 피아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물이 가득한 눈동자를 보았다.
온통 수수하고 처연하게 만들어진 모습 가운데, 반성이나 죄책감 같은 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눈동자를 본다.
“싫어.”
그녀는 싫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서도 왠지 무서워서, 제 치마를 꼬옥 쥐었다.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했던 치마가, 제 손 아래서 주름지며 우그러졌다.
“난 네 사과를 받아들이기 싫어. 나는, 나는-”
“너무해! 네가 받아 주지 않으면, 나는 절연 당한단 말이야!”
덜덜 떨면서 싫다고 말하는 아실라에게 피아나가 소리쳤다.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너 때문에 나는 이제 아버지에게 버림받을 거야! 그냥 사과하나 받아 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녀는 마치 아실라가 잘못한 것처럼 굴었다.
자신이 피해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내가 미안해,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흑!”
피아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고,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뇌 한 부분이 득실거리며 제 자신에게 속삭였다.
착한 아이는 저걸 받아들여야지.
그렇지?
저 애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잖아? 저 애도 행복하게 하고 싶잖아.
언제나 그랬듯이, 착한 말을 해.
착한 아이가 되자.
하지만, 하지만.
그러다가 아실라는 로나를 떠올렸다.
자신의 말에 단호히 반대하던 목소리.
그러다가 아실라는 모나한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상관하지 말라던 무심한 눈동자.
그러다가 아실라는 베라를 떠올렸다.
어딘가에는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는 말.
모두가 자신을 좋아할 수는 없다는 말.
아실라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한 번도 선명히 다가오지 않았던 감정이 제 마음속에도 생겼다는 걸 알았다.
아마도, 까맣고 빨간색으로, 조금도 예쁘지도, 아름답지도, 정돈되지도 않은 감정.
지독히도 누군가 밉고, 싫고, 불행했으면 하는 감정.
“나, 네가 싫어.”
“……뭐?”
아실라는 그 말을 뱉는 순간 자신이 무언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불투명한 얇은 장막이 그 순간 벗겨진 것처럼.
나는 이제, 나도 누군가를 싫어할 수 있어.
나는 이제, 누군가 나를 싫어할 수 있다는 걸 알아.
왠지, 그녀는 더 이상 주위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 나는 저걸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네가 싫어. 네가 집안에서 절연 당하든, 버림받든, 상관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도 불안하고, 무서웠지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착한 아이일 필요도 없고, 나는 누군가를 전부 행복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도 없고.
모두에게 사랑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
생애 처음으로 입 밖으로 싫다는 말들을 쏟아 냈다.
“난 너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난 착한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아. 난 네게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아. 난, 나는.”
그래, 나는-.
“네가 싫어.”
아실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로 돌았다.
자신을 보는 수많은 시선들 사이와,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소리들의 사이를 지나고.
커다란 회장 문에 두 손을 올리고, 밀고-.
앞으로 걸었다.
끼익거리면서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화려한 파티장과 수많은 군중들, 스포트라이트가 등 뒤로 사라지고, 그녀의 앞으로 아무도 없는 복도가, 넓게 펼쳐졌다.
길고, 넓고, 아무도, 아무것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것만 같은 복도.
그러나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환하게 밝아 반짝이는 것 같은 길.
아실라는 한번 눈을 감고, 숨을 느리게 내쉬고, 눈을 뜨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모두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 * *
리앙이 아실라의 뒤를 쫓아갔을 때, 아실라는 복도와 정원이 연결되는 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리앙은 기척을 내며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그를 한번 보고는 다시 정원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리앙은 뭐가 되고 싶어요?”
리앙이 망설이다가 말을 걸자, 아실라는 전혀 다른 질문을 그에게 건넸다.
“저는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거든요. 누군가 행복해하는 게 좋았어요. 그리고 저를 사랑해 주는 게 좋았죠.”
하지만, 이제 모르겠네요.
그녀는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 같기도 했고, 새로운 골목길을 발견한 소녀 같기도 했다.
리앙은 괜찮을 거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이 그녀에게 닿지 않을 거란 것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녀가 보는 관리된 정원을 훑어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세계 최고의 상인이 꿈이었어요.”
“최고의 상인요?”
“네. 가장 많은 돈을 벌고, 한 번도 속지 않고, 가장 훌륭한 장사 방식을 가진 상인요. 세상의 모든 부를 지배하여 돈으로 세상을 조정하는- 뭐, 그런 거요. 하지만, 음……. 언젠가 그런 말을 들었거든요. 평생 하고 싶으면, 즐거워야 한다.”
“평생…….”
“그래서 지금은 즐거운 상인이 목표예요. 이상하죠?”
리앙은 제가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실라는 정원을 보던 눈을 돌려 그런 리앙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직 정확하지는 않아요. 아마 앞으로도 계속 고민하겠죠. 즐거운 상인이란 무엇인가- 하고요. 뭐, 그래도. 저는 그걸 하기로 했어요. 아실라 님은, 음……. 착한 아이 말고, 착한 사람은 어때요?”
“착한 사람은 뭘까요?”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리앙을 눈을 보았다.
하늘색 눈동자와 초록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초록색 눈동자는 당황한 듯 깜박거리다가, 이것저것 생각하러 데굴거리다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착한 아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줬으니까, 착한 사람은……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든지?”
하하. 말이 이상한가?
그는 버릇처럼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이마를 긁었다가 손을 내렸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쓸어 올린 손길이 무색하게 다시 눈가를 덮었다.
리앙은 그걸 다시 쓸어 올렸고, 그 사이로 고민하느라 잔뜩 찌푸려진 미간.
“그럼, 음…… 세상을 착하게 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설명하느라고 이상하게 휘적거리는 손.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해 우물거리는 입가.
“착한 아이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다면, 착한 사람은 음……. 미움받더라도 전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혼자 사랑받는 게 아니라, 그냥…… 전부 사랑받게?”
아실라는 그 엉망진창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녀는 또 눈앞이 이상해졌나 했지만, 그건 그냥 눈물이 차오른 거였다.
왠지 그냥, 눈물이 났다.
아실라는 울기 싫었으므로, 리앙을 보던 눈을 돌려,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돈되고, 예쁘고, 색조차 정해지고, 낙엽 하나 없는.
아실라는 저 멀리 정원사가 떨어진 낙엽 하나 놓치지 않고 쓸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꼭 자신 같은 정원.
그녀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바람이 제멋대로 불었다.
바람은, 꽃들을 멋대로 넘어트리고, 색을 전부 섞어 버리는 것도 모자라, 정원사가 정리해 놓은 낙엽을 정원에 전부 던져 버렸다.
정돈된 정원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고, 저 멀리서 정원사가 황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풉.”
“아실라 님?”
“푸흐흐흐-”
바람은, 제멋대로 날려서.
꽃들도, 낙엽도, 아실라의 예쁘게 빗어진 머리카락조차.
멋대로 섞이고, 휘날리고, 엉키고.
“괜찮네요.”
“네?”
“착한 사람요. 엄청나게 큰 스케일도 마음에 들어요. 세상이라니-”
그렇죠?
리앙이 또다시 앞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긁적거리다가, 웃었다.
네, 마음에 들어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겨우 붙잡으며, 아실라가, 웃었다.
엉망진창인 정원에서, 엉망진창인 사람이 둘.
엉망진창일 게 분명한 미래.
착한 사람.
아실라는 그것이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