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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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틸라는 햇살이 온몸을 물들이는 게 어색한 듯이 바르작거리다가, 티 테이블 가득 들어오는 햇살에 결국 포기하고는 허리를 바르게 폈다.

그녀는 결국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뜨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새까만 속눈썹에 오후의 햇살이 희게 흐르다가 떨어졌다.

“사과하러 왔어.”

……미안해.

모틸라의 미안하다는 말은 그녀가 준비했던 이야기와는 다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미안하다는 목소리는 아주 작고, 떨리고, 갑작스러웠으니까.

그녀도 스스로의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입술 끝을 부들거리며 잘게 떨다가 한번 깨물고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변명해도 될까?”

방금 전보다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는 듯이 조금 웃고는, 로나의 눈치를 보았다.

그 얼굴에 진심이 담겨 있어서 로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좋다고 대답했다.

모틸라는 로나의 그 단단한 얼굴을 조금 보았다가,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에 내려앉은 햇빛의 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익숙한 어둠의 한 끝이라도 닿으려고 한 건지, 손끝을 햇빛 밖으로 떨어트린 채였다.

창백한 손끝이 어둠 속에서 파르르 떨렸다.

“어느 날, 그냥 평소와 같이 재밌는 걸 하고 일어난 아침이었어. 술에 취해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파티가 있었거든.

맛있는 음식도 술도 한가득 먹었지.

모틸라는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그것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무거운 이야기들을 저 멀리 보내 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봤던 건 기억나.”

그러나 그 밝은 목소리는 순식간에 가라앉아 낮게 떨어졌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봤지. 세수하면서 그렇잖아? 오늘도 괜찮나, 달라진 데는 없나. 습관적으로.”

새하얀 도자기로 만든 아름다운 세면대, 최고의 도공이 만들었다는 금박 입힌 넝쿨이 달린 예쁜 거울.

그리고 그 안의 물에 젖은 나.

언제나와 같이 아름다운 얼굴.

검은 머리카락, 검은 속눈썹, 선홍색 눈동자.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붉은 입술- 하지만.

“하지만…… 눈가에 주름이 생겼더라. 눈 끝에 주름이 생겨 있었지.”

모틸라는 회상하듯이 눈가를 만지다가, 선명하게 만져지는 선에 흠칫- 손을 떼었다.

“그리고, 늙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녀는 늙는다는 말을 아주 힘겹게 꺼냈다.

“주름이 생겼다니 그게 말이 돼? 내 인생에 주름 같은 건 평생 오지 않을 줄 알았다고. 나이를 먹는다거나, 늙는다거나, 죽음-”

죽음에 이른다거나.

모틸라가 고개를 들고 로나와 눈을 마주쳤을 때, 로나는 그 선홍색 눈동자에 선명히 떠오른 공포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입은 그저 말하고 있었지만, 눈은 새빨갛게 비명 지르고 있었다.

“언젠가 올 건 알고 있었어. 주위에 죽은 사람이 몇이고, 심지어 죽은 뱀파이어도 많은데, 내가 죽지 않을 거란 생각은 안 했다고,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언젠가- 잖아?”

언젠가. 정해지지 않은. 아직은 저 멀리 있는 것.

그녀에게 죽음은 그런 것이었다.

올 것을 알고 있지만, 선명히 다가오지는 않는.

뚜렷하지도 않고, 분명하지도 않은.

“알고는 있었다? 내가 뱀파이어로 만든 인간이 몇인데. 내 수명을 얼마나 나눠 줬는데. 다른 동족들보다 일찍 죽겠거니- 모나한 저 녀석보다도 일찍 죽겠구나. ……알고는, 알고는 있었지.”

그래도 더 멀리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면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 난 후에.

무언가 달라진 후에.

“그런데 그게 다가온 거야. 인간은 늙어도 언제 죽을지는 사실 모르잖아? 그냥 이쯤 살겠지, 이쯤 죽겠지. 이러는 거지. 하지만 뱀파이어는 알거든. 아, 몇 년 안 남았구나. 알아 버린 거야. 난 알아 버렸지. 내가, 죽는다는 것을.”

영원히 저 멀리에서 있을 것 같은 죽음이, 사실은 성큼 다가와 등 뒤에서 갸웃거린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명확해지고, 끝을 알아 버리게 된 순간.

모틸라는 몰려오는 공포에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휘황찬란했던 방에서 뛰쳐나와,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고, 미친 듯이 여기저기를 헤맸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라고.

이게 끝이 아닐 거라고.

죽고 싶지 않다는 문장만이 머릿속에 박혀서 그녀를 끼익거리며 좀먹었다.

뇌 한 부분이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것처럼 공포가 그녀의 시간 속에 박혀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얼마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는지 몰라, 꼭 어릴 적에 갈 곳이 아무 곳도 없었던 시절처럼 돌아다니다가, 깨달은 거야. 아, 난 아직도 갈 곳이 아무 곳도 없구나. 그리고 문득 죽음보다 외로움이 커져 버렸지. 내 죽음조차 외로우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그녀는 울먹이며 질문하고, 질문하였다.

도저히 답을 알 수가 없어서, 떠돌아다니면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어느새 더러워진 치마 끝을 보면서.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모나한이 나타났어. 이름이 비슷하잖아? 모로 시작하는 건 사실, 우리가 같은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는 뜻이거든. 모티나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실험체라는 뜻이거든. 진명이라며 거창했던 주제에, 너무 하잘것없지 않니?”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눈으로 조금 키득거렸다.

모나한의 이름이 아니라, 제 이름을 비웃는 듯이.

“우린 그 실험실에서 가장 영악한 놈들이었어. 가장 눈치도 빠르고, 가장 비위도 잘 맞췄지.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왔을 때, 가장 잘 살아남고, 가장 오래 살아남았지.”

그건 우리가 가장 겁쟁이였기 때문이었다. 무섭고, 무섭고, 무서워서, 여기저기 데굴거리며 눈을 굴렸기 때문이었다.

너무 겁쟁이라서, 사랑하는 사람도 잘 못 만드는, 옆에 두지도 못하는- 결국에는 지독히 외로워진.

“나랑 비슷한 모나한이었는데, 네 옆에 서 있는 모나한은 전혀 다른 모나한이더라. 그는, 그냥. 웃고 있었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로, 내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얼굴로. 아, 그는 외롭지 않구나. 더 이상 외롭지 않구나.”

안도보다 먼저 찾아온 건 질투였고, 갉아 먹혔던 마음은 행동으로 옮기게 했다.

“너무 부러워졌지. 나처럼 외로웠던 사람이 그렇지 않을 걸 알게 된 순간. 부러움과 질투심이 득실거리며 끓어올라서, 나는 뭐라도 해야 했어. 진짜 너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없었어. 그냥, 그냥…… 떼어 놓고 싶었어. 그리고 그렇게 행동한 순간, 물어보고 싶어졌지.”

어떻게 그를 외롭지 않게 했어? 어떻게 그를 그리 충만하게 만들었어? 어떻게, 어떻게-.

너는 그렇게 웃고 있지?

사실은 모나한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을, 로나에게 쏟아 내었다가, 몰려오는 질투심에 의심을 심으려 속삭이다가, 결국엔 참지 못하고 그에게 가서, 너도 외로우라고 비명 지르고.

내 죽음은 외롭지 않을 줄 알았다.

한평생 외롭게 살았더라도.

한평생 이것밖에 안 되었더라도.

죽을 때만큼은, 끝날 때만큼은 무언가 다를 줄 알았지.

이렇게 하잘것없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와 같은 날, 평소와 같은 잠, 평소와 같은 시간 속에 서 있는 어느 날.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거라곤, 그녀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어졌다.

내가 죽기 전에 말이야, 어떻게 외롭지 않아질 수 있어?

그래서 비명 지르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그대로인데, 모나한은 괜찮아져서.

“그런데 모나한이, 엄청 단단하게 웃는 거야. 맨날 어둠 한구석에서 숨어 있던 비쩍 마른 남자애가 빛 아래서 환하게 웃는데. 그게 너무 아프고, 그게 너무 좋아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삼켜 버렸던 질문이었다.

삼켜 버린 질문은 투정으로 내뱉어졌다.

어쩌면 질책이나, 괜한 탓이나, 그런 삐죽삐죽하고 못생긴 걸로 나왔던지도 모르지.

그러나 모틸라는, 모나한이 그렇게 웃었던 순간.

아주 단단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던 순간.

답을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빛 아래서 웃는 얼굴로 모두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지.

내가 아니더라도, 네가, 우리가.

모틸라는 끝내, 비명 지르던 눈으로 울었다.

눈물이 후드득, 햇빛이 비치는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내려, 반짝거렸다.

“괜찮아졌어. 이제, 외로워도.”

무섭고, 불안해도.

“그에게 너무 뭐라 하지 마. 우리 둘이 맨날 싸우면, 내가 달리기는 언제나 이겼거든. 힘은 저 자식이 세고, 나는 발이 빨랐지. 그래서 널 놓친 거야. 얼마나 무서운 얼굴로 쫓아왔는데.”

결국엔 내가 또 이겼지만.

모틸라는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웃고 있는 입꼬리를 따라서 눈물이 굽어 흐르다가 턱 끝으로 떨어져 빛으로 화했다.

그녀는 부러 담담하게 말하려 했다.

한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여행을 갈 거야.”

여기저기 돌아다니려고.

“내가 사랑했던 것들 있잖아? 좋아하고, 소중히 여겼던 것들. 날 한순간이라도 외롭지 않게 했던 것들 말이야. 그런 것들을 돌아보려 가려고.”

죽음을 준비하러 갈 거야.

모틸라는 환하게 웃었다.

모틸라의 목소리는 죽음을 준비하러 간다는 말을 할 때만은 아주 부드럽고 담담하게 흘렀다.

이제 준비된 것처럼.

이제 괜찮은 것처럼.

햇빛이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썹과, 눈물과, 볼 위에서 반짝거렸다.

어느새 길어진 해의 끝이 어둠 한 끝에 닿아 있던 그녀의 손톱까지 밝게 물들인 후였다.

따뜻하고, 따스하게.

미안해.

모틸라가 말했다.

그리고, 모나한과 함께해 줘서 고마워.

부드럽고, 따뜻하고, 따스한, 햇빛 같은 목소리로.

로나는 햇빛에 가득 싸인 그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테이블에서 일어나서, 2층을 잠깐 보다가, 문으로 걸어갔다.

로나가 모나한과 인사하지 않아도 되냐고 묻자, 고개를 조금 흔들고, 문을 열었다.

창문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햇빛은, 문밖에서도 쏟아져 내렸고.

모틸라는 사과는 말만 하면 안 돼지라고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며, 로나의 품에 주머니 하나를 안기고는.

멀리, 멀리.

햇빛 사이로 사라졌다.

로나를 그걸 보고, 2층에서 모나한이 내려오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그는, 한평생 그랬던 것처럼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모틸라가 햇빛 아래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처럼, 그도 꼭 햇빛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노라 믿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빵집은, 그림자조차 밝았기에.

로나는 그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고.

모나한이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묻고, 어깨를 들썩이고.

모두에게 햇빛이, 밝게,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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