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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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와 모나한이 방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노예 상인들은 질란 공작가의 병사들이 와서 수습하고 있었다.

그 분주한 병사들 사이에서 질란과 아실라가 그들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로나는 병사가 건네준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묘하게 멍해 보이는 아실라의 모습에 로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녀가 그저 게임 속의 캐릭터가 아니라, 열다섯 살 소녀인 것을 생각하며 말을 걸었다.

“아실라 님, 괜찮으세요?”

“……네.”

아실라가 멍한 눈으로 로나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어디 다치시진 않았죠?”

“……로나 씨.”

“네?”

“로나 씨는 절 좋아하세요?”

“……네?”

“제가 사랑스럽죠? 예쁘고, 귀엽고, 밝고-”

아실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로나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 한 조각이라도 찾으려 애쓰던 눈동자는 이내 초점을 읽고 떠나갔다.

“로나 씨도 다르군요?”

“아실라 님?”

“죄송해요.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요.”

아실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로나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로나는 그런 아실라에게 무언가 더 말을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아실라에게 무언가 조언하거나 위로하기엔 그들은 그저 남이었으므로.

로나는 그냥, 아실라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잠시 보았다가, 몸을 돌려 모나한에게 다가갔다.

모나한은 병사들에게 빌린 물로 손을 깨끗하게 씻었다며, 양손을 흔들거리며 그녀에게 자랑했다.

“이제 완벽하게 안을 수 있어요.”

“안는 건 좀 그렇고-”

“어…….”

“손잡을까요?”

“네!”

모나한이 방긋방긋 웃으며 로나가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다소곳이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다정히 손잡고 그들의 집으로 들어갔다.

로나는 잠시, 그에게 해야 할 질문들을 떠올렸지만, 피곤한 하루였으므로, 질문을 다음으로 넘기기로 했다.

손의 온도가 점점 섞여 따뜻하기만 하였다.

* * *

그리고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씻고, 반죽을 하고, 오븐에 넣은 다음에 모나한에게 다가갔다.

아니, 할 일은 해야지?

생계가 달려 있다고?

토요일, 일요일 모두 놀기로 했지만, 토요일인 어제 그 사달이 났으니, 일요일인 오늘은 그냥 장사할 예정이었다.

게다가 어제 그 사달이 나서 더더욱 장사를 하고 싶었다.

평소와 같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게 더 안심이 될 것 같달까.

그래서 그녀는 평소와 같이 장사 준비를 모두 끝내 놓고 진열대 청소를 하고 있는 모나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우리의 미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이까?”

“네?”

이런 건 꼭 말 안 하고 넘어가면 사달이 일어나더라고.

난 답답해서 그냥은 못 넘어간다.

그런 로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나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1번, 저 죽으면 모나한이 슬퍼하며 동굴에 들어가서 엉엉, 그리고 기억 리셋 후 또다시 방탕한 생활을 산다.”

“저기, 로나?”

“2번, 나도 뱀파이어로 만들어서 영생 동안 내가 만든 빵을 먹는다.”

“어, 저기-”

“3번, 이 사랑이 거짓이지만 난 빵이 좋으니까, 평생 로나를 사랑하는 척한다.”

당황하던 모나한은 로나의 마지막 말에 표정을 굳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3번이면 그냥 맞다고 대답하고, 오늘 하루 동안 내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열심히 알랑방귀 뀌고 나서, 그냥 날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해요.”

“로나.”

“내가 죽을 때까지 거짓말을 하면, 난 그걸 진실이라고 생각하면서 살 거예요. 모나한이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로나의 말은 모나한의 얼굴을 점점 굳게 할 뿐이었다.

이제 그는 평소와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부정과 충격, 그리고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대한 조금의 슬픔이 깃든 얼굴.

로나는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3번 예시 때문에 굳은 것 같아 먼저 말했지만, 1번이면 모나한이 나중에 슬퍼하든 말든, 그건 모나한이 알아서 하세요.”

몰라, 지금 엄청나게 사랑하면 되지. 죽은 다음은 알게 뭐람.

로나는 작게 투덜거리고 말을 이었다.

“2번이면.”

“2번이면?”

“……모르겠네요. 영생 같은 건 생각해 보지 않아서. 그냥 평생, 모나한과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빵이나 만들지 않을까요?”

“……왜 갑자기 이런 걸 묻는 거예요?”

“모틸라와 만났을 때, 그녀가 생각해 보라 하더군요. 어떤 게 진실일지, 생각하고, 생각해서, 의심하라는 것처럼 말했죠.”

“…….”

“난 그런 거로 고민하기 싫어요. 생각은 짧으면 좋고, 행동은 빠를수록 좋다가 제 삶의 교훈이죠. 모나한을 만나기 전에, 혼자 빵집을 할 때, 불안만이 가득했을 때, 저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했어요.”

로나는 언제나처럼 단단히 서서 말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불안하기만 했죠.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걸 가지고 고민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물어볼게요. 몇 번이죠?”

모나한은 그 단단한 눈을 보며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우선 3번은 아니에요.”

“그래요?”

“네. 그건 확실해요. 하지만…….”

모나한은 무언가 생각하듯이 눈을 굴렸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로나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가, 피하다가, 돌아왔다.

그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너무도 선명해서, 피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했어요.”

“거짓말요?”

“당신을 뱀파이어로 만들면 제 힘이 반으로 주는 게 아니에요.”

“그럼요?”

“수명이 반으로 주는 거지. 정확히는 제 수명을 줄여서 당신의 수명에 붙이는 거죠. 우리의 수명을 같게 하는 거죠.”

“…….”

“힘을 나누는 게 아니라, 피를 나누는 거예요. 우린, 남을 뱀파이어로 만들려면,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뱀파이어의 피를 줘야 해요. 그건 유한한 거고, 그건 이미 사는 동안 점점 주는데, 남에게 줘 버리면-”

“-순식간에 사라지겠네요.”

“……순식간은 아니겠죠. 저도 꽤 오래 살았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시작돼요. 인간처럼 늙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 오죠.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가 생기고…… 모든 뱀파이어는 다들 무서워해요. 차라리 정해졌으면 맘이 편할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늙어 버리거든요.”

“영생이 아니군요.”

“네. 인간보다 훨씬, 훨씬 오래 살 뿐이에요.”

로나는 그의 말을 듣다가 빵이 다 구워졌다는 오븐의 알림에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그냥 저 죽기 전까지 고민해요.”

“네?”

모나한이 그런 로나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몰라. 내가 알 게 뭐야. 내가 모나한이랑 같이 고민해 봤자 머리만 아프지.”

“로나?”

“저 아직 젊으니까, 제가 죽기 전까지 그냥 고민해요. 아니다, 늙은 모습으로 오래 살긴 싫으니까, 중년 즈음까지 고민해요.”

“어, 어?”

“난 고민 안 할 거야. 모나한 혼자 고민해.”

로나의 단호한 말에 모나한은 잠시 벙쪄 있다가 왠지 모르게 올라오는 억울함에 로나에게 바짝 붙어 말했다.

“……저랑 같이 고민해 주세요.”

“싫어요. 모나한 수명이잖아요. 모나한이 고민해요.”

“뭔가 억울하잖아요! 저랑 같이 고민해 주세요!”

“빵에 침 튀어요. 저리 가세요.”

“로나, 뱀파이어가 될 거예요? 아니면, 죽을 거예요!?”

“몰라요. 모나한이 고민해요.”

그러나 그 억울함이 통하지 않는 로나는 침이 튄다며 저리 가라고 손이나 휙휙 젓고는 오븐에서 빵을 꺼냈다.

“제가 중요해요, 빵이 중요해요!?”

“오늘 장사요.”

“헐.”

모나한이 충격받았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감쌌지만, 로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빵을 식혔다.

“이거 식으면 진열해요.”

“저 진열 잘하거든요?”

“네. 잘하는 거 해요.”

“로나가 말하지 않아도 할 거거든요?”

“네. 해요.”

커피 안 타 줄 거야!

모나한이 잘생긴 얼굴로 징징댔다.

저 손 있어요. 알아서 타 마실게요.

로나가 똑바른 얼굴로 컵에 손을 가져갔다.

내가 타 줄 거예요! 손 저리 치워요!

모나한이 로나의 손에 있는 컵을 뺐으면서 씩씩거렸다.

로나가 키득거리며 물러났고, 모나한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물을 끓였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창문을 넘어 부엌을 데우고 있었다.

* * *

장사가 끝나고, 모나한은 도와주겠다는 로나를 2층으로 올려 보내고는, 쓰레기를 버리러 가게 밖으로 나왔다.

해가 떠 있던 낮에는 따듯했던 공기가 해가 지고 나자 서늘하게 바뀌었다.

제 서늘한 숨보다 밖의 공기가 더 차가운지,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피었다가 공중으로 스며들었다.

가로등이 켜져 있음에도, 하늘엔 별이 반짝였다.

모나한은 잠시 가게로 들어가지 않고, 가게 문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귀에 들리는 로나의 움직이는 소리에 웃으며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니 소리는 더욱 선명히 들렸다.

익숙한 걷는 박자, 책상을 정리하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 잠옷이 스치는 소리.

그녀는 이미 자신이 방에 들어간 줄 아는지, 방문을 살짝 열고는 말했다.

“잘 자요, 모나한. 내일 봐요.”

낮은 목소리가 졸음을 담고 울렸다.

모나한은 그 말에 대답하려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로나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닫는 소리를 들었다.

단호하기도 하지.

그 모습조차 사랑스러워서 모나한은 웃고, 몸을 돌려 다시 가게 문에 기댔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로나가 던져 준 고민 때문인가.

하긴, 그건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기는 했다.

로나를 사랑하지 않기에는 그건 너무 멀리 왔으므로, 이제 그녀가 떠난 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로나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그 사실이 지독히도 슬프다는 것은 뒤로 두고, 나는 어떻게 될까.

어쨌든 또 망각에게 애원하러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겠지.

망각이 날 집어삼켜서 희미해질 때까지 자고, 또 자겠지.

일어나면 로나도, 그녀의 흔적도 모두 사라졌을 거야.

그건 아주 쉽겠다.

그녀는 대단한 인물도, 강렬한 인물도 아니니까.

빵집은 금세 다른 사람이 다른 가게를 열 거고, 로나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지 않을 테니.

그럼 그녀를 기억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겠군.

그게 좋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잊어버릴 것들은 전부 잃어버리는 게 낫다.

영원히 기다려도 오지 않을 테니까.

모나한은 그녀를 잊어버린 후를 생각해 보려다가 머릿속이 하얘져서 덜컥 몸을 멈췄다.

이상했다.

아무런 미래도 그려지지 않아서 모나한은 잠시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러자 멈췄던 뇌가 녹슬은 톱니바퀴처럼 끼익대면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상상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머릿속이 덜컥거리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항의하듯이 상상은 선명해지고, 감정은 날카로웠다.

더 이상 그런 대화는 없을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렇게 달콤하게 맞받아 칠 사람은 없겠지.

그렇게 웃는 사람도 없을 거고, 내가 그렇게 웃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애교 있게 웃지 않을 테니까.

티 테이블을 닦다가 계산대에서 책을 읽는 그녀를 볼 일도 없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아예 없는 곳이 되겠지.

로나가 언젠가 외로움은 텅 빈 공간과 닮았다고 했는데, 난 그것도 모를 것이다.

내겐 공간이 없을 테니까.

떠돌이가 어디서 그런 걸 찾는다고.

햇살에 달아오른 머리카락 같은 건, 속눈썹, 하얀 옷깃.

흔하디흔한 것들.

울퉁불퉁한 손가락, 뜨거웠던 손바닥, 반죽에 촉촉했던 손길.

올라간 입가, 내려간 입가, 턱이 우글거리는 모습, 찡그린 미간, 어이없다는 표정.

상실로 시작된 상상은 그리움이 되었다.

모나한은 문득 로나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 몰래 들어가,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고 말았다.

왜 당신의 머리카락은 갈색인가.

왜 그렇게 평범하고 흔한 색이란 말인가.

난 이제 갈색을 보면 당신 생각밖에 들지 않는데.

왜 당신은 빵을 만들까?

하필이면 흔하디흔한 빵인가.

이 세상 어디에 빵집 없는 곳이 어디 있다고.

조그마한 시골에도 있는데.

난 이제 빵을 보면 당신 생각밖에 들지 않는데.

내가 당신을 잊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당신이 너무 흔한 색을 가지고 있어서.

당신이 너무 흔한 것을 만들어서.

당신이 너무, 너무.

“맙소사. 동굴 속 흙도 갈색이잖아요.”

그럼 난 잠들어서도 당신을 생각하게 되잖아.

모나한은 조심스레 풀어진 머리카락을 만졌다.

손끝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각을 느낀다.

그러다 문득 없어진 걸 상상하려다가, 당신 생각만 가득했다고 깨닫는다.

뇌가 그렇게 상상하기 싫다고 외치더니, 당신 생각만 했나 보다.

“어쩔 수 없네요. 세상에 당신이 가득하잖아요.”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불가항력 같은 거지.

운명이나, 예지 같은 거.

거스를 수 없는 거.

“사랑해요.”

사랑은 그런 거 아니겠는가.

거스르기 싫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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