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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한다면서!”
로나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다가 이내 입을 꼭 다물었다.
그 망할 뱀파이어.
모나한 말고 여자 뱀파이어.
그냥 낡은 창고에 버려두고 간 줄 알았더니, 문을 여니까 어머나?
노예 상인의 거처예요.
아실라를 납치한다는 노예 상인이, 어머나?
여기 있네.
물론 그 뱀파이어야 여기가 노예 상인의 거처인지 어쩐지 신경도 쓰지 않고 아무 곳이나 들어왔던 것 같지만!
그 뱀파이어도 몰랐던 것 같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지금 내가 위험에 처했는데!
“오. 젠장. 모나한, 빨리 와라. 모나한. 보고 싶다.”
전투력을 올려야 하나?
이 평화로운 일상에 전투력이 필요한 순간이 드디어 온 건가?
내 전투력? 0인데요.
아아아. 한국인의 진한 피로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고 있어.
쓸데없는 드립만 떠오른다고!
왜 당황하면 오히려 드립이 잘되냐고!
후. 좋아. 만약 노예로 팔려 가면. 내 제빵 실력을 보여서. 평생 제빵 노예! 아, 모나한.
저는 빵을 잘 만듭니다. 천상의 손을 가졌습니다. 모나한.
이런 데 팔려 가면 보통 성노예 루트던데 제발 그것만은…….
빵집 주인에서 그쪽으로 가는 건 루트를 너무 휙 틀었잖아! 저는 빵집 주인으로 남고 싶어요! 모나한.
나 이 세계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쁜 편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제빵 노예로 부탁드립니다. 모나한.
로나는 이제 모든 생각 끝에 모나한을 붙이기 시작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여기가 어딘데 입 밖으로 꺼내!
혼잣말하다가 들키는 클리셰는 사절입니다!
“너 뭐야!”
그리고 일반인은 혼잣말을 안 해도 들킵니다. 모나한.
“아니, 저, 그.”
길을 잃었어요.
뱀파이어가 저를 여기 두고 갔어요.
몰래 들어왔어요.
어느 말을 해도 지뢰 아닙니까? 모나한.
로나는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온갖 드립은 꿀꺽 삼켜 버리고, 이 상황에서 가장 어울릴 것 같은 말을 했다.
“살려 주세요.”
“뭐야. 탈출한 년인가?”
그리고 노예 상인으로 보이는 사내는 로나의 약해 보이는 모습과 진심 가득히 살려 달라는 표정을 한 얼굴을 보고, 탈출한 여자인지 고민했다.
그 말에 로나는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아뇨 아뇨 아뇨. 화장실 가고 싶어서 들어왔는데, 어머나. 잘못 들어온 거 같아요.”
“흠.”
탈출한 사람이 들키면 그거잖아!
탈출한 죄로 폭행! 고문! 다른 사람들을 탈출하지 못하게 하려는 본보기!
그러니 내 변명을 믿어라.
난 탈출한 게 아니라, 멍청하게 노예 상인의 서식지로 들어온 평범한 여자다!
차라리 나를 노예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
얌전히 끌려갈게!
때리지 마라, 때리지 마라, 때리지 마라. 모나한.
“어이! 이년을 상품들이 있는 데로 끌고 가!”
로나는 얌전히 끌려가면서 아주 공손한 표정을 했다.
뱀파이어보다 인간이 더 무섭다.
그 여자 뱀파이어, 모틸라는 자신을 해칠 생각은 없던 것 같았지만, 이 인간들은?
심기 거스르면 바로 손이 날아올 작자들이다.
사내들은 로나의 변명을 믿었는지, 그녀의 팔을 잡고 끌고 갈 뿐 별다른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검은 복도를 얼마나 깊숙이 끌려갔을까.
로나는 빛이 깜박거리는 전등 밑 문의 낡은 자물쇠가 사내들의 손에 끌러지는 것을 보았다.
아, 이곳이 제가 있을 곳입니까?
그때까지 로나는 매우 공손하면서도 겁에 질린 얼굴로 얌전히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내들의 거친 손에 의해 방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윽-!”
로나가 바닥에 부딪히며 짧은 신음 소리를 뱉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그러나 로나는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폭력이 더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분홍색 머리카락이 찬란히 빛났다.
“앗, 로나 씨!”
“오. 아실라 님. 다행이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내 생애 아실라의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분홍색 머리카락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여주인공 아실라였다.
로나는 아실라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혹시 아실라를 납치한 노예 상인이 아니라 다른 노예 상인의 창고일까 봐 가슴을 졸였었다.
게임 속에선 하나의 노예 상인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축제는 컸었고 다른 노예 상인들도 기회를 틈타 왔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아실라를 납치한 노예 상인이었고, 그 말인즉슨, 곧 탈출할 수 있다.
분명 모나한도 오겠지만, 다른 남주들도 올 테니까.
탈출은 매우 가능. 백퍼 가능.
“아실라 님도 여기 있었군요!”
“전 노래 대회 나갔다가, 심사가 잘못됐다는 말에 따라와서 납치됐어요! 로나 씨는, 로나 씨는 어쩌다가…….”
“아…….”
뱀파이어가, 절 납치하고, 무단출입하고 저를 놓고 가서…….
“그, 길을 잘못 들었다가.”
“아아…….”
그 무단출입한 곳이 노예 상인의 건물이라서…….
“화장실을 찾다 보니…….”
“아아아…….”
로나는 양심의 가책 아닌 가책을 느끼며 아실라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늘만은 아실라의 뒤에 휘광이 사랄라 하며 보이는 것 같다.
이 아이가 날 구원해 줄 거야! 여기서 날 빼내 주겠지!
당신 옆에 있으면 안전!
“전, 전…… 이런 일이 생길 줄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어떻게 사람을 노예로 팔 수 있죠?”
“오.”
아니, 저기. 당신 판타지 세계 주민이어요.
물론 이 나라는 노예 제도가 금지되어 있지만, 다른 나라로 가면 아직 성행한다고.
아냐. 잠깐. 아실라의 모든 말에 토 다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
좋아. 아실라는 조그만 남작 영지에서 자라서 학원에 온 게 처음으로 도시에 나온 거니까 모를 수도 있지.
“저는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서, 경비대에 신고할 거예요. 로나 씨, 저랑 같이 탈출해요!”
“네!?”
아니, 싫은데요!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을 피해서 어떻게 도망칠 건데요.
저들은 칼 밥 먹는 사람들이고 당신이랑 저는 그냥 학생이랑 빵집 주인이잖아요.
아실라가 능력이 뭐였지? 빛의 마력이었지. 그럼 빛의 마법 같은 거 쓰나?
“아실라 님 혹시 전투력 같은 거 있으시나요?”
“아뇨!”
당당하게 말하지 마세요…….
당신도 저도 전투력 0이야…….
“혹시 어떤 능력으로 학원에 들어가셨는지……?”
“빛의 마력요. 희귀한 마력이거든요…….”
“아하. 그걸로 뭘 할 수 있나요?”
“진정, 치유……? 하지만 저에게 약물이 있어요! 약물학 시간에 만든 건데, 철을 녹이는 약이에요! 이거면 문고리를 부수고 도망갈 수 있어요!”
“하지만 문밖에만 나간다고 다가 아니잖아요. 어떻게 도망갈 거고, 들키면 어떻게 할 건데요. 여기 가만히 있는 건 어떨까요? 아실라 님은 귀족이시니까 다른 분들이 구하러 올 텐데.”
“그, 그건…….”
“전 전투라곤 하나도 할 줄 모르고요, 아실라 님도 마찬가지네요. 노예 상인들이나 여길 지키는 이들은 다들 칼을 쓰는 건장한 사람들일 테고요.”
“…….”
“도망치다가 걸릴 확률도 높고, 걸리면 아마 폭력을 행사할 텐데. 그거 견딜 자신도 없고요.”
“저, 저는…….”
“게다가 혼자 도망치기도 힘들 텐데, 둘이요? 무리라고 생각해요.”
아실라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오물대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아실라 님이 도망치든지 말든지 저는 상관하지 않겠어요. 같이 도망가지도 않을 거고. 저는 여기서 얌전히 남이 구해 줄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네?”
“어떻게 남이 도와주기만을 기다릴 수가 있냐고요! 자신의 위기는 자신이 헤쳐 나가야죠! 아무도 안 올지도 모르는데……!”
로나는 벌떡 일어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치는 아실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기는 했다.
자신의 위기는 자신이 헤쳐 나가야지.
하지만 이거 ‘위기’가 아니다.
위험한 기회 같은 게 아니란 말이다.
납치되고 노예로 팔리는 게 어떻게 ‘기회’란 말인가.
이건 그냥 범죄에 휘말린 거다.
그리고 사실은 너도, 나도 누군가가 구해 주러 올 것을 알고 있잖아.
“축제 혼자 오셨나요?”
“네?”
“저는 모나한이랑 같이 왔거든요. 제가 사라진 걸 알고 있고요. 전 그가 어떻게든 구해 줄 거라고 믿어요. 아실라 님은요? 축제 혼자 오셨나요? 당신이 사라진 걸 아무도 모르나요?”
“……아뇨. 친구들이랑 왔어요.”
“그렇군요. 친구들이 아실라 님께서 사라진 걸 아는 데다가, 아실라 님은 귀족이시니까, 금방 구하러 오겠네요.”
“그렇, 겠죠.”
“그럼,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죠.”
“저, 저는 누군가 구해 주길 기다리는 그런 연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네?”
“제 위기는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어요!”
로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아실라는 벌떡 일어나 주위 사람들을 보며 외쳤다.
“여러분! 누군가가 구해 주길 기다릴 수는 없어요! 언제 구해 주러 올지도 모르고, 아무도 구해 주지 않을지도 모르잖아요!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여기서 탈출해요! 한 명만이라도 번화가로 나간다면, 그래서 그 사람이 신고한다면, 우리 모두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
아실라가 자신감 있게 말했다.
낡은 나무 바닥 위에 두 다리로 단단히 서서.
그 예쁜 얼굴에 결심을 담고.
게임에선 어땠더라.
거기서도 아실라는 사람들을 이끌고 탈출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다 한 명 한 명 잡히고. 결국, 마지막에 탈출하는 사람은 아실라였지.
번화가로 가서 자신을 찾아 헤매던 남주에게 다가가 사실을 알리고, 노예 상인에게 걸려 폭력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극적으로 구해 낸다.
용사처럼, 천사처럼, 구원처럼.
하지만 게임이 아닌 현실이라면.
현실에서 그 폭력을 당한 사람들의 서사는?
폭력에 당한 상처가 언젠가 치유된다고 말하지 말자.
폭력을 당한 기억이 언젠가 사라진다고 말하지 말자.
치유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사라지지도 않은 사람에게.
기약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가벼운가.
내가 강하다고, 내가 이겨 낼 수 있다고.
모두가 그럴 거라는 착각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치유되었다고, 사라졌다고 해도.
문득문득 어느 날 한 번씩 떠올리게 되는 기억이 있는 것만으로.
그것은 상처이고 흉터이고 아픔이니까.
“전 안 갈 거예요.”
“……로나 씨……!”
“누군가 한 명이 탈출한다면, 나머지는요? 걸리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요? 처맞는 것만으로 끝나면 다행일 텐데.”
“여기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정말 그렇다면 움직여야겠죠. 하지만 아니잖아요.”
“네?”
“해결될 거예요. 제가 납치된 걸 아는 사람이 있고, 아실라 님이 납치된 걸 아는 사람이 있죠. 축제 때문에 길을 잃었거나, 헤어졌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그, 그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전 여기 있을 거예요.”
로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좀 더 편하게 있기 위해 주위 자리를 정리했다.
아실라는 그런 그녀를 한번 노려보다가 주위에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저랑 같이 가실 분 안 계신가요!?”
사람들은 침묵했다.
아실라를 따라가려던 몇 명은 다른 이들이 그들의 손이나 치마를 잡자 망설이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방 안에 오로지 아실라만이 서 있었다.
아실라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는 문을 보고 섰다.
치이익.
문의 고리가 녹는 소리가 들리고, 아실라의 치마가 앉아 있는 이들을 스치고 지나 밖으로 나갔다.
로나는 아실라가 완전히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앞에 섰다.
방 안에 남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끼이익.
그녀는 문을 닫았다.
아무도 나간 적이 없는 것처럼,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아실라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본다.
문틈으로 마주친 눈동자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