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거기엔 나간 지가 한참인데 아직도 목욕탕 앞에 있는 아실라가 있었다.
로나는 살짝 당황하며, 아실라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도 여기 계세요? 나간 지가 한참 전인 거 같은데.”
“그…… 일이 좀 있어서요.”
“일요?”
“아아. 저 소년에게 나쁜 일이 좀 있었는데 아실라 님이 ‘구원’해 주셨어요. 그렇죠?”
“아뇨, 아니에요. 구원이라고 할 것까지야.”
아실라가 분홍색 머리를 휙휙 휘저으며 말했고, 로나는 모나한의 ‘구원’이라는 단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 여주인공은 남주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을 ‘구원’하곤 했다.
아실라가 말한 그 일도 그중 하나인가 보지?
“그렇군요. 누군가를 ‘구원’하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아앗…….”
로나는 그렇게 말하며 비쩍 마른 소년, 아실라, 모나한을 한 번씩 주의 깊게 쳐다보다가 아실라에게 말했다.
아실라는 로나의 말에 다시 부끄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로나는 아실라가 무언가 더 말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막 온천에서 나와서 목이 좀 마르네요.”
“아, 음. 그게-”
“저녁을 못 먹어서 배가 고프기도 하고요.”
아실라는 로나의 말에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음. 저녁을, 같이-”
“아실라 님은 저 소년을 돌보셔야 되지 않나요?”
“……그렇죠. 맞아요.”
그리고 아실라의 그 말은 모나한의 말에 다시 들어가고 말았다.
“음…… 어. 다음에 또 봐요. 로나 씨, 모나한 씨.”
아실라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망설이다가 로나와 모나한의 언제나처럼 예의 바른 미소를 보고 물러났다.
소년을 데리고 가면서도 고개를 계속 갸우뚱거리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로나는 그런 아실라의 모습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웃는 얼굴인 모나한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네?”
로나의 말에 모나한이 의아하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로나는 그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뭔가 기분 나빠 보여서요. 웃는 표정이 이렇게.”
로나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듯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상하게 웃는 표정을 했다가 그만두었다.
그러곤 저 잘생긴 얼굴을 따라 하는 건 무리라고 중얼거렸다.
“예전에 본 적 있는 얼굴이라서요. 저를 사랑하는 척할 때요.”
“……음.”
“뭐랄까…… 학습해서 만들어진 가짜로 웃는 얼굴?”
“로나 씨는 귀도 밝고 눈초리도 예민하네요.”
“세상 살아가기 힘든 특성이죠. 보통은 눈치채도 모른 척 넘어가요.”
로나는 한쪽 손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모나한의 차게 식은 볼을 만졌다.
“모나한이니까 알은척해 봤어요. 괜찮은 거죠?”
“네. 로나 씨가 와 줘서 괜찮아졌어요.”
모나한이 로나의 온천으로 인해 평소보다 더욱 따끈해진 손의 온도를 느끼며 대답했다.
모나한의 그 대답에 로나는 ‘내가 뭔가 했던가?’ 하는 표정을 했다가 ‘뭔가 했겠지’라는 표정을 하더니 반대쪽 손도 그의 볼에 올리곤 주무르기 시작했다.
모나한의 섬세한 얼굴이 로나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뭉개졌다.
“뭐 하는 거예요?”
“못생기게 만들기?”
“못생겨졌나요?”
“짜증 나게도, 아뇨.”
어쩜. 피부도 좋네. 재수 없어라.
로나가 작게 중얼거리며 그의 볼을 몇 번 더 주무르고는 놓아주었다.
“시원한 거 마시러 가요.”
“네, 로나.”
“맛있는 저녁도요.”
“배 많이 고프신가요?”
“물에서 놀았더니 아주요. 모나한은요?”
“전 로나 씨를 보지 못해서, 아주요.”
“와, 뭐지. 저 꼬시는 거예요?”
“언제나 로나 씨를 꼬시려고 노력하죠.”
로나가 모나한의 말에 다시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하고 그를 째려보았지만, 기분이 한껏 좋아진 모나한은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로나 씨 손이 따끈따끈하더라고요.”
“방금 따뜻한 물에서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기분이 따끈따끈해졌어요.”
“어, 음.”
“로나 씨 덕분이에요.”
“와, 뭐지. 꼬심 당할 듯.”
모나한이 완전히 무장 해제된 것 같은 얼굴로 웃자, 로나가 가슴께를 부여잡고 살짝 멀어졌다.
뭐지.
평소에 퇴폐미 있던 남자가 헤실거리니까 갭이 엄청나!
넘어갈 것 같아!
“좋아. 저 모나한의 꼬심에 넘어갔어요.”
“네?”
“야식은 이 누님이 사 주마!”
“음, 로나. 저랑 몇 살 차이 나는 줄 알아요?”
“몇 살 차이인데요?”
“로나 씨에게 누님이라고 하면 양심이 좀 많이 찔리는 차이?”
“누나라고 해 봐요, 모나한.”
“제가 양심이 날카로운 편이 아닌데, 지금은 좀 아프네요.”
이번엔 모나한이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로나가 그 모습을 보며 깔깔깔 웃다가, 식당 쪽으로 가볍게 걸으며 전생에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누나 한번 믿어 봐-”
“……네?”
모나한이 당황하며 로나를 보자, 로나가 마치 마이크를 잡는 듯한 손동작과 함께 뒤로 딱 돌았다.
“평생토록 내가- 안아- 줄게-”
그리고 모나한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와하하 웃음을 쏟아 내었다.
모나한은 그 노래에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가, 로나의 웃는 얼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평생인 거죠?”
“네?”
“누나를 믿기만 하면 평생 안아 주신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와- 이 뻔뻔한 놈!”
“말했다시피…….”
“양심이 죽었구나!”
“사망한 지 오래죠.”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리는 모나한의 얼굴은 빵집에서의 언제나와 같이 입꼬리가 쭈욱 올라가 있었다.
뻔뻔하고, 장난기 가득하고, 기분 좋게.
로나가 그 표정을 보며 입꼬리 쭈욱 올라가게 웃었다.
뻔뻔하고, 장난기 가득하고, 기분 좋게.
* * *
그 후에 둘은 여관을 돌아다니다 아실라의 기척이 느껴지면 멀리 돌아가곤 했다.
정확히는 모나한이 기척을 느끼고 ‘저기 아실라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우리 돌아가요’라고 말하면서 로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원래 아실라에 대해 별생각 없던 모나한이 갑자기 ‘그 여학생은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라면서 피하는 것이 로나는 의아하게 느껴졌지만, 자신도 아실라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년기의 어린아이일 뿐이지만, 로나는 아실라가 가끔 정말 그냥 ‘게임 속에 나오는 인물’인 것처럼 평면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이 현실에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
그래서 로나도 아실라를 보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모나한이 알아서 아실라를 피하게 해 주니 오히려 편하달까.
둘은 아실라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관광하고, 온천을 즐기고, 맛있는 것 먹고, 여관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일주일을 놀았다.
그리고 다시 빵집으로 돌아갔을 때, 둘은 피부 반짝, 머리카락 찰랑한 그야말로 즐겁게 휴가를 갔다 온 사람들이 되었고, 빵집은 처음 샀을 때보다 깨끗이 정돈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와. 부서진 보람이 있을 정도인데요.”
“귀족가의 직공들이 고쳤을 테니, 전보다 제대로 되었을 거예요.”
자잘한 물건 정리는 스스로 해야 했지만, 창문이나 벽면, 벽지 같은 것들은 오히려 전 가게보다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로나는 새로 인테리어 한 기분이라며, 맘에 든다는 얼굴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가게 안쪽으로 치워 놓았던 진열대를 낑낑거리며 들고 움직였다.
그 모습에 모나한이 빠르게 다가가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렇게 다시 빵집을 열 준비를 끝낸 두 사람은 휴일이 지난 수요일, 평소와 같이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해가 막 뜨는 시간, 광장 저 너머에서 울리는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에 로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햇빛이 창가를 넘어 로나의 눈을 밝게 비추었으므로 더 자려 해도 잘 수가 없기도 했다.
전생에서는 몰랐는데, 높은 건물이 없는 이곳의 태양은 눈에 직선으로 들어오곤 해서, 한낮의 태양보다 아침의 햇살이 밝게 느껴지기도 했다.
로나는 여느 날과 같이 햇빛을 피해 일어나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방에 딸린 작은 화장실에서 몸을 씻었다.
벽 사이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하암.”
거울을 보며 머리를 쫑쫑쫑 땋아 내리며 크게 하품 한번 하고는, 익숙한 빵집 유니폼으로 차려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잘 잤어요?”
어느새 완벽한 차림새를 한 모나한이 빵집 바닥을 쓸고 있는 것에 로나가 맞춰 손을 흔들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모나한은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아 반쯤 감은 로나의 눈이 귀엽다는 듯이 한번 웃고는 바닥 쓰는 것을 계속했고, 로나는 어제 만들어 놓은 반죽들을 하나하나 검사했다.
여느 날과 같이 완벽하게 발효된 반죽들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아직 이른 아침의 햇살이 비추는 창문가의 커다란 반죽대 위에 노르스름한 반죽을 올려놓았다.
밀대로 밀고, 모양을 만들고, 쿠키 틀로 찍고, 짤주머니로 짜기도 하고.
로나는 만들어지는 반죽들과 달궈지는 오븐의 열기, 구워지는 빵의 냄새들에 일상생활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실라가 다시 오는 일요일 전까지는 언제 나와 같은 규칙적인 일상이 계속되리라.
“로나. 밖에 정리 다 끝났어요.”
“저도 반죽 다 오븐에 넣었어요. 커피 하나 타 줄래요?”
“좋아요. 아침 만드실 거예요?”
“네. 오믈렛 먹죠. 치즈 넣은 오믈렛에 소시지. 그리고 흰밥. 어때요?”
“좋아요. 빵은-”
“막 구워진 거 드세요. 거대한 위장을 가진 뱀파이어 씨.”
“하하. 제 위가 크긴 하죠.”
모나한이 윗배를 툭툭 건드리며 웃었다.
조금도 튀어나오지 않은 판판한 뱃살이다.
아니, 살이 아니라 근육이겠지.
로나는 그가 답답하다고 풀어놓은 조끼 안쪽으로 보이는 새까만 셔츠를 빤히 바라보았다.
“보여 줄까요?”
그라자 모나한이 셔츠를 검지로 톡톡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뭘요?”
“복근요. 예쁘게 갈라져 있는데.”
그 말에 로나는 구겨지는 미간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모나한은 미간과 같이 구겨지는 코끝을 귀여워하며 쳐다보았다.
“무슨 빵 먹을래요?”
로나는 그 시선을 흘리고는 주전자에 물을 넣으며 물었다.
“오늘은 어떤 걸 구우셨어요?”
모나한이 로나의 손에서 주전자를 부드럽게 뺏었다.
“평소 자주 굽는 크림빵이랑 모카번, 케이크 몇 개랑…… 아, 오늘은 크루아상을 잔뜩 구웠네요.”
로나는 주전자에 적당히 물이 차오르자 수도를 잠갔고, 모나한은 발걸음을 화덕 앞으로 옮겼다.
그 옆을 로나가 졸졸 따라 걸었다.
“크루아상을요?”
“네. 꿈에 나왔거든요. 진한 갈색으로 구워진 겉면이랑, 안쪽의 예쁜 베이지색. 결에 따라 찢어지는 면들과 안에서 풍기는 버터 향.”
“윽.”
“바깥쪽은 바삭하게, 안쪽은 부드럽고 쫄깃하게.”
“아, 배고파지잖아요.”
“꿈에서 너무 맛있게 먹어서. 일어나자마자 잔뜩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잔뜩 만들었군요.”
“잔뜩 만들었죠.”
모나한이 주전자 물이 끓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로나는 부엌 곳곳을 돌아다녀 오믈렛을 만들 재료를 모았다.
치즈, 우유, 버터, 계란.
그리고 같이 구울 소시지.
“바삭하게? 촉촉하게?”
“아침이니까 촉촉하게.”
그 말에 로나는 냄비에 물을 받아 소시지를 퐁당퐁당 넣고는 삶았고, 옆에 보울에 계란과 우유를 적당히 섞어 달궈진 프라이팬에 부었다.
샛노란 계란이 구워지는 소리가 치이익- 옅게 울렸다.
아침 햇살이 내리는 빵 구워지는 냄새가 가득한 주방에서, 화덕을 놓고 나란히 서서.
모나한과 로나는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모나한이 만들어 놓은 새하얀 밥을 밥그릇에 뜨고, 로나가 오믈렛과 소시지를 접시에 올리고.
모나한이 샐러드를 만들려고 사과를 깎고, 로나가 케첩과 마요네즈를 예쁘게 뿌리고.
모나한이 커피를 내리고, 로나가 수저를 놓고.
둘은 사이좋게 아침을 만들고, 아직 어떤 빵도 세팅되지 않고, 어떤 손님도 오지 않은.
아침 햇살이 가득 쏟아져 내리는 깨끗한 빵집 식탁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익숙한 아침이고, 익숙한 하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