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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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실라가 올려다보는 사내는 훌륭한 운동 실력과 완벽에 가까운 균형으로 상자를 받아 냈다.

그의 옅은 회색 머리카락은 살랑거렸고, 등 뒤에서 전등으로 인한 빛이 사륵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빛이 뒤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살짝 어두운 얼굴, 그리고 그 가운데 이상할 정도로 선명한 색으로 빛나는, 아실라를 내려다보는 선홍색 눈동자.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약간은 싸늘한 빛을 담고, 회색 속눈썹과 함께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모나한이 방긋방긋 웃을 때와 전혀 다르게 퇴폐미를 한껏 풍겨 내고 있었고, 그건 아실라 주위에서 보기 힘든 ‘나쁜 어른 남자’의 모습이었다.

아실라는 모나한의 퇴폐미에 홀려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앗, 그…… 감사합니다아.”

아실라가 이상한 소리를 낸 것이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

빤히 보지는 못하고 힐끗힐끗 한 번씩 올려다보는 하늘색 눈망울이 상당히 귀여웠다.

그 울망거리는 눈동자에 모나한은 무언가 대사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

“저…… 죄송합니다.”

모나한이 무언가에 이끌려 아실라에게 말을 걸려던 순간, 등 뒤에서 물건을 떨어트렸던 소년이 사과하며 말을 걸었다.

모나한은 멋대로 대사가 나올 뻔한 입을 다물고 그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은 곱슬거리는 밤색 머리카락을 멋대로 흩트린 비쩍 마른 아이였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잔뜩 주눅 들어 있는 모습과 불안에 떠느라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그리고 이상하게 자신의 뒤를 힐끗거리며 무언가를 걱정하는 모습.

모나한은 이상하게도 그 불안에 떠는 모습에서 이젠 거의 생각나지 않는 과거의 제 모습을 떠올렸다.

아직 뱀파이어가 되기 전, 아무것도 없어서 불안에 떨며 살았던 그 시절.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은 이상할 정도로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의 예전과 비슷한 색의 밤색 머리카락이 그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불안에 떠는 눈이나, 부딪힌 사람보다 등 뒤를 더 걱정하는 모습이-.

“하?”

모나한은 순식간에 부글거리며 요동치는 감정에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소년이 흠칫하며 어깨를 더더욱 좁히는 것을 본다.

그 모습 또한 과거의 저와 닮았다.

과거의 저와 이상할 정도로 닮은 소년과 상황이라…….

“네 녀석!!”

그래서 모나한은 소년의 뒤에서 쫓아오는 뚱뚱한 남자가 쏟아 낼 말을.

“무슨 짓을 한 거냐! 이 한심한 놈!”

그 소년이 겪은 부당한 일들과 앞으로 겪을 부당한 일들이 전부.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멍청해서……. 하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지?”

꼭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고 투영되어서.

모나한은 딱딱히 굳은 얼굴은 한 채, 아무 대답 없이 소년에게 들고 있는 짐을 넘겨주었다.

소년은 눈치를 보다가 재빠르게 모나한의 손에 있는 상자들을 받았다.

실험실에 가기 전, 아주 어릴 적에 자신은 부모님을 잃고 큰아버지 집에서 더부살이했었다.

불공평과 욕설, 손찌검이 당연했던 삶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눈치 보며 버텼던 나날.

그리고 그중에 어떤 날은 그들의 짐을 들고 걸어가다가 한 사내와 부딪혔었고, 그 사내는 화를 냈고, 큰아버지는 그 사내에게 굽실거리더니, 사내가 사라지자 자신을 심히 구타했었다.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이라 큰아버지의 얼굴은 당연하게도 잊어버린 지 오래였고, 이제는 그 상황조차 잘 기억나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이 상황은 마치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선명히 그려 내었다.

약하고 불안했던 나날과 서글프고 아팠던 감정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누구도 자신의 편이 아니었던 나날.

그래서 제발이라고 빌며, 단 한 명만이라도 자신의 편이 있기를 바랐던 비참했던 삶.

“말이 심하시네요!”

모나한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넘어졌던 아실라가 벌떡 일어나 뚱뚱한 사내에게 소리쳤다.

“저렇게 많은 짐을 들고 있으면 당연히 부딪히죠! 당신은 들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설마 저 소년에게 모든 일을 다 시키면서 그런 못된 말을 하는 것 아니겠죠!?”

“흠, 흠. 아가씨. 그것이 아니라…….”

“괜찮으세요?”

아실라는 사내의 말은 듣지도 않고 소년에게 다가가 물었다.

소년은 멍한 얼굴로 아실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나한은 소년의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이해가 되었다.

아무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자신의 상황을 알아주지 않으려 할 때, 알아주려고 하는 단 한 사람.

자신이 절대 반항할 수 없는 사람에게 당당히 소리치는 사람.

그는 어느새 소년과 똑같이 멍한 표정이 되어 아실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한 소년의 시각에서, 아실라가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을지 모나한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소녀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하늘거리겠지.

등 뒤에 전등은 마치 천사의 후광처럼 빛날 것이고.

분노와 용기가 가득 찬 하늘색 눈동자는 너무나도 멋있고, 믿음직할 것이다.

목소리, 행동, 표정.

그 모든 것이 마치 자신을 위해 내려진 기적 같겠지.

소년의 시선이 아니라, 옆에 서 있는 자신의 시선에도 소녀는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웠다.

모나한은 마치, 소년과 똑같은 표정으로 아실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에- 빠질 것처럼.

모나한은 멍한 표정으로 빛나는 아실라를 바라보며, 이것이 마치 그것들 같다고 생각했다.

로나 씨가 언제나 남주인공들 이야기를 하며 말했던 것들.

그래, ‘구원’ 같은-.

“아하.”

모나한이 멍했던 표정을 딱딱히 굳히며, 진득하게 낮은 목소리를 내며 이죽거렸다.

이건 아무래도 무슨 쇼 같은 것인 모양이지?

내 과거의 트라우마나 상처 같은 것들을 생각나게 해서, 대리 만족으로 구원받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래서 여주인공에게 반하게 하는.

모나한은 냉정하게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눈에 이제 아실라라는 소녀는 마치 요정처럼 보였다.

분홍색 머리카락은 물기에 젖어 살짝 진하게 내려앉고, 속눈썹조차 팔랑거린다.

연한 하늘색 눈동자는 반짝거리고, 온천물에 상기된 피부가 어여쁘다.

화가 난 표정조차 신기하고, 화를 내는 이유조차 흥미롭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이 장면들은 짜증 나기 그지없는데, 그 장면을 구원으로 바꿔 주는 이 소녀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렇게 느껴진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뇌 한 부분이 멍하니 달아오르고, 사랑에 빠진 것처럼 뜨겁다.

이 모든 것이-.

“기분 나빠.”

“네?”

모나한이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해 돌아보는 아실라를 향해 눈꼬리를 휘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과거와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그것들에 어떠한 반응을 했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죽여 버렸던 적이 몇 번이고, 구원한 적은 몇 번이나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

그것들은 이미 충분히 모든 걸 무시할 만큼 해 보았는데.

이제 와서 감정이 흔들리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 애를 어떻게 할 생각이신지?”

“아앗…… 그게…….”

“보아하니 저대로 보내 봤자 더한 보복에 시달릴 텐데요? 저 사내가 반성할 리는 더더욱 없고.”

“……제 시종으로 삼겠어요!”

“하하.”

아실라가 작은 손으로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그 모습 또한 사랑스러워 보여서 모나한은 그만 짧게 웃고 말았다.

어딘가 머릿속이 망가진 것처럼 아실라가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것을 감추는 법을 미소라고 배웠으므로, 더더욱 입꼬리를 올리고, 눈가를 휘었다.

“대단하시네요.”

“……아니에요. 전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순 없어요.”

“아하.”

“하지만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저와 인연이 닿는 사람들은- 구할 수 있겠죠.”

소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굳센 얼굴로 말했다.

하긴, 여주인공이라는 명칭에 딱 어울려 보이는 타입이긴 했다.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남을 구원하겠다는 사람.

그런 이들은 보통 정말로 구원하려는 이와 그냥 착한 사람이 되려 하는 이로 나뉘곤 했었지.

이 소녀가 어떤 쪽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쪽인지 상관없기도 하고, 관심도 없다.

과거 어느 순간에는 관심 있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래.

내 감정이 요동치는 이 상황이 싫다.

“그렇군요. 착한 분이시네요.”

“아앗! 아니에요…… 전 그렇게 착하지 않은데…….”

“아뇨. 아무나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죠. 훌륭하세요.”

모나한은 입으로 칭찬하고, 표정은 웃으면서도 마음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이 소녀와 저 비쩍 마른 소년과 뚱뚱한 사내까지 죽여 버렸을 것이다.

제 감정을 다시 평온히 만드려면, 이 상황 자체를 없애 버리는 편이 빠르니까.

그리고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겠지.

그걸 하지 않는 건 로나 씨 때문이다.

로나 씨가 온천을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로나 씨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니까.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생각보다 쉽게 튀어나오는 이유들이 기꺼웠다.

그녀의 옆에 있으면 감정이 온화하게 흐른다.

평화롭고 평온하게.

모나한은 로나를 생각하며 끓어오르려 하는 감정들을 내리누르려 애썼다.

“모나한?”

그리고 가볍게 통통 튀어 오르는 듯한 목소리가 아니라, 여성치고는 낮게 가라앉는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리누르려 애쓰던 감정들이 그 목소리에 순식간에 온화하게 가라앉았다.

“로나 씨.”

모나한이 아실라를 내려다보던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땋고 있던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구불거리며 풀어져 있었다.

땋고 있어서 몰랐는데, 곱슬머리였던 모양이다.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조금 진한 색으로 흐르고, 평범한 갈색 눈동자 아래 따끈하게 상기된 볼과 촉촉하게 달아오른 피부.

막 온천에서 나왔기에 그녀 주위에 있는 공기가 따뜻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달아오른 피부 아래에서 물씬 피어오르는 향기.

막 구운 빵의 냄새.

태양 빛에 달아오른 나무의 향이나 햇빛의 냄새 같은 것들.

“따끈해 보여요.”

“네?”

“로나 씨가 엄청 따끈해 보이는데 한번 안아 보면 안 되나요?”

“뭐라냐.”

여주인공이라는 아실라가 움직이는 감정들과 전혀 다른 감정들이 느껴졌다.

충격적으로 몰려오는 감정이 아니고, 쏟아져 내리듯 내리치는 감정들이 아닌.

잔잔하게 흐르는 감정들.

완만한 곡선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은 시간들.

“로나 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사 놓으려고 했는데, 못 했다.

“막 목욕을 마친 로나 씨가 아주 귀엽고 예쁘네요.”

내가 챙기라고 했던 외투를 걸친 모습이 사랑스럽다.

“뭐지? 갑자기 예쁜 얼굴로 달콤한 말 하네?”

“더 할까요? 예쁜 행동도 할래요.”

“음…… 좋아. 보기 좋네요. 계속해.”

“저랑 달콤한 음료수 먹으러 가실래요? 약한 도수가 있는 술은 어떨까요?”

“어……저기…….”

로나는 갑자기 예쁘게 행동하는 모나한에게서 눈을 떼고 말을 거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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