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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한에게 퉁명스러운 얼굴로 손을 흔들고 여탕으로 들어간 로나는, 잠깐 여탕 입구에 서서 빨갈 게 분명한 볼을 만지작거렸다.

능글맞은 모나한 같으니.

괜히 속으로 투덜거린 로나가 제 볼을 한번 꼬집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빌어먹을 모나한에 대한 생각 같은 건 그만두자구!

지금 중요한 건 드디어 온천에 왔다는 거지!

전생과 달리 목욕 문화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판타지 세계에서의 온천이라니!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글 수 있게 되다니!

로나는 모나한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사물함에 옷가지를 던져 넣었다.

그러곤 안내받은 대로 빠르게 샤워를 끝내고 온천쪽으로 걸어갔다.

이 여관을 야외 온천이 있어서, 로나는 한껏 기대를 부풀렸었다.

그리고 야외 온천으로 가는 나무 문을 연 순간, 로나는 모든 기대가 훅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온천이 아름답지 않다든가, 별로였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꽤나 비싼 여관답게, 야외 온천은 깨끗했고, 밖과의 단절된 벽도 대나무 벽으로 고풍스럽게 연출되어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 아래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온천은 아름다웠고, 묽은 맑아 보였다.

문제는 저 온천 한가운데에 떡하니 앉아 있는 어디서 많이 본 분홍색 머리카락이었다.

분명히 저 평범하지 않은 솜사탕 분홍색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여주인공 아실라였다.

로나는 몸을 가리 하얀 수건을 꼭 쥔 채 망설이다가, 밤바람에 젖은 몸이 추워 부르르 한번 떨고는 한숨도 한번 푹 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터덜터덜 아실라 쪽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아앗! 점장님!”

로나의 인사에 아실라가 그 하늘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로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특유의 과장되고 예쁘고 귀엽고 블라블라한 얼굴로 반갑다는 표정을 했다.

“여기서 만나다니 생각도 못 했어요.”

“아, 저도요. 여기는 고급 여관이라도 귀족분들이 쓰기에는 좀 평범하지 않나요?”

“예전에 말했듯이 제가 한미한 남작가의 여식이라서요…… 헤헤헤, 부끄럽게도.”

“아아, 그렇군요.”

로나는 아실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속으로 작게 한숨 쉬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빵집의 주인이라는 타이틀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딜 가든지 이 게임 속 여주인공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 무슨 운명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내가 남주 중 한 명이 아닌 게 다행이고, 라이벌 포지션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우와. 생각해 보니 나이가 어렸으면 저 중2병들을 가지고 이 애랑 다퉈야 하는 거였어?

끔찍하다.

로나는 아실라의 수다에 대충 맞장구치면서 생각했다.

아실라는 할 말이 어찌나 많은지 쉬지 않고 종알거렸는데, 물에 젖어 살짝 진해진 분홍색 머리와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과 따뜻한 물에 혈기 도는 피부가 어여쁘기만 했다.

목소리도 종알거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로나에게는 왠지 멀게만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게임 속의 여주인공이라서 현실 감각이 없게 느껴지는 거겠지.

어쨌든 오글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외에는 딱히 피해 주는 것도 아니라서 로나는 아실라와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녀는 딱히 신경에 거슬리는 말이나, 기분이 나쁠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밝고, 사랑스럽고, 달콤한 이야기들.

로나가 현실감이 없다는 것만 빼면, 좋은 이야기 상대이기도 했다.

“읏.”

“왜 그러세요?”

“으음…… 뜨거운 물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요. 약간 어지러웠어요.”

“그럼 이제 나가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로나 씨가…….”

“저는 좀 더 있다가 갈게요.”

로나의 말에 아실라는 조금 망설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보아하니 좀 더 수다를 떨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로나는 이제 좀 조용히 온천을 즐기고 싶었다.

아실라는 몇 번 더 그렇게 망설이더니 가 본다고 말하고는 총총거리며 사라졌다.

로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온천 안에 목까지 전부 몸을 넣었다.

뜨거운 물에 긴장이 훅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현실감 없는 대화라서 적당히 맞장구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긴장됐었나 보지.

그녀는 왠지 뭉친 듯한 어깨를 몇 번 주물거리고, 자신이 나갔을 때 아실라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별이 가득 박힌 하늘을 한번 봤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깜박거리며, 조용해진 온천을 즐겼다.

로나가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그때, 로나를 기다리려 먼저 밖에 나와 있던 모나한이 막 여탕에서 나온 아실라와 마주치고 말았다.

“아앗!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모나한은 아실라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기척을 훅 죽였지만, 여주인공 버프인지 뭔지.

아실라는 모나한을 쉽게 발견하고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모나한은 올라오는 떨떠름함에 잠시 망설이다가, 어쨌든 손님이니 예의 바른 웃음과 함께 인사했다.

“그…… 모나한 씨였죠?”

“네. 맞습니다.”

“전 아실라라고 해요! 세르빈 아실라!”

“만나서 반갑습니다, 세르빈 님.”

“아앗! 아실라라고 불러 주세요! 귀족이긴 하지만…… 한미한 남작가예요! 고향에서는 평민분들이랑도 친하게 지냈답니다.”

“……네. 아실라 님.”

“헤헤헷.”

모나한은 굳이 아실라랑 긴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살짝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디서 남주인공 같은 소년이 나타나거나, 보이면 이 자리를 재빨리 피할 생각이었다.

로나 씨도 없고, 심지어 로나 씨의 빵도 없는데 그 엄청난 상황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로나 씨의 기척이 밖으로 나올 것 같으면 돌아오면 되지.

여탕의 기척까지 신경 쓰는 건 신사가 할 짓이 아니라 안 하고 있었지만.

아실라와 피하려고 그랬다면 로나 씨도 깊이 공감하며 이해해 주실 것 같았다.

다행히 어디에도 남주 후보로 보이는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 기척이 몇 개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실라 또래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모나한은 조금 안심하며 제 가까이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아실라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만나다니! 깜짝 놀랐어요! 안 그래도 여탕 안에서 로나 씨를 만나서, 모나한 씨도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거든요!”

“저를요?”

“네! 저는 모나한 씨랑 친해지고 싶어요! 아앗! 오해하진 마세요!”

아실라의 친해지고 싶다는 말에 모나한이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하자, 아실라가 눈치 빠르게 부정하며 손을 흔들었다.

“전 그냥 주위에 어른 남성분이 없어서…… 이것저것 조언을 조금 받고 싶달까…… 헤헤헷.”

그렇게 말하는 아실라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살짝 붉었고, 웃는 눈에선 애교와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누구나 그녀의 그 웃음을 보면, 같이 따라 웃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았고.

그러나 모나한은 그 어여쁜 얼굴을 바라보며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야, ‘싫습니다’라고 단호히 거절하고 싶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빵집의 단골이었다.

그것도 귀족인.

만약 자신 혼자 관련되었다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테지만, 로나 씨도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모나한은 마음 속으로만 한숨을 푹 쉬었다.

호감을 얻기 위해 건네야 하는 말들은 수도 없이 알고 있다.

그저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 해야 하는 말들은 더 많이 알고 있고.

하지만 굳이 이 소녀에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소녀에게 있었을 많은 사람들과 달리, 자신은 이 소녀의 호감을 얻고 싶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냥 남남으로 멀리 지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호감도 비호감도 아닌 무관심이 아실라에 대한 모나한의 생각이었다.

딱히 엮이고 싶지 않음. 이랄까?

그런 자신과는 다르게 아실라는 자신과 대화가 더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소녀는 딱 봐도 대화를 더 하고 싶어요, 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런 아실라에게 말을 걸 생각이 전혀 없는 모나한은 예의 바른 모습으로 예의 바른 미소를 띤 채 거절의 말을 혀끝에 올렸다.

“아앗!”

“윽!”

그러나 이 소녀는 신이 도와주는 게 틀림없달까, 인생이 전부 그녀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달까.

상자를 양팔 가득 들고 있는 소년이 아실라를 향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모나한은 충분히 그녀를 보호해 주거나 피하도록 할 수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실라는 소년과 부딪혔고, 소년의 물건을 와르르 쏟아졌으며, 아실라는 모나한을 향해 넘어졌다.

모나한은 자신의 품 안으로 넘어지는 아실라를 슬쩍 몸을 뒤틀어 피하며 생각했다.

이대로 넘어지는 걸 모른 척하는 것과 팔으로라도 잡아 주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나중에 덜 귀찮으려나.

물론 과거에 배웠던 기사도 어쩌구와 사람에게 호감 받기 위한 어쩌구에서는 허리를 감싸 안고 품 안으로 안아서, 고개를 살짝 내려 유려한 턱선과 걱정에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러기 싫었다.

그런 호감을 얻기는 더더욱 싫었고.

물론 로나 씨라면 엄청나게 멋있고, 약간은 섹시하게 움직인 다음에, 묘하게 티가 나게 걱정해서, 농담하며 점수를 땄겠지만…….

모나한의 본능은 이 소녀에게 그럴시에 엄청나게 귀찮은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나한은 절대로 로맨스적인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을 행동을 했다.

그는 자신의 동체 시력으로 슬로모션처럼 쓰러지는 아실라가 거의 땅바닥에 다다랐을 때, 딱 부딪혀 다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그녀의 상의를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한쪽 손과 한쪽 발끝으로 소년의 손에서 쏟아지는 상자들을 균형 좋게 받아 내었다.

“괜찮으십니까?”

“크, 크엣!”

딱 등 부분을 잡았으므로 요상한 그물에 걸린 것 같은 아실라가 목이 반쯤 졸린 듯한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었다.

모나한이 상의를 놔주자 아실라는 그대로 바닥에 이상한 몰골로 엎어졌다.

그녀는 멍하니 엎드려 있다가, 몸을 일으켜 졸렸던 목을 몇번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제 입을 가리고는 엄청나게 당황한 얼굴로 모나한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을 가리는 것에 소질이 없는지, 그녀의 표정을 해석해 보자면, ‘내가 이런 이상한 소리를 낸 건 생전 처음이야’ 정도일까.

아니면, ‘이렇게 이상한 꼴로 구해진 건 처음이야’ 정도일까.

아실라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모나한을 올려다봤다.

모나한이 생각한 대로, 어떻게 해도 로맨스가 일어날 수 없는 구출이긴 했다.

그러나 모나한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의 잘생긴 외모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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