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19/154)

19

다행히 그 후에는 별일 없이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로나는 모나한에게 아직 사냥을 덜 한 게 아니냐 물어봤지만, 모나한은 괜찮다며 평소처럼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에 로나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올라올 때와 같이 밝은 걸음으로 내려갔다.

그 후 둘은 매주 화요일마다 산으로 사냥 겸 소풍을 나갔고, 여학생은 매주 일요일마다 빵집에 오곤 했다.

자신이 가 본 빵집 중에 여기가 제일 실력 좋다고, 제일 맛있고 제일 예쁜 디저트가 가득하다며 로나의 빵집을 찬양했다.

그 방긋방긋 웃는 뽀얀 얼굴을 바라보며, 로나는 잠깐 자신이 어린 시절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스쳐 지나가 얼굴을 굳혔지만, 모나한이 조용히 다가와 건네준 레몬티에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빵집을 찬양하며 통성명을 하게 된 여학생의 이름은 세르빈 아실라.

그녀는 자신이 귀족이긴 하지만 한미한 남작가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편하게 대해 달라며 무해하게 웃었다.

그 후 아실라가 빵집에 올 때마다, 모나한은 로나에게 레몬티를 타 주며 방긋 웃고는 했다.

로나는 그 휘어지는 눈가와 입꼬리를 보며 잘생겨서 재수 없고, 안심돼서 짜증 난다고 중얼거렸다.

그 입 모양을 알아챈 모나한이 코끝을 찡그리며 짓궂게 웃었다.

로나는 천천히 아실라에게 익숙해졌다.

모나한이 있음으로써 그녀의 게임 속 이야기와 자신의 현실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아실라에게는 파란만장한 게임이지만 로나 자신에게는 그저 가끔 사건이 일어나는 생활일 터였다.

로나는 그냥 일상생활을 새롭게 환기하는 이벤트가 열린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후 그녀는 아실라가 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아실라가 엄청난 양의 빵을 사 가는 만큼, 주위의 입맛 까다로운 귀족들에게도 나누어 주는지 경험치와 빵 코인도 꼬박꼬박 올랐다.

역시 평민과 달리 맛있는 거 왕창 먹어 온 고급 입맛!

로나는 들어오는 경험치와 빵 코인에 흡족해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김치도 상점 창에 나오지 않을까?

로나는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경험치 바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와 같은 일요일 오후 즈음.

아실라가 언제나와 같은 밝은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아실라 님. 좋은 오후예요.”

“네! 오늘 정말 하늘이 예쁘더라구요! 앗! 이건 뭔가요?”

“그건 이번 주 신작인 슈크림 빵이에요. 크림을 다르게 해 봤죠. 시식해 보시겠어요?”

“당연하죠!”

아실라는 행복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이젠 아실라를 그저 귀여운 여학생으로 볼 수 있게 된 로나가 흐뭇하게 웃으며 시식용으로 만든 작은 슈크림을 넘겨주었다.

“어떡해! 너무 귀여워요!”

파는 슈크림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지만, 시식용은 딱 한입에 넣을 수 있는 방울만 한 크기였다.

구름을 닮은 뭉실뭉실한 모양의 슈크림이 조그맣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귀여운 모습에 아실라가 볼을 붉게 상기시키며 말했다.

로나는 귀여운 여학생이 귀여운 과자를 들고 있는 모습에 흐뭇해하던 입꼬리는 좀 더 올리며, 아실라의 하얗고 조그마한 예쁜 손바닥에 작은 슈크림 빵을 올려 주었다.

“먹기 아까워요. 너무 귀엽다!”

“먹어 보면 바로 먹지 않은 것이 슬플 정도로 맛있을 거예요. 잘못하면 버릇처럼 계속 집어 먹게 된다니까요?”

“정말요?”

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열대를 정리하고 있는 모나한을 흘깃 쳐다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눈을 마주친 모나한이 예쁜 선홍색 눈동자를 데굴 굴리더니 손가락 하나를 들고 헤실헤실 웃었다.

방금까지 버릇처럼 계속 시식용 슈크림 빵을 집어 먹었던 범인이 이제는 파는 슈크림 빵 하나만 먹자며 애교 부리는 거였다.

로나는 아실라 몰래 손을 휙휙 휘저었다.

그 손동작의 뜻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모나한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슈크림 빵을 들고 깨물었다.

아실라의 손바닥에 있는 미니 슈크림의 거의 세 배는 크고, 연한 베이지색 위에 하얀 설탕 가루가 뿌려져 있는 슈크림 빵은 순식간에 모나한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안에 새하얀 크림을 가득 넣어서 입가에 묻은 크림까지 혀로 깨끗이 핥아먹은 모나한이 아쉽다는 듯이 시무룩한 표정을 했지만, 로나는 모른 척했다.

저 자식, 시식용 미니 슈크림 빵도 그렇게 집어 먹었는데, 이제는 판매용까지 노리네.

위장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사각지대에서 사장과 종업원이 꽁냥거리는 것도 모른 채 아실라는 손바닥에 있는 미니 슈크림 빵만 빤히 쳐다보았다.

하얀 손바닥에 있는 몽실몽실한 슈크림 빵은 귀엽고 예쁘기 그지없었고, 겨울날 만들었던 작은 눈사람처럼, 녹을 걸 알면서도 방에 가져가 장식해 놓고 싶어지는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아실라가 예쁜 하늘색 눈동자를 깜박이며 고민하다가, 겨우 결심하고 슈크림 빵을 입에 넣었을 때.

가게 문에 붙여 놓은 알림 벨이 딸랑 울렸다.

“아실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순금으로 만든 실같이 찬란히 반짝거리는 금발과 새파란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학생이었다.

또래 남학생들보다 커 보이는 키와 얇지만 약해 보이지 않는 몸은 그가 얇은 근육질의 몸매를 가지고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고, 살짝 내려간 눈 끝과 부드러워 보이는 입매는 그의 따스한 성격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아실라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부드러운 미성이었고, 문을 열고 걸어오는 몸짓은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이었다.

모나한이 가톨릭 신부님이라면 이 남학생은 그야말로 교회 오빠!

비슷한 계열의 미남이지만 모나한은 퇴폐를 추가했다면, 남학생은 부드러움을 추가한 외모였다.

-축하합니다! ‘틸레아 분홍 꽃’의 남주인공 중 한 명을 만났습니다.

-새로운 업적을 얻었습니다.

역시 엄청난 미남이다 싶었더니, 게임 속 남주 후보 중 한 명이었다.

로나는 올라올 알림에 상태창을 열어 업적을 확인했다.

-<‘틸레아의 분홍 꽃’의 빵집 업적이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 ‘틸레아의 분홍 꽃’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 중 한 명을 만났습니다. 관련 이벤트가 빵집에서 벌어질 확률이 더욱 올라갑니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에게서 얻는 경험치와 빵 코인이 상승합니다.>

예상한 대로, 드디어 빵집에서 이벤트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프리먼 님!”

아실라가 남학생을 보고 깜짝 놀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프리먼이란 이름을 가진 남학생은 아실라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발걸음을 더 빠르게 하여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이름을 불린 것이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가 아니라.

워이씨. 환각이 보였네.

순간 저 학생 뒤로 꽃이 가득한 배경이 보였어. 황금색 꽃이 가득 피었어.

아앗! 이 장면을 일러스트로 본 것만 같아!

황금 꽃 배경에 환하게 웃고 있는 왕자님!

“같이 학원으로 돌아갈까 해서 널 불렀는데, 못 듣고 가 버려서…… 뒤따라가다가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어.”

프리먼이 그렇게 말하면서 눈꼬리를 축 내리자, 이번엔 뒤의 꽃들이 물을 머금고 고개를 숙이는 환각이 보였다!

청초하고 불쌍한 미남이 되었다!

“죄송해요. 따라오시는지 몰랐어요.”

“아냐, 내가 멋대로 따라왔는걸. 근데 여긴…….”

“아! 여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빵집이에요! 매주 일요일마다 이 빵집에 와요. 제 인생의 낙이죠.”

“하하. 맞아. 아실라는 빵을 아주 좋아했지. 식당에서 빵을 먹을 때, 엄청 맛있게 먹더라.”

“아앗! 보셨어요? 우우…….”

“정말 귀여웠어. 토끼인 줄 알았는걸.”

볼을 붉게 물들이고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모르는 아실라를 향해 프리먼이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둘의 사이에서 핑크빛 분위기가 달콤하게 흘렀다.

로나는 그 모습을 보며 짜게 식은 눈으로 초점을 흐렸다.

올 게 왔다는 느낌이 온몸에 흘렀고, 실사로 보니까 더 끔찍하다는 생각이 강력히 뒷목을 내리쳤다.

알고는 있었지만, 일러스트나 텍스트로만 보던 것과 실제로 눈앞에 일어나는 일은 엄청난 차이였다.

게임 ‘틸레아의 분홍 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러스트에 꼬여서 시작했다가 항마력이 딸려서 접는 게임이었다.

그러니까 남주들이나 여주들의 대사가 다 저 모양 저 꼴이란 소리다.

어이, 남에 영업장에서 왜 연애질이야.

그리고 왜 감탄사가 그따위고 비유가 그따위야.

“그새 크림빵이라도 먹은 거야? 입가에 새하얀 게 묻었는걸.”

“아앗!”

“그쪽이 아니야. 훗…… 칠칠치 못하긴.”

아실라는 분명히 한입에 다 먹을 수 있는 크기의 미니 슈크림 빵인데도 불구하고 입가에 크림을 묻혔고, 분명히 프리먼이 오른쪽을 가리켰는데도 왼쪽을 닦았고, 프리먼은 엄청난 대사를 날리며 아실라 입가의 크림을 엄지로 닦았다.

그리고 심지어 그대로 엄지를 자기 입으로 다가가 핥았다.

로나는 보았다.

마치 배경처럼 기척을 죽이고 있던 모나한이 그 순간 깜짝 놀라며 움찔하는 것을.

그는 엄청나게 충격받은 얼굴로 아실라와 프리먼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눈을 깜박이다 못해 떨리는 동공을 그대로 보여 주며 로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자기가 본 게 실화냐고 묻고 있었다.

로나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참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저 대사와 행동은 전부 현실입니다.

심지어 저 모습에 부끄러워하며 빨개진 얼굴을 가리는 저 여학생의 반응도 실화이며, 그런 그녀를 보며 뿌듯해하는 표정을 하는 저 남학생의 모습도 실화입니다, 그대여.

“제 입에 묻었던 건데……. 더러운데…….”

“그럴 리가. 아실라의 입에 묻었던 거잖아? 더…… 달콤한걸.”

너 우리 집 크림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잖아.

더 달콤한지 어떻게 아는데.

“그, 그런……!”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귀엽긴.”

아, 그만둬 주세요.

항마력이 딸려요.

여러분 뒤를 봐 봐요. 저기 회색 머리 뱀파이어가 죽어 가고 있어요.

저기 봐. 안 그래도 창백해 보이던 피부가 이젠 파란색일 지경이야.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걸 보고 있다는 표정이잖아. 지금.

“여기 빵을 사러 온 거지? 내가 사 줄게. 먹고 싶은 거 얼마든지 골라.”

“아니에요! 제가 살 수 있어요.”

“아냐. 너한테…… 달콤한 걸 먹여 주고 싶어.”

프리먼이 부끄러워하는 아실라의 턱을 살짝 잡고 말했다.

로나는 그의 뒤에서 배경으로 ‘아기 고양이-’라고 흘러가는 게 보이는 것 같아 눈을 꾹 감았다.

너 그거 아냐, 그만둬.

만약 그 대사를 치면 진짜 빵 던진다. 얼굴에 던진다.

“내 아기 토끼-”

변화구!

와장창!

프리먼이 변화구를 던짐과 동시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가게 안에 울렸다.

로나는 순간 자신의 멘탈이 부서지는 소리인가 고민했지만, 이내 모나한이 쟁반을 떨어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이걸 치우려다가 그만.”

모나한은 멋쩍게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쟁반을 들며 말했다.

“괘, 괜찮아요!”

그제야 이 빵집 안에 단둘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아실라가 완전히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붕붕 저으며 대답했다.

“빠, 빨리 빵 사서 가야겠다. 저 이, 이거랑 이거! 이거 먹을게요!”

“네,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로나는 수년간 단련된 자본을 위한 미소를 겨우 띠고 계산했고, 아실라는 허둥지둥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프리먼이 “조심해!”라면서 마지막 대사까지 던지며 따라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