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모나한이 안내한 공터는 갑자기 눈앞을 빽빽이 채웠던 나무들이 사라지면서 나타났다.
시야가 확 넓어지고 무성한 가지들 사이로 햇빛이 부서져 반짝였다.
푸르게 자란 잔디와 이끼, 앉기 딱 좋을 크기의 돌 몇 개, 자잘한 작은 꽃들.
동화 속 정도는 아니지만, 괴수들이 사는 숲속이라기엔 평화롭고 예쁜 공터였다.
“와. 생각보다 예쁘다.”
“그렇죠? 사냥 왔을 때 여길 발견하고 로나 씨에게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오. 로맨틱해.”
“성공?”
“성공.”
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자 모나한이 다행이라며 웃고는,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다.
그사이 로나는 주위에 있는 잔가지들을 주워 모았다.
이내 공터 한가운데 부근에 모닥불이 피워지고, 둘은 따뜻한 커피와 여러 가지 샌드위치들을 맛있게 먹어 치웠다.
모나한은 당신의 손에서 만들어진 건 전부 맛있다는 아부를 열심히 떨며 샌드위치를 먹고는 아쉬운 얼굴을 하고 손을 흔들며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가기 전에 그는 자신의 목덜미에 그의 턱 주변을 몇 번 부비적거렸다.
이때다 하고 유혹적으로 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깔끔하게 굴어서 오히려 놀랐다.
아마도 자신이 아직 그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렇게 행동하는 듯했다.
눈치 빠른 자식.
로나도 모나한이 싫은 건 아니었다.
잘생기고 예쁜 미남과 하는 스킨십이 어찌하여 싫겠는가.
그것도 이미 성인이 된 지 오래인데, 두 팔 벌려 환영하고도 남지.
하지만 아직 모나한이 다가올 때마다 뒤로 한 발짝 물러나게 되는 그런 게 있었다.
그를 믿지 않는다거나, 신뢰가 덜 쌓였다기보다는 감정이 덜 쌓였달까.
사랑이라기엔 아직 너무 가벼운 감정이었고, 그냥 가볍게 살을 섞기에는 무언가 걸렸다.
그냥 해 버리면 이후의 관계가 엉망이 될 거 같은 예감?
아직은 마음속에 전생의 유교걸이 남아 있기도 했다.
마음속 유교걸 로나가 콧수염을 달고 나타나 ‘아직은 아니된다아-’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런 로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모나한은 언제나 마지막 한 걸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나곤 했다.
잠깐, 이게 바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인가?
그렇게 오글거리고 귀여운 짓 하고 싶지 않은데…….
로나는 모나한과 닿았던 부분을 몇 번 매만지고는 모나한이 숲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같이 손을 흔들어 주며 그렇게 생각했다.
뭐지. 남편 배웅하는 부인이 된 기분.
그녀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모나한이 사라지고 숲에는 작은 새소리만 일렁거렸다.
로나는 주위 수풀에서 태우면 벌레를 쫓아내는 효능이 있는 풀들을 골라 모닥불에 던지며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자신의 방 창가에서도 자주 보던 책이었지만, 예쁜 공터에서 보는 책은 또 다른 재미였다.
숲 특유의 청량한 공기와 나뭇잎 사이로 흘러내리는 빛이 책 위에 반짝였다가 바람에 흩어지곤 했다.
로나는 한껏 평화로운 마음이 되어 독서를 즐겼다.
책이 한 장 한 장 규칙적으로 넘어가고, 따뜻한 커피 한 잔, 레몬차 두 잔을 마셨을 때 즈음 로나는 귀에 들리는 작은 소리에 책에 집중하고 있던 시선을 뗐다.
집중하고 있던 귓가에 날카로운 소리가 작게 울렸었다.
“뭐지?”
잘못 들었다고 하기에는 사람의 비명 소리와 비슷해 로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청각에 집중하였다.
그러자 이번엔 좀 더 뚜렷하게 소리가 들렸다.
성별을 구별할 수 없지만, 분명히 사람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
로나는 무릎 위에 있던 책을 내려놓고 일어나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몇 걸음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음…….”
뭔가 가까이 다가가면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근데 내가 가 봤자 저는 빵이나 만들 줄 아는 소시민입니다만.
로나는 고민하다가 가장 먼저 모닥불을 끄고 짐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이미 한껏 집중하고 있는 귀는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비명 소리에 흠칫흠칫 놀랐다.
아무리 모나한이 안전하다고 해도, 그가 달려오기 전에 무언가 일어날 수 있었다.
로나는 어릴 적 숲에 들어갔을 때 배웠던 것들을 떠올리며, 정리한 짐을 수풀 속에 숨기고, 모닥불의 흔적을 지웠다.
그리고 몸을 몇 번 풀고는 낑낑대며 나무 위로 올라갔다.
어릴 적에는 쉽게 올랐던 나무가 몸이 커지고 무거워지자 어려워졌다.
그러나 맹수를 피해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빠른 다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맞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 그녀에게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은 나무 위에 숨는 것이었다.
만약에 저 비명 소리가 사람이라서 로나의 시선이 닿은 곳까지 도망쳐 온다고 해도, 그녀는 조금도 도울 생각이 없었다.
원래 오지랖이란 건 안전한 곳에서만 발휘해야 하는 법.
자신은 여주인공도 아니고, 제 한 몸 지킬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겠음.
로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뭇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위에 자리 잡았다.
공터에는 아직 불을 피운 냄새와 잘 보면 흔적 몇 개가 눈에 띄곤 했지만, 그것까지 처리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 같았다.
샌드위치나 음료수가 들어 있던 바구니에서 날 냄새도 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바구니를 숨긴 수풀과 꽤 떨어진 나무에 오른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맹수가 자신을 발견하면 코인을 전부 써서라도 배를 불려 줄 생각이었다.
로나는 비명 소리의 주인이 오기 전에 모나한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자신의 귀에도 들린 소리이니, 뱀파이어인 모나한의 귀에는 더 선명히 들렸을 거고, 그는 우선 자신을 데리러 올 것 같았다.
로나가 나무 위에 완전히 몸을 숨겼을 때, 소리는 몇 번 더 울리다가 침묵했다.
어느새 새소리도 사라지고 적막만이 짙게 내려앉았다.
* * *
모나한은 로나의 샌드위치를 가루 하나 떨어트리지 않고 솜씨 좋게 먹어 치웠다.
그는 정말로 가루 하나까지 아까웠다.
어찌 이렇게 솜씨가 좋은지, 매일 샌드위치만 해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얼마나 훌륭한 제빵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집요한 미식가는 여러 종류의 빵을 실컷 먹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이다.
제 주인의 목덜미 자신의 턱을 비빌 때에도, 그는 로나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잘 보여서 그만 속으로 조금 웃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담백하게 굴었다.
더 이상 경계심을 사고 싶진 않았다.
모나한은 깔끔하게 물러나고, 방긋거리며 로나에게 인사하고는 수풀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제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는 로나가 귀여워서 그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로나에게 자신의 모습은 나무 그림자에 싸여 보이지 않겠지만, 그의 훌륭한 시력은 로나의 온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녀가 숲의 공터, 햇빛이 환하게 흘러오는 곳에 서 있는 탓이기도 했다.
로나는 아침에 출발한 것과 같은, 청 멜빵바지, 탄탄한 신발, 밀짚모자와 양쪽으로 땋은 머리 그대로였다.
그리고 자신이 사 준 붉은 물방울무늬 손수건과 동그란 안경까지.
야무져 보이는 얼굴에 경계심 강한 성격인 거치고는 너무 귀여운 외양이지 않은가?
모나한은 자신도 모르게 그림자 아래에서 입꼬리를 몇 번 씰룩거리다가 씨익 웃고, 로나가 책을 펼칠 때 즈음에야 조용히 사냥을 하러 떠났다.
애초에 상당히 깊이 들어왔으므로, 모나한은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사냥을 했다.
아주 익숙한 일이었고, 지루한 일이었다.
그냥 언젠가 먹어 본 스테이크, 언젠가 먹어 본 생선구이- 정도.
사실 그냥이라기에는 상당히 고급진 맛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미각을 충족시키는 디저트를 먹다 보니 싱겁게만 느껴졌다.
빨리하고 돌아가야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 주위에선 전혀 나지 않을 법한 냄새가 맡아졌다.
진득하고 달달한 설탕 냄새.
그것도 제대로 정제되지도 않아 쓴맛이 담긴 싸구려.
“이 주위에 인간이 있을 리가 없는데?”
모나한은 잠시 로나가 걱정되었으나, 자신이 기억하기에 로나의 피는 밀 빵의 고소한 달콤함을 닮았었다.
게다가 그녀의 규칙적이고 건강한 생활 방식을 대변하듯, 그녀의 피의 향 또한 그런 냄새였다.
무엇보다 누군가 피를 흘려서 맡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얇은 피부 아래 박동하여 흘러나오는 냄새였고, 그건 로나 말고 다른 인간이 이 주위에 있다는 뜻이었다.
모나한은 입가에 묻은 스테이크 맛의 피를 한번 핥고는, 수풀 사이로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싸구려 단내가 가까워졌을 즈음, 몸을 나무 위로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 명의 사내가 부스럭거리며 나타났다.
“이쪽 맞아?”
“그렇다니까! 그 약해 보이는 기생오라비하고 계집이 올라갔다고!”
“이 주위는 괴수 밭인데, 왜 여기를?”
“나야 모르지. 그보다는 그 계집은 물론이고, 사내새끼도 비싸게 팔릴걸?”
“그 정도라고?”
“그래! 그 계집도 상당히 튼튼해 보였다고! 요즘 비실거리는 것들만 팔아먹었잖아. 오랜만에 손에 목돈 좀 쥐자고!”
모나한은 나무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몇 번 긁적였다.
인간들이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심한 놈들은 하나씩 있다니까.
아니, 하나씩이 아니라 상당히 많지.
어딜 가든지 기생충처럼 꾸물거리며 돌아다니곤 하니까.
어디 피 빨아먹을 것 없나- 하고 빌빌거리며 기어 다니는 것들.
모나한이 그림자에 가려진 입을 이죽거렸다.
그는 딱히 살육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식사를 마다하는 이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손톱을 날카롭게 빼내고, 그들을 공격하려다가 멈칫- 몸을 굳혔다.
그리고 잠깐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로나가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을 곳.
그래, 그녀는 이런 것들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다.
살육이나, 피, 공포, 비명 같은 것보다.
따뜻한 햇볕, 차 한 잔, 빵이 구워지는 오븐, 땋은 머리, 물방울무늬 손수건, 동그란 안경.
하루하루 그저 열심히 사는 사람.
모나한은 자기도 모르게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고는, 조용히 나무 아래로 내려가, 한 사내의 목을 조용히 꺾었다.
“끄륵-”
꺾인 척추 때문에 죽은 이의 입에서 피거품이 튀어나왔지만, 그 작은 소리 정도는 햇빛 가득한 공터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른 이들이 눈치채기 전에 몸을 움직였다.
“넌 뭐야! 으아아-!”
다섯 명이나 되는 바람에 비명 소리가 조금 울리긴 했지만, 평범한 인간이 듣고 경계할 만큼 큰 소리로 울리진 않을 것이었다.
모나한은 마지막 한 명까지 가볍게 쓰러트리고는 잠시 그들은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낡고 더러운 가죽 갑옷, 그나마 조금 깨끗한 것 같은 칼에서 풍기는 지독한 썩은 단내.
씻고는 다니는 건지 땟국물이 잔뜩 껴 있는 목덜미.
모나한은 그것을 잠시 빤히 보다가 손은 내려 그나마 깨끗한 목덜미를 베어 내, 손톱 끝에 피를 한 방울 묻혔다.
그리고 혀로 가져가 핥아 내렸다.
창백한 손가락 끝에서 붉은 혓바닥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그보다 더 붉은 피 한 방울이 혓바닥에 스며들어 천천히 번졌다.
모든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달콤함이 모나한의 혀끝에 머물렀고, 그는-.
“퉷!”
그대로 바닥으로 그것을 뱉어 버렸다.
“냄새, 모양, 청결, 맛. 뭐 하나 괜찮은 게 없네. 입맛만 버렸잖아.”
모나한은 몇 번 더 퉤퉤거리며 입을 씻어 내고는, 더 이상 시체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특유의 우아한 발걸음으로 걸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따라서.
“좋은 냄새인데, 특이하게 식욕은 별로 안 든단 말이야.”
식욕이 들긴 하는데, 더 맛있는 게 주위에 많아서 괜찮은 건가?
모나한은 로나를 떠올리며, 그녀의 옆에서 차나 한잔 얻어 마시면서 입을 헹궈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나에게 이런 것들은 하나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모나한은 그냥 사냥을 갔다 온 척하기로 하고 가볍게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