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날 가게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
아직 진열대에 남아 있는 빵들이 있었지만, 모나한도 로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둘은 노을이 지는 시간대에 붉게 물든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내일은 월요일이었고, 가게는 휴일이었다.
로나는 그대로 모나한을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같은 집, 같은 2층에서 살고 있지만, 둘은 서로의 방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
마주 보고 있는 방인지라 방문과 복도만이 두 방을 나누고 있었지만, 둘은 서로의 방에는 침범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모나한이 로나의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는 그 방의 풍경이 1층의 빵집과 똑같다고 느꼈다.
단정하고 깔끔한 실내 장식과 창가에 조그마한 화분 몇 개, 아기자기한 장식이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제 방을 빼고는 전부, 로나의 색에 가득 물들어 있는 곳이었다.
로나는 모나한을 창가로 안내했다.
노을이 짙게 내려오는 창가에는 네모난 탁자와 작은 의자 하나가 있었다.
보아하니 방에 있을 때는 주로 창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양이었다.
열어 놓은 창으로 아직 조금은 서늘한 저녁 바람이 살랑거리며 들어왔다.
그 바람에 따라서 창가를 장식한 하얀색 얇은 커튼이 흔들거렸다.
모나한은 로나가 주로 앉아 있었을 의자에 앉아 로나를 바라보았다.
로나는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벽의 책상에 앉았다.
그러고는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로나는 모나한은 창가에 앉혀 두고, 조금 진정된 마음으로 종이에 펜을 놀렸다.
전생에 보았던 게임.
분홍머리 여자아이가 나오는 미연시 학원물.
로나는 그 게임 내용을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잘 기억나지 않아 낑낑거렸다.
그리 주의 깊게 보았던 게임도 아니고, 전생에 봤던 무수하게 많은 다른 정보들이 섞여 자신의 손에 쓰이는 게 알맞은 내용인지도 헷갈렸다.
“왕자, 기사, 마법사, 상인……. 차례대로 따뜻, 무뚝뚝, 까칠, 능글이었던가?”
하지만 그 게임이 옛적의 왕도를 따라가던 게임인 건 기억났다.
그리고 상당히 가벼운 내용인 것도.
자신이 어릴 적 방황과 방금까지 불안이 억울할 정도로 ‘틸레아의 분홍 꽃’이란 게임은 뻔한 내용이었다.
한미한 남작가의 여식인 여주인공이 귀한 빛의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 틸레아 학원에 입학하고, 이후 네 명의 남주 후보를 공략하면서 사건 사고를 겪는 이야기.
진짜 이게 다였다.
심지어 숨겨진 이야기나 외전도 없는 게임이었다.
사실은 얀데레라든지, 숨겨진 마족이었다든지 하는 이야기 하나 없었다.
그저 화려한 일러스트와 잘생긴 남주 후보들, 귀엽고 예쁜 여주인공으로 많은 사람을 늪으로 빠트린 게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러스트 보고 뽕 차서 시작했다가 항마력이 딸려서 접게 되는 게임이랄까…….
한때 엄청 유행했다가 사그라들었던 게임이었달까…….
로나는 종이에 남주 후보들의 프로필을 다 적고 나자 적을 게 없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여주인공이 겪은 사건들이 전부 헷갈렸다.
“뒷골목에서 양아치를 만나고…… 남주가 구해 주고……. 구원……. 축제라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데이트, 대회에 나가서 우승…….”
아니던가 비리가 있어서 떨어졌던가?
“빵집에서 빵을 먹고……. 먹고……. 사 먹고……. 아! 생일파티 했다!”
맞아. 뭔가 남주 후보 중 한 명이 빵집에 와서 케이크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든가 했던 듯.
“그리고 또 빵을…… 사 먹고…….”
로나는 열심히 중얼거리면서 종이를 채워 나가려 노력했지만, 이놈의 여주인공은 얼마나 빵순이인지 생각나는 게 여주가 빵 먹은 장면밖에 없었다!
아니, 진짜로 게임에서 여주가 엄청난 빵순이이긴 했다.
매주 일요일마다 빵집에서 빵을 사 먹는 바람에 매주 빵집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빵순이!
로나는 순간 자신이 게임 안으로 들어왔다고 걱정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게임에서 빵집은 그냥 연애하기 위한 이벤트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눈앞에서 연애질 하는 걸 보려면 화가 좀 나긴 하겠다만, 어쨌든 여주인공은 비싼 빵들을 왕창 사 가는 단골손님이 되는 데다가, 남주들도 여주의 호감을 얻기 위해 빵집에서 비싼 빵들을 사 갔던 것 같다.
빵집 입장에선 힘들게 하나도 없단 말이다.
그냥 이때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자신의 빵집이나 잘 운영해 나가면 될 것 같았다!
다른 빙의나 환생 소설에서는 서브 남주나 악역 남주와의 로맨스가 이루어지거나, 사실은 자신이 진 주인공이어서 역하램을 차린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펼쳐질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그런 것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 여기 남주들은 다 미성년자다.
평민의 성인 나이는 열다섯 살이지만, 귀족들의 성인 나이는 열아홉 살이고, 전생의 관점이 있는 나에게 아직 열다섯 살 언저리에서 학원에 다니고 있는 게임 속 주인공들은 사랑 어쩌구 하기엔 너무 어린 애들이었다.
다들 꼬꼬마들이잖아!
“생각해 봤는데요.”
“네.”
로나는 어느새 낙서만 끄적여지고 있는 종이를 멀리 치워 버리고 창가에 앉아 있는 모나한에게 말을 걸었다.
“그 게임이 그냥 연애물이거든요. 오늘 낮에 온 여학생이 남학생들 몇 명하고 친해져서 연애 직전의 우정물을 찍다가 결국 한 명이랑 연애하는? 그런 내용이란 말이죠.”
“걱정할 필요가 없단 말인가요?”
“네. 그냥 돈 많이 쓰는 단골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어요.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니…….”
“위기는 없었나요?”
“네?”
“소설 같은 게임이면 어쨌든 여주인공한테 여러 가지 위기가 닥칠 텐데, 빵집과 관련된 위기는 없었나 해서요.”
모나한이 그렇게 말하자 순간적으로 어떤 사건이 로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독…….”
“독요?”
“네. 있었어요. 여주인공이 독이 들어간 빵을 먹고 쓰러지는 사건요. 그 빵이 제 빵집의 빵일 거예요.”
“누명을 쓰는 건가요?”
“……아마도?”
모나한은 로나의 동공 지진 하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얼굴은 앞에서 봐도 옆에서 봐도 ‘모르겠어요’다.
아니, 솔직히 그런 일이 있긴 했는지도 잘 모르겠는걸.
빵집 여주인이 엉엉 울면서 여주인공에게 감사하다고 하는 일러스트가 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 여주인 엑스트라라서 심지어 눈도 안 그려졌던 것 같은데!
모나한은 로나의 동공 지진을 보다가 피식하고 얇은 웃음을 지었다.
“우선 너무 걱정하진 말죠. 미리 불안에 떨어 봤자 소용없으니까요. 차라리 몇몇 상황을 생각해 보고 대비하는 게 좋겠어요.”
“으으음…….”
“로나 씨 빵에 독을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날 만들어 놓은 발효 중인 반죽에 넣는다?”
“하지만 아침마다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시식해 보잖아요. 게다가 그럼 불특정 다수가 먹게 되고요. 빵집에서 일어나나요? 아니면, 빵을 사 가서 다른 곳에서 일어나나요?”
“글쎄요. 빵을 먹고 쓰러졌다는 일러스트를 본 기억이 있어서요. 알고 있다시피 그 여주인공인 여학생은 점심 겸해서 먹고 왕창 사 가잖아요. 저녁 식사로 먹었다가 쓰러지는 일러스트를 본 것 같아요.”
“음…… 중간에 와서 빵에 독을 넣어 놓기에는 제 눈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만약에 원작에서 중간에 몰래 독을 푼다면, 현실에선 저한테 들킬 거예요.”
“……빵집에 누가 몰래 들어오면 알아차릴 수 있죠?”
“물론. 소드마스터 정도면 모르겠지만, 그런 이가 독살을 꾀하려고 하진 않겠죠.”
“끽해 봐야 학원 귀족 영애의 시종이나 돈 받은 심부름꾼일걸요?”
“그럼 모를 수가 없죠. 제가 얼마나 예민한데.”
“그럼 평소에는 별 신경 쓸 필요 없겠네요. 모나한이 없을 때가 문제군요? 저는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로나는 모나한의 말에 안심하며, 모나한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보던 모나한이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 사냥에 따라오실래요?”
“네?”
“아침에 창문을 전부 닫고 나갔다 오죠. 그럼 건물 안의 공기는 정체될 거고, 중간에 누가 들어왔다면 냄새가 달라질 거예요.”
“으으음…… 사냥 따라가도 되는 거예요?”
“로나 씨는 제 주인님이잖아요. 게다가 로나 씨의 체향은 막 구워진 빵 냄새거든요. 밀 빵 같은 냄새가 나죠.”
“……더 위험한 거 아닌가요.”
“구별하기 쉽다는 말이에요. 로나 씨의 피보다 로나 씨가 만드는 빵에 더 관심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고요.”
“……오히려 걱정되고 있지만, 믿어 볼게요. 그럼 내일은 우선 맛있는 디저트를 먹고요.”
“네에.”
“화요일에 같이 나가 봐요. 샌드위치 좀 싸 갈까…….”
“소풍이네요. 신나는군요.”
“……네, 뭐. 그렇네요.”
로나는 모나한의 신난다는 말에 떨떠름하게 긍정했다.
뱀파이어가 사냥하러 나가는데, 샌드위치 도시락을 들고 쫄래쫄래 따라가는 빵집 여주인이라.
분명 마수를 무서워하고, 마족으로 알려진 뱀파이어를 무서워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나한의 말처럼 소풍처럼 느껴져 로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내일이 기대되어 두근거리는 것이 정말로 소풍 전날 밤 같았다.
“기대돼서 못 주무실 거 같으면, 제가 재워 드릴까요?”
“자장가라도 불러 주게요?”
“땀을 좀 뺀 후에, 자장가도 불러 줄게요. 어때요?”
모나한이 로나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가볍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뇨. 자신의 방으로 사라지도록 하세요.”
“이런. 혼자 쓸쓸하고 차가운 침대에서 자야겠군요.”
“물주머니에 따뜻한 물이라도 채워서 안고 주무시든지요.”
그 말에 모나한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조용히 다가와 로나의 손을 잡았다.
오늘 처음으로 만지고, 붙잡고, 방으로 초대해 주었던 손을.
모나한은 우아하고 천천히 가져가 느릿하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피부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가 느껴졌다.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로나는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의 달빛에 빛나는 회색 머리, 유혹을 담아 휘어진 선홍색 눈동자, 수려하게 흐르는 얼굴선, 야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끝을 세워 그 뻔뻔한 얼굴을 쭉 밀며 웃었다.
“잘 자요, 모나한.”
로나는 그 달빛이 모나한만을 비춘다고 생각했지만, 로나의 얼굴에서도 달빛이 흘러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달콤하게 반짝이게 했다.
모나한은 그 부드러운 색과, 그녀의 손끝에서 맡아지는 향과, 얇은 피부 아래 흐르는 피에서 피어오르는 달큰한 향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가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을 가볍게 흔들자, 아직 달빛 아래서 웃고 있는 로나가 보인다.
그녀가 손을 흔드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나한은 복도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유일하게 로나의 손길이 조금도 닿지 않는 삭막한 방이었다.
그렇지만 아래층 부엌에서 하루 종일 피어올랐던, 구워진 밀가루의 향이 온 건물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나한은 그 향과, 방금 맡았던 로나의 향을 조금 비교하다가 웃고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