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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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레아의 분홍 꽃>

전생에 했던 미연시 게임.

전생에 했던 미연시 게임의 여주인공.

분홍색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동자를 가지고, 정말 아름답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예쁘고 귀여우며, 특유의 밝음으로 모든 남주 후보들을 치유하는.

작고 평범하고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빵집이 다시 울렁거리고, 무섭고, 끔찍해지기 시작했다.

“난 이제 필요 없어.”

“로나?”

로나의 목소리가 마치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 미연시 속에 나오는 빵집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고 있었다.

미연시 속에 여주인공은 빵을 아주 좋아하는 소녀이며, 남주인공들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빵집에 찾아온다.

빵집에서 일어나는 온갖 이벤트들.

저 빵집은 무슨 죄냐는 댓글을 보고 낄낄대며 웃었던 전생의 평범했던 나날들.

“로나!? 로나!”

모나한이 초점을 맞추지 못하며 어지러워하는 로나를 보다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그 높은 소리에 로나는 겨우겨우 초점을 맞춰 모나한을 바라보았다.

회색의 머리카락과 선홍색 눈동자가 지독히도 잘생기고, 지독히도 멀다.

“모나한.”

“네, 로나! 어디 안 좋아요!? 갑자기 왜-”

“여기가 게임 속이었어요.”

“네?”

“빌어먹을 게임 속이었다고.”

“게임, 요? 그 체스나 포커 같은?”

“아뇨. 선택지가 주어진 소설이나 그림 같은 거였어요. 역할 놀이 같은 거.”

“음, 네.”

“거기서 여주인공이 되어서 남자들을 공략하는 거예요.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보듬어 주고. 남자들은 그녀에게 반해서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노력하죠.”

“음…….”

“그냥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 같은 거예요. 남주 후보가 여러 명이고 여자 주인공은 그중에 골라서 이야기를 이어 가는 거죠.”

“그리고 그 소설이 현실이 됐다는 건가요.”

“네, 맞아요. 하…… 그래요. 현실이 되었네요. 이제야, 겨우, 결국에는, 마침내.”

모나한은 사실 잘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나 씨가 하는 말이니 믿겠다고 말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안심시키려는 듯이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로나는 순간 지독히도 멀던 얼굴이 선명해진 것 같아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럼, 음…… 로나 씨가 주인공은 아닌 것 같고.”

“미쳤어요?”

“하하. 방금 나갔던 그 분홍 머리 여자아이가 주인공이라 그거죠?”

“네, 맞아요. 빌어먹게도 제 인생에 드디어 무언가가 시작되었네요.”

모나한은 로나의 아직 거친 숨과 짓씹듯 뱉은 말에 로나의 등을 몇 번 부드럽게 도닥였다.

그리고 그녀를 천천히 티 테이블로 이끌고 의자에 앉혔다.

“이야기를 좀 할 필요가 있는 거 같죠?”

“……네.”

“좋아요. 전 듣고 싶어요. 로나 씨의 화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좋겠지만, 로나 씨는 싫어하시죠? 이성 잃고 화내는 거요.”

“……네, 싫어요.”

“그럼 제가 우유, 아니, 레몬차를 따뜻하게 좀 타 올게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알겠죠?”

“네, 모나한.”

모나한은 따뜻한 우유를 타 오려다가, 로나의 흔들리는 동공에 말을 바꾸었다.

굳센 심지처럼 땅에 단단히 박혀 있던 것 같던 사람이, 낙엽처럼 흔들거리며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전생의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에 더더욱 그러는 것 같았고,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것들에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모나한은 전생에서도 현실에서도 먹었을 것 같은 레몬차를 골라 권했다.

로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모나한은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평소보다 기척을 내며 움직였다.

로나는 그 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였다.

규칙적인 발소리와, 찬장에서 병을 꺼내는 소리와, 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모나한은 로나의 앞에 따듯한 차를 두고, 가게 문 앞에 닫았다는 푯말을 걸고 돌아왔다.

그동안 로나는 머그잔 위로 뿌옇게 올라오는 수증기에 멍하니 시선만 주고 있었다.

“우선 한 모금 마실까요?”

모나한이 로나 앞으로 머그잔을 조금 밀며 말했다.

로나는 망설이다가 레몬차를 천천히 목 뒤로 넘겼다.

달콤하고 새콤하고, 따뜻한 것이 목 뒤로 넘어가고, 어느새 차가워진 몸을 천천히 데웠다.

“조금 진정 됐나요?”

“……네.”

“좋아요. 그럼, 음. 로나 씨 인생에 뭐가 시작됐는지 말해 봐요.”

모나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테이블 위에 있는 로나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흐- 뭐죠, 이거?”

“제가 여기 있으니까 안심하라는 뜻이죠.”

로나가 바람 빠지듯이 웃으며 묻자 모나한이 평소보다 느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약해진 틈을 타서 꼬시는 거 아니고요?”

“음, 반반?”

로나는 평소처럼 코웃음 치거나, 손을 빼 버리지 않고 손을 잡은 채로 가만히 있다가, 엄지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가늘고 긴 아름다운 손은 생각보다 거칠고 많은 굳은살을 가지고 있었다.

잘 보니 눈에 잘 띄지 않는 옅은 흉터들도 몇 개 만져졌다.

로나는 왠지 제 손이나 그의 손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그 흉터와 거친 굳은살과 손등에 툭 튀어나온 뼈들을 만지작거렸고, 모나한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어릴 적에 전 시골의 삶이 끔찍했어요. 보통 시골 여자아이들처럼 지루하고 평범해서 끔찍한 게 아니라, 그냥 전생이랑 너무 달랐거든요. 차라리 모르면 괜찮았을 텐데, 나에겐 그건 평범한 삶이 전혀 아니었거든요.”

로나는 모나한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작게 말했다.

“전생에선 많은 것들을 배워야 했어요. 많은 책을 읽고 지식을 쌓는 게 당연했죠. 여기서 시골의 작은 아이가 그러는 건…… 일을 안 하고 노는 거더라고요. 내가 하는 모든 평범은 핑계고 이상한 거고 쓸데없는 거였죠. 그래서 그냥, 너무 힘들면 중얼거렸어요.”

로나는 천천히 깍지를 풀고 모나한의 네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손톱이 시작되는 부분과 끝과 손끝의 둥근 부분까지.

불안과 공포가 그러면 사라질 것처럼. 천천히.

“전생의 소설들은 그런 게 많았거든요. 거기서 살다가 죽으면 이쪽에서 깨어나는 거예요. 전생에 봤던 소설 같은 거에 등장인물로요.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라이벌이나, 조연……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모험이나, 사랑 같은 거요. 어릴 적에 그런 것들을 수도 없이 생각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어느 날 운명처럼- 시작될 거야.”

로나는 조곤조곤 말했다. 자신의 과거임에도 이야기책을 읽는 것처럼.

“매일 일어나자마자 닭에게 밥을 주는 아침이 아니고, 물을 길으러 우물로 가는 게 아니고, 불을 피우는 게 아니고, 열 살짜리 아이의 손끝이 부르트는 나날이 아니고, 열다섯 살밖에 안 되는 언니가 집에서 아이를 낳는 게 아니고- 멋진 사람이 나타나서, 사실은 숨겨진 비밀이 있어서, 사실은, 어쩌면, 언젠가…….”

어릴 적 동화책이나 잠깐 읽고 잊어버리는 가벼운 소설이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너무도 까만 밤이 지나고, 똑같은 아침이 오고, 저는 닭한테 모이를 주러 가죠. 제 삶은 그 지푸라기 속에서 시작되어서, 마침내 거기서 끝날 것만 같았어요. 속으로 비명만 질렀죠. 내 삶은 달라. 내일이 되면, 다음 주가 되면, 내년이 되면! 미칠 것 같아서 집에서 나와 혼자 빵집을 차렸어요. 그러면서 또 외쳤죠. 이 작은 빵집은 내 끝이 아니야! 무언가 시작될 거야!”

희극적으로.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 거죠. 아, 여기는 소설 속도 아니고, 게임 속도 아니고. 나는 그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나오지 않는 그저 현실이며, 내 삶은 오로지 내 손으로 이루어 나가겠구나.”

비극적으로.

“그래서 괜찮아졌어요. 받아들일 수 있었죠. 작고, 평범하고, 그저 그것뿐이어도. 오로지 내 손으로 일구어 나가는 거라면, 괜찮아졌죠. 집에서 나오니까 더 괜찮아졌고, 가끔 몰아치는 불안도 하나하나 만들어 낸 빵들을 보면 사그라들었어요. 인정한 거죠. 여기가 현실이고, 난 살아갈 거라는 거요.”

그리고 쏟아진 이야기들은 분노를 담았고.

“근데, 이제 와서. 이제 인정했는데, 간절히 원할 때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가, 원하지 않으니까 왔네요. 쳐들어온 거죠. 제 삶에, 제 현실에. 아, 갑자기 무서워요, 모나한. 이게 모두 꿈인가요?”

불안으로 끝났다.

“로나.”

“전 그냥 크게 다쳐서 정신을 잃은 거고, 꿈을 꾸고 있나요? 아니면, 제가 알던 게임 속 상황들이 그대로 펼쳐지는 걸 봐야 하나요? 난 못할 것 같은데, 이제 그런 거 없었으면 좋겠어요.”

“아뇨, 로나. 여긴 현실이에요.”

“그 얼굴론 설득력이 없는데, 모나한은 얼굴이 비현실적이잖아요.”

로나가 농담을 했다. 겨우 웃으려다가 끝내 찡그려 버린 얼굴로.

모나한은 그 엉망진창인 얼굴을 보다가 로나의 양손을 잡아 제 얼굴에 대었다.

한 손은 머그잔에 뜨거웠고, 한 손은 제 손 때문에 차게 식은 손.

“저 물어볼 게 있어요.”

“네, 모나한.”

“그 게임에 저도 나오나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 비현실적인 외모와 제 능력이면 남주인공이 되기 충분한 것 같은데.”

“……네?”

“근데 전 그 여학생이 전혀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제 트라우마나 상처는 이미 다 극복했어요. 극복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오래 살았다고요. 그럼 그 여학생이 치료해 줄 상처가 없군요. 흠, 제가 원하는 건 맛있는 음식인데, 그건 로나가 아주 잘하고요.”

“무슨…….”

“제가 만약 정말 사랑에 빠진다면, 그건 로나일 거예요. 지금도 로나의 손맛에 길들여진 포로거든요. 자발적인 노예잖아요, 이미. 그래서, 로나. 궁금해요. 저도 남주 후보 중의 하나인가요? 그 게임에 나왔나요?”

모나한의 말에 로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게임 속에 그가 나왔던가?

게임 속 빵집에 종업원이 있었던가?

아니, 그 빵집은 여자 사장 혼자서 꾸려 가는 작은 빵집이었다.

모나한의 말대로 그의 외모와 정체, 능력이라면 남주 후보 중 한 명이 되기 충분한데도, 그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아뇨. 아뇨. 나오지 않았어요.”

로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나한의 선홍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그의 볼을 손에 쥔 채로.

어느새 모나한의 볼의 온도와 그녀의 손의 온도는 같아져 있었다.

“나오지 않았어요, 모나한. 당신은, 그 어디에도.”

“그럼 제가 증거네요. 이곳이 현실이라는 증거예요.”

“……그런-”

“전 언제나 로나 옆에 있을 거예요. 계약상에 의하면, 죽을 때까지. 당신이 결국엔 죽을 때까지 여기가 현실이란 증거예요, 저는. 당신이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가장 큰 증거가 되는 거죠.”

로나는 회색 머리카락과 선홍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선명하기 그지없는 것들을.

로나는 창백한 피부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차갑기 그지없는 것을.

“네.”

로나가 속삭였다.

“맞아요, 모나한.”

한숨과 가깝고, 탄식에 가깝게.

“당신이 현실이란 증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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