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화
어느 날의 피크닉에서 (3)
“예! 황후 폐하께서도 건강하십니다. 무사히 순산하시고 쉬고 계시…….”
“레스티아!”
시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시언이 산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리시언.”
레스티아는 침대에 누워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산고의 고통 때문에 조금 희게 질린 안색.
지쳐 보이는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리시언이 걱정했던 만큼 신변에 위태로운 일은 없었다.
정말로, 무사했다.
“다행이야.”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무사한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리시언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레스티아의 손을 양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고생했어. 고마워. 내가 대신 아파 줄 수 없어서 미안해.”
어느새 리시언의 눈시울은 붉게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아름다운 금안이 애처롭다.
레스티아는 빙그레 웃었다.
“바보. 내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물기를 머금은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버지가 되었는데, 이렇게 울보가 되어 버리면 어떡해요?”
리시언은 고개를 저으며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도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가 된다는 건, 이렇게 눈물이 많아지는 일인 걸까.
벌써 몇 번이나 눈물을 보였는지 모른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 아기씨들께서 첫 목욕을 마치셨습니다.”
아이를 받은 산파가 레스티아와 리시언 앞으로 황녀와 황자를 데리고 왔다.
첫 목욕을 끝내고 천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갓난아이들.
황자와 황녀는 자신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걸 아는지 모르는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눈앞의 아이들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작고, 순수하고, 소중해서.
감히 건드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런…….”
결국 리시언은 레스티아가 방금 전에 눈물을 닦아 주었던 일이 무색하게,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렇게 아버지가 되었다.
또 새로운 감정을 알게 된 것이다.
무척이나 특별하고 소중한 날이었다.
* * *
“우와오아우아아! 조카들아! 마티어스 삼촌이 왔다!”
마티어스는 잔뜩 신난 상태로 황궁으로 들이닥쳤다.
레스티아의 출산 후, 황궁 출입이 허락되는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지!
얼마나 신났는지, 마력을 꾹꾹 눌러 담았음에도 땅이 조금 흔들거렸다.
“마티어스, 조금 더 진정해. 이제 막 태어난 조카들이 놀라서야 되겠어?”
조엘이 혀를 찼다.
하지만 조엘의 곁에도 산들산들 바람이 불고 있었다.
“…….”
제라르는 마력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라버니들 오셨어요?”
이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레스티아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아, 그런데 어쩌죠? 아이들은 방금 잠들어 버렸는데……. 깨울 수도 없고.”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아쉬운 듯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잠든 모습이라도 보실래요?”
레스티아의 배려로 형제들은 요람에 누워있는 조카를 만날 수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황녀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황자.
마치 리시언과 레스티아를 작게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아이들이었다.
“귀여워!!!!!”
마티어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기뻐했다.
하지만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조카들을 깨울 수 없었기에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빨리 컸으면 좋겠다. 데리고 다니면서 내가 제일 좋은 삼촌이라는 걸 알려 줘야 하는데!”
마티어스는 레스티아에게 했던 것처럼 세상에 엄청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하루라도 빨리 알려주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으흠. 내 조카들은 어떤 간식을 좋아하려나.”
조엘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이 아이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게 될지 가늠했다.
간식으로 레스티아에게 환심을 샀듯, 조카들에게도 그렇게 환심을 살 생각이었다.
그렇게 유난 법석인 조엘과 마티어스와는 다르게.
“…….”
제라르는 말없이 두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변함없이 차가운 푸른 눈동자.
조카들이 사랑스럽다느니, 건강해서 다행이라느니 하는 흔한 말 한마디 없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참으로 정 없는 삼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제라르의 눈빛이 묘하게 풀려 있다는 걸 알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라르 오라버니. 조카들을 귀여워하고 있구나.’
레스티아의 생각대로였다.
제라르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조카라는 존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막냇동생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오라버니들,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레스티아의 말에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시선이 일제히 레스티아에게 향했다.
“뭔데 리티?”
“무슨 부탁이니?”
“말하거라.”
“리시언이랑 이야기해 봤는데, 아이들 이름은 오라버니들과 상의해서 짓고 싶어요.”
“조카들 이름을? 우리랑 같이?”
“네. 언제까지 조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오라버니들이 함께 지어주세요.”
그 결과.
레스티아는 아이들의 이름이 정해지기 전까지 이 제안을 한 것을 조금 후회해야 했다.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조카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 한동안 또 야단법석을 떨었기 때문이었다.
* * *
또다시 화창한 어느 날.
황궁의 호숫가에 소란이 일었다.
“내 거믈 바댜라!”
목련 꽃처럼 하얀 고수머리의 자그마한 소녀가 제 팔뚝만 한 작은 막대기를 검처럼 휘두르며 풀밭을 아장아장 달렸다.
햇빛을 받은 금빛 홍채가 반짝반짝 빛났고, 오동통하고 짧은 두 다리는 부지런했다.
소녀가 향한 곳은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커다란 꽃나무의 그늘 아래였다.
소녀는 소년 앞에 잠시 멈추었다가.
툭툭.
들고 있던 나무 막대기로 소년이 읽고 있는 작은 책을 연신 두드렸다.
그러자 소년이 책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소녀를 올려다봤다.
“아스틸. 내가 책 일글 때 방해 말래찌.”
어린 나이임에도 오만해 보이는 무채색의 회색 눈에는 타고난 기품이 묻어나왔다.
“우. 테런은 나란 안 노라죠!”
“니가 멍충하게 노니까 글치.”
“아스틸은 안 멍충해! 검 훈련하는 거야.”
“바보. 막대기가 어떠케 검이야?”
“흥. 너두 그림책이나 일그면서!”
“이거, 글짜두 있거든?”
테런과 아스틸은 짧은 혀로 설전을 벌였다.
황자와 황녀로 태어난 두 사람은 부모인 리시언과 레스티아를 반반 섞어 놓은 것 같았다.
황녀 아스틸은 리시언처럼 검술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성격은 레스티아처럼 밝고 올곧았으며 착했다.
황자 테런은 레스티아처럼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성격은 리시언처럼 욕심이 많았고 계획적이었으며 생각이 많았다.
모두가 황자와 황녀가 황제 부부의 모습을 골고루 타고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리시언과 레스티아는 두 쌍둥이의 관계와 성격이 어쩐지…….
베르체스터의 쌍둥이, 조엘과 마티어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이런, 테런 황자님. 멍청이라든가 바보 같은 그런 못된 말을 쓰면 안 되지요.”
“윽. 조엘 삼촌. 잘모태써요…….”
테런은 유독 조엘을 따랐고.
“아스티이이일!”
“마티어스으으! 사암쵸온!!”
아스틸은 유독 마티어스를 잘 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라르가 소외되는 것은 아니었다.
“…….”
먼저 호숫가에 온 조엘과 마티어스 뒤편으로 제라르가 나타나자 아스틸과 테런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제라르 삼촌 멋있어!’
아스틸과 테런 두 사람 모두 제라르를 무서운 삼촌이 아닌, 과묵하고 멋있는 삼촌이라고 여겼다.
“제라르 삼쵸온! 오셔써요!”
아스틸이 마티어스의 품에서 내려와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제라르를 반겼다.
언젠가 제라르가 ‘이제 말을 할 줄 아니, 예를 갖추는 법을 배워야겠군.’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했던 것이다.
“아스틸. 평소에두 글케 좀 해.”
테런이 아스틸의 태도를 나무랐다.
하지만 아스틸은 메롱, 하고 혀를 내밀고는 제라르의 앞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그러자 제라르는 말없이 들고 있던 피크닉 바구니를 아스틸과 테런 앞에 내려놓았다.
“어! 삼촌! 이거 머글 꺼죠?”
두 꼬맹이는 신이 나서 피크닉 바구니를 열었다.
그 안에는 샌드위치와 주스가 가득했다.
금세 쌍둥이들의 작은 입에 침이 가득 고였다.
“제라르 삼촌이 가져오는 샌드위치 넘 마시써요.”
“마자, 마자. 이상해. 아주 오래전부터 머거본 거 가타!”
엄마 배 속에서 먹어본 것이겠지.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황자와 황녀를 바라보며 헤벌쭉한 미소를 지었다.
조카란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인가.
평생 막냇동생만 예쁜 줄 알았는데, 조카는 더욱 사랑스럽고 예쁜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게 황궁의 호숫가에 시끌시끌한 피크닉이 시작됐다.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이전처럼 피크닉 돗자리에 앉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아이의 존재란 참 신기하기도 하지.
어린 조카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놀아달라고 하니, 어색한 분위기는 금방 사라져 버렸다.
“벌써 다들 온 모양이네.”
“그러게요.”
레스티아와 리시언은 멀찍이서 온 가족이 피크닉 장소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빙그레 웃었다.
베르체스터 형제들과 아이들이 함께하는 이 풍경.
그 어떤 고난도 역경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멋진 풍경이었다.
영원히 남겨두고 싶을 정도로.
“리시언, 아직도 해석하는 자의 마법 부작용을 걱정해요?”
레스티아가 물었다.
리시언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가끔, 하지만 이제 자신 있어.”
걱정보다 행복이 더욱 크다.
그러니까 어떤 고난과 불행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대답을 이해하고는 리시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어! 어머니, 아버지 오셔써요?”
두 사람을 발견한 황자와 황녀가 소리쳤다.
“빨리 와요! 제라르 삼쵸니이 마싯는 거 가져 오셔써요!”
리시언과 레스티아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레스티아. 네가 좋아하는 베르체스터의 샌드위치가 동이 나기 전에 가야겠는걸?”
“앗, 그럼 안 돼요. 나도 먹고 싶은걸요. 빨리 가야겠어요.”
레스티아와 리시언은 익숙하게 손을 잡고 가족들이 앉아 있는 꽃나무 그늘을 향해 걸어갔다.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이렇게 함께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행복한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