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1화
어느 날의 피크닉에서 (2)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품에 안긴 채,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철벽 같은 호위를 받으며 강제로 궁 안으로 돌아와야 했다.
“리시언, 오라버니들, 저는 괜찮다니까요? 그냥 속이 조금 안 좋은 것뿐이라고요.”
레스티아는 연신 자신의 건강 상태를 항변했지만.
“……우욱.”
헛구역질이 계속 나왔기 때문에 조금의 설득력도 없었다.
리시언과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레스티아가 이렇게 헛구역질을 하며 괴로워하는데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니.
속상하고 마음 아픈 일이었다.
“황후 폐하, 소신이 옥체를 살펴보겠습니다.”
곧바로 궁의가 불려왔다.
황후가 음식을 먹고 난 후에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피를 토하거나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독살이나 위병의 위험이 있으니 면밀히 살펴보라는 명이 떨어졌다.
“구역질이 나는 것 외에 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궁의가 레스티아의 앞으로 다가섰다.
자연스럽게 리시언은 물론이오,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형형한 눈빛이 그에게 내리꽂혔다.
꿀꺽.
궁의는 두려움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이거 혹시라도 황후 폐하께서 불치병에라도 걸렸다 진단하면 목이 떨어지는 건 아닌지…….’
저절로 머릿속에 수많은 폭군들의 전적이 그려질 정도로 살벌한 기색이었다.
거짓을 고할까 고민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그는 훌륭한 의사였기에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내 궁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황후 폐하, 마지막으로 달거리를 하신 날이 꽤 지나셨지요?”
뜻밖의 질문에 레스티아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달거리는 왜……?”
궁의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경하드립니다. 태중에 아기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궁의의 진단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레스티아 역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아직 평평하기만 한 이 뱃속에 저도 모르는 사이 아이가 찾아와 자리를 잡았다니.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자, 잠깐. 아, 아기씨라고? 그, 그럼 리티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이야? 정말로?”
마티어스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정적을 깼다.
“예. 황후 폐하께서는 독에 당하시거나 병에 걸리신 것이 아닙니다. 입덧을 시작하셔서 속이 거북하신 듯합니다.”
이제 보니 갑자기 베르체스터의 음식이 먹고 싶었던 것도, 구역질을 했던 것도 모두 임신을 해서 그런 것이었다.
“맙소사. 레스티아!”
궁의의 말에 조엘이 단걸음에 레스티아의 앞으로 다가가 양손을 꼭 잡았다.
“정말 축하해!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어. 입덧이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부끄럽네.”
그러자 마티어스가 질세라 재빨리 레스티아의 앞으로 달려왔다.
“리티! 리티! 나도 축하할래! 세상에, 내가 이제 삼촌이 되는 거야? 정말이야?”
레스티아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저도…… 정말이지 믿기지가 않아요.”
“다행이군. 축하한다.”
제라르가 짧게 말했다. 푸른 눈동자 안에는 안도감이 내비쳤다.
임신이라.
그럴 때도 되지 않았나.
왜 그 생각을 못했던 건지, 다 같이 나이를 헛먹었나 싶을 정도로 무지하게 굴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결과적으로 경사스러운 일이었으니 축하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아이의 아빠가 될 리시언은 제라르보다도 반응이 없었다.
리시언은 축하한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마치 고장 난 것처럼 레스티아의 곁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리시언은 지금 현실감을 상실한 상태였다.
자신과 레스티아의 아이라니.
행복해서.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격한 감정이 몰아쳤다.
그래서…….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리시언.”
그때 레스티아가 리시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이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레스티아에게로 향했다.
“…….”
리시언의 눈앞에 변함없이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었다.
자신에게 항상 새로운 감정을 알려주는 존재.
반짝거리는 은회색 눈동자와 부드럽고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레스티아 베르체스터.
“들었어요? 우리 아이가 생겼대요! 부모가 되는 거예요.”
그녀가 이번에도 리시언에게 새로운 감정을 알려준 것이다.
맞아. 늘 그랬지.
레스티아는 늘 행복감을 안겨 준다.
리시언은 그제야 현실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레스티아. 나는…….”
바보같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해야 할 것만 같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너무 적었다.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이건 매일같이 해 왔던 뻔한 말이었다.
특별한 순간인 만큼 특별한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표현할 방법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멍청하기는.
제국의 황제, 대단한 마법사.
그 모든 수식어가 지금 이 순간에 필요가 없어서, 리시언은 자신이 하염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듯이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놀랐죠? 나도 놀랐어요.”
“…….”
“이제부터 또 준비해야 할 게 많겠어요. 부모는 처음이잖아요? 우리. 이번에도 같이 생각해 봐요.”
“……레스티아 나는.”
리시언은 말을 잃었다.
멍청하기는.
레스티아가 이렇게 자신을 바라보는데.
무어라도 해야 하는데…….
그래서 레스티아를 향해 양팔을 벌려 그녀를 품 안에 꼭 껴안았다.
“리시언?”
레스티아는 고개를 들어 리시언을 마주했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리시언의 예쁜 황금빛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가득 맺혀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봐 오면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리시언의 눈물이었다.
“리시언…….”
“이런, 미안해. 나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결국 리시언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말 대신 투명한 눈물이 맺혀 유리알처럼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레스티아는 손을 뻗어 리시언의 뺨을 닦아 주었다.
리시언이 굳이 말로 표현해 주지 않아도, 레스티아는 지금 리시언이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서로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알아요. 리시언.”
그래서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품 안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익숙한 서로의 온기가 따스하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아주 작고 몽글몽글한 또 다른 온기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어엿한 부부가 된 두 사람이 나누는 축하의 대화는 그걸로 충분했다.
* * *
임신을 확인한 다음 날부터, 레스티아는 매일매일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리시언과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과보호가 이전보다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궁의가 독에 당하거나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그냥 임신을 한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는데, 왜들 이러는 거지?
리시언은 중요한 일과를 제외한 모든 일과를 레스티아와 함께하려 들었고.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서로 돌아가며 선물을 사 들고 매일 황궁으로 찾아왔다.
임산부의 몸과 태교에 좋다는 물건들과 조카에게 줄 아기용 용품들이 매일 같이 쌓여 갔다.
레스티아는 대륙에 이렇게 많은 임산부용 용품과 아기용 용품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었다.
레스티아가 무언가 조금이라도 하려고 하거든…….
모두가 갑자기 튀어나와 말렸다.
“리티! 시킬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레스티아. 이번만큼은 이 오라버니를 믿어 주겠니?”
“너는 움직일 필요 없다.”
하면서 말이다.
이건, 리시언이 더 심했다.
“말할 필요도 없어. 그냥 눈빛으로 지시해도 돼.”
아무래도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마법이라도 쓸 수 있는 모양이었다.
“휴…….”
레스티아는 한숨을 내쉬며 이제 만삭이 된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궁의가 쌍둥이라는 진단을 내려서 그런가 봐.”
베르체스터 형제 중, 조엘과 마티어스는 쌍둥이로 태어났다.
쌍둥이를 낳고 난 후에, 가뜩이나 몸이 약했던 어머니의 몸이 더욱 약해졌다고 했었지.
아무래도 그래서 레스티아를 더욱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건강하게 태어나야만 이 유난이 사라질 게 분명했다.
레스티아는 뱃속의 아이들에게 부탁했다.
“얘들아, 어서 건강하게 태어나서 엄마를 좀 자유롭게 해 주렴.”
통통.
대답이라도 하듯 꼬물거리는 발길질이 느껴졌다.
* * *
한 달, 두 달, 그리고 열 달.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레스티아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염원대로 레스티아의 산통은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
리시언은 초조하게 산실 밖에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레스티아의 가까이에 있고 싶었으나, 레스티아가 반대했기 때문에 산실 안으로 발을 디딜 수 없었다.
‘아이를 낳을 때, 리시언이랑 오라버니들이 있으면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요. 아이를 낳을 때만큼은 편하게 해 주세요.’
그래서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황궁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됐다.
그나마 리시언은 남편이니까, 이렇게 산실 밖에서 기다릴 수 있는 특권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자신의 산통 소리를 듣고 리시언이 산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산실 안에 방음을 할 수 있는 마도구까지 설치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하는 리시언의 볼멘소리에 레스티아는 짧게 대답했다.
‘제 비명 소리 듣고 안 들어 올 수 있어요?’
……반박할 말이 없으니 따를 수밖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했다.
해석하는 자의 마법 부작용이 잘못 작용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상태였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그동안 레스티아와 아이들의 안전과 건강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가.
그래도 불안해서.
리시언은 초조하게 산실 밖을 서성였다.
숨이 막히고 목이 조여 오는 것 같은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적막감을 깨고 산실 밖으로 시녀장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황녀님과 황자님, 두 분께서 이란성 쌍둥이로 모두 건강하게 태어나셨습니다!”
“하!”
리시언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듣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채근했다.
“레스티아는? 황후의 몸 상태는 어떤 상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