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화
어느 날의 피크닉에서 (1)
화창한 어느 날.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레스티아를 만나기 위해 황궁을 방문했다.
“오라버니들 어서 오세요!”
레스티아는 평소와 다름없이 들뜬 목소리로 오라버니들을 반겼다.
“또 왔어? 황궁에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닌가?”
리시언 또한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베르체스터 형제들을 맞이했고 말이다.
“폐하. 또 왔다니요. 근 일주일 만이랍니다. 시간 계산에 착오가 많으신 것 같군요.”
“뭐야. 리티가 언제든지 오라고 했거든? 하여간 올 때마다 리티 옆에 딱 붙어서는……. 리시언, 우리가 오는 날은 좀 바쁘면 안 되나?”
조엘과 마티어스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리시언을 향해 별 의미 없는 습관성 신경전을 벌였다.
“하아……. 너희가 매번 내가 아내와 보내는 소중한 시간에 찾아온다는 생각은 안 하나 보군.”
리시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황궁 전체를 별궁처럼 공중에 띄워버리면, 귀중한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을 일이 없으려나.
하지만 막상 오라버니의 방문을 아이처럼 좋아하는 레스티아를 보니 그런 짓을 했다가는 미움을 받을 것 같았다.
그들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받거라.”
제라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불쑥 레스티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 이건!”
제라르의 손에 들린 것은 레스티아의 몸통만 한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였다.
“세상에! 제라르 오라버니! 직접 가져다주실 줄 몰랐어요.”
레스티아는 피크닉 바구니를 열어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고마워요! 오랜만에 먹고 싶었거든요. 베르체스터의 주방장이 만든 음식들!”
피크닉 바구니 안에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음식들이 담겨 있었다.
샌드위치와 과일 주스.
레스티아가 어린 시절에 매일같이 즐겨 먹던 것들이었다.
“이상하죠. 며칠 전부터 계속 먹고 싶더라고요.”
황실 주방장에게 비슷하게 만들어 내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베르체스터에서 먹던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분명, 비슷한 재료로 동일한 방법으로 만들었는데도 말이다.
레스티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시언이 제라르를 향해 말했다.
“그 주방장 황궁으로 보내.”
주저 없이 단답이 돌아왔다.
“그러지.”
그 대화를 들은 레스티아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안돼요!”
네 남자의 표정이 동시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레스티아.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그렇다면 당연히 네가 가져야지.
그런데 왜 막는 거야?
하는 의문이 담겨 있는 표정이었다.
레스티아는 한숨을 내쉬며 그 의문에 답했다.
“주방장은 3대째 베르체스터의 사람인걸요. 한 가문의 가신을 그렇게 뺏어 오면 안 되죠. 저는 가끔 이렇게 제라르 오라버니께 부탁하는 걸로 만족할래요. 가족끼리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생기고 좋잖아요?”
네 남자는 ‘으흠.’하고 동시에 침음을 흘렸다.
조금은 이기적으로 굴어도 아무도 무어라 하는 사람이 없을 텐데.
하지만.
“그래. 리티,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레스티아. 그래도 언제든지 생각이 바뀌면 말하렴.”
레스티아가 원한다면 이번에도 그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걱정 마세요! 꼭 필요한 일이 생기면 말할게요.”
레스티아는 빙그레 웃으며 피크닉 바구니를 닫았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들었다.
“아, 그렇지. 우리 오랜만에 피크닉 갈까요?”
“피크닉?”
네 남자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네. 오늘 날씨도 너무 좋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많이 있으니까요. 우리 밖으로 나가요.”
레스티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리시언과 베르체스터 형제들 또한 거절할 수 없었다.
* * *
“와! 역시 날씨가 너무 좋네요!”
레스티아가 향한 곳은 황궁 안에 있는 호숫가였다.
고요한 호숫가 주변에는 황궁 정원사가 관리해 놓은 알록달록한 꽃나무들이 계절감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피크닉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딱 알맞은 장소였다.
“좋아. 이쯤이 딱 좋겠어요.”
레스티아가 그늘이 진 커다란 나무 아래를 가리켰다.
그러자 뒤를 따라온 시종이 레스티아가 가리킨 자리에 레이스로 만들어진 널따란 피크닉 돗자리를 깔고 물러났다.
“자, 거기서 뭐 해요? 다들 여기로 와요!”
레스티아가 먼저 자리에 앉아 밝게 웃으며 피크닉 돗자리가 깔린 바닥을 팡팡 두드렸다.
“예전에 베르체스터 영지에서 이렇게 다 함께 피크닉 나왔던 거 기억하세요? 그때 생각이 나서 너무 즐거워요.”
“…….”
“…….”
“…….”
“…….”
……레스티아만 즐거웠다.
리시언과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이제 이런 피크닉 자리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시커먼 사내놈들과 레이스로 만들어진 돗자리에 옹기종기 앉아야 한다니.
예전에는 지금보다 어리기라도 했지.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이런 행동은 사교활동을 많이 해온 조엘조차 조금 꺼려지는 행동이었다.
그랬지만.
“어? 다들 싫으신 거예요? 죄송해요. 저 혼자 들떠서는…….”
레스티아가 시무룩해 하는 모습을 보이니 앉을 수밖에.
“그래. 옛날 생각나네.”
먼저 리시언이 당연하다는 듯이 레스티아의 옆자리에 자리 잡았다.
그러자 마티어스가 주어진 두 자리 중 한자리라도 차지하겠다는 듯 냉큼 레스티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럼 남은 옆자리는 내 꺼!”
“이런.”
조엘은 아차 싶었는지, 지을 수 있는 가장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맞아. 레스티아. 피크닉을 하기에 딱 좋은 곳을 골랐는걸. 베르체스터 영지보다 좋은 풍경이야.”
제라르는 짧게 숨을 내뱉고 레스티아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
하여간 베르체스터의 막냇동생은 항상 이랬다.
안타까울 정도로 원하는 것이 없다가도, 허를 찌르는 요구를 해오는 데 능숙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스티아는 즐거운 표정으로 피크닉 바구니를 열어 접시에 보기 좋게 음식을 담아냈다.
“으흠! 오늘은 피크닉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겠어요.”
스쳐 지나가듯 한 말이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레스티아와 함께 했던 첫 피크닉은 전쟁 소식에 엉망이 되었었지.
어린 레스티아가 무척 기대했던 피크닉이었을 텐데.
생각해보면 레스티아가 원하는 것을 속 편히 쥐여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레스티아.”
리시언이 손을 뻗어 레스티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늘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네가 원하는 날 이렇게 나오자.”
“진짜죠? 약속이에요!”
이런 작은 말 하나에도 기뻐하는 모습이라니.
레스티아를 지켜보는 네 남자는 가슴 한구석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응? 왜 다들 저를 그렇게 봐요?”
레스티아는 짠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네 남자를 보며 의아해했다.
“아, 아니야. 리티. 샌드위치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레스티아. 신경 쓰지 말고 그것부터 어서 먹어보렴.”
조엘과 마티어스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알겠어요. 오라버니들도 어서 드세요. 리시언도요!”
레스티아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맛있어.”
역시, 이 맛이었다.
베르체스터에서 지낼 때 먹던 바로 그 맛.
레스티아의 표정이 행복하게 변하자 레스티아를 지켜보던 네 남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자, 레스티아. 이것도 먹어보겠어?”
조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가져온 후식을 내밀었다.
“어, 조엘 오라버니 그건 뭐예요?”
“스폴리아띠네 글라사떼라는 과자야. 페스트리의 일종이지.”
레스티아는 익숙하게 조엘이 건넨 과자를 받아서 입속에 쏙 넣었다.
겹겹이 층을 이루는 결이 바삭바삭하고 달콤한 시럽이 쫀득쫀득 한 것이 정말로 맛있었다.
저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온다.
“역시 조엘 오라버니는 미식가예요!”
마티어스가 그 모습을 보며 툴툴댔다.
“조엘, 너 또 치사하게 혼자 그런 걸 챙겨오고…….”
“마티어스. 그런 말을 할 시간에 레스티아에게 주스라도 따라 주지그래?”
“너, 진짜.”
라고 성을 내면서도 마티어스의 몸은 착실하게 주스를 따랐다.
“그래그래. 이거 마셔! 리티! 천천히 먹어!”
레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스를 손에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마티어스 오라버니.”
하지만 한 모금도 입 안으로 넘길 수 없었다.
“웁……!”
갑작스레 헛구역질이 올라온 것이다.
“레스티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리시언과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화들짝 놀랐다.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레스티아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레스티아는 딱히 가리는 음식도 없었고 알레르기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먹은 음식은 어려서부터 늘 먹었던 베르체스터의 음식이지 않은가.
조엘이 건넨 후식 또한 이미 조엘이 먼저 먹어보고 건넨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 별것 아니에요.”
네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레스티아를 바라보자, 레스티아가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우욱……! 욱!”
노력과 무색하게 연이어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레스티아!”
네 남자는 괴로운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레스티아를 바라보며 굳어버렸다.
시간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이제 레스티아는 황후다.
음식에 독이 들었을 수도 있다.
어떤 간악한 자가 흉계를 꾸몄을 수도 있는데.
지나치게 안일하게 굴지 않았던가.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주방에 누군가 손을 썼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괘, 괜찮아요.”
레스티아가 또다시 애달픈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맑고 명랑한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겨우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얼굴에도 괴로운 기색이 역력하다.
“그, 그냥 갑자기 속이 안 좋은 것뿐이에요. 이상하다. 왜 이러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맛있게 잘 먹었는데…… 욱!”
하지만 레스티아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채, 또다시 구역질을 내뱉었다.
총명하게 반짝거리던 은회색 홍채가 괴로워하며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순간, 네 남자의 머릿속에 동일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해석하는 자의 마법 부작용.
고난과 불행.
설마.
그 의미심장한 부작용이 이제야,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걸까?
“……아, 안 돼. 레스티아.”
리시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레스티아를 품에 안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