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9화
베르체스터의 혼담–조엘 (2)
“나를 미행했나?”
아이니아는 바짝 날을 세우고 조엘을 경계했다.
“송구합니다. 왕녀님. 황궁은 넓습니다. 왕녀님께서 타국에서 길을 잃으시면 곤란하실 것 같아, 걱정되어 실례를 무릅쓰고 따라왔습니다.”
조엘은 허리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이제부터 당신을 에스코트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하지만 아이니아는 조엘을 노려볼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조엘의 눈매가 더욱더 부드럽게 휘었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적어도, 지금은 저와 함께 가시는 것이 안전할 겁니다.”
“…….”
하긴, 이대로 제국의 황실 기사단에 연행되면 그것으로 탈출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아이니아는 결국 조용히 조엘의 뒤를 따랐다.
“왜 나를 미행했지?”
“말씀드렸다시피, 걱정되어 그랬습니다.”
“허튼소리.”
“그렇게 말씀하시니 속상하군요.”
조엘이 무해하게 미소 지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방비하게 만들어 버리는 미소였다.
하지만 아이니아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대는 천사 같은 얼굴 뒤에 의도를 감추는 데 능수능란하군.”
조엘은 조금 놀랐다.
그의 완벽한 미소에서 속내를 읽어내는 사람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쩐다.
조엘은 아이니아 왕녀를 바라봤다.
곧은 눈빛에서 쉽게 꺾이지 않을 고집이 느껴진다.
이런 타입의 사람은 적당히 좋은 말로 협상하려 해봤자 역효과가 날 뿐이다.
결국 조엘은 직접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왕녀님께서 문제를 일으키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연회는 무탈하게 마무리되었으면 합니다.”
레스티아가 곤란해질 일이 없도록.
“그러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연회장으로 돌아가시지요.”
조엘이 한껏 자상하고 포근한 어조와 태도로 부탁했다.
하지만 아이니아는 조엘의 말에서 제안을 따르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리고 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봤다.
“그거. 부탁이 아니군.”
아이니아는 조엘의 시선에 눈을 맞추며 거부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나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어.”
그러고는 곧바로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들더니, 주저 없이 조엘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허를 찌르는 민첩하고 신속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아이니아가 간과한 것은 눈앞에 있는 자가 공기의 움직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라는 거였다.
“……정말 곤란하군요.”
촤악-.
조엘이 눈짓하자 바람으로 만들어진 채찍이 그대로 단검을 들고 있는 아이니아의 손을 쳐냈다.
“윽!”
아이니아의 단검이 길을 잃고 속절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왕녀님께서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분이신가 봅니다.”
조엘의 목소리 톤이 위협적으로 낮아졌다.
하지만 아이니아는 포기하지 않고 단검을 주워들었다.
조엘은 인상을 썼다.
무예에 조예가 깊다면, 조금 전의 일로 더 이상의 공격은 의미 없다는 걸 알았을 텐데, 단검을 주워서 무엇을 할 생각인지…….
조엘은 아이니아가 이 다음번에는 어떻게 공격을 해올 것인지 탐탁지 않은 눈으로 지켜봤다.
그런데 단검은 조엘을 향하지 않았다.
검 끝은 호선을 그리며 아이니아 그녀의 목으로 향했다.
“……!”
그 사실을 알아차린 조엘이 기민한 동작으로 아이니아의 두 팔을 제압해 구속했다.
단검은 또다시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조엘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방금, 무엇을 할 생각이셨습니까?”
“하하. 이상한 걸 묻는군, 단검은 적을 벨 수도 있지만, 자신을 해할 수도 있는 물건이다.”
자결할 생각이었다는 말이었다.
“스스로를 해할 생각이었다는 말입니까? 대체, 왜?”
아무리 강제 혼사가 싫다고 해도 그렇지.
일국의 왕녀가 이렇게 쉽게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하다니.
조엘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냐고 물었나? 나는 허울뿐인 왕녀다. 부왕의 명령으로 평생을 아무것도 못 하며 살았지. 명령을 어기면 짐승처럼 맞아야 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어. 하지만 견디고 견뎠지.”
아이니아가 자조하듯 웃으며, 울듯이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늙은이의 후처로 살다 죽으라더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스스로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
“…….”
조엘은 자신이 붙들고 있는 왕녀의 팔을 내려다봤다.
이제 보니 아물지 못한 피딱지 위에 덕지덕지 화장품이 발라져 있었다.
멍과 흉터로 얼룩진 상처투성이의 팔뚝이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막냇동생을 처음 만났을 때, 레스티아의 팔뚝도 이랬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삼촌에게 학대받으며 살았던 동생과 비슷한 여자라.
조엘은 아이니아가 조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군요.”
조엘은 아이니아를 구속하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제가 왕녀님을 돕겠습니다.”
곧바로 아이니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탈출하도록 도와주겠다는 말인가? 내가 나중에 꼭 이 은혜는 갚도록 하겠네.”
“아니요. 왕녀께서는 오늘의 연회가 마무리될 때까지 황궁 밖으로 벗어날 수 없으십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조엘은 고개를 저었다.
“연회에 참석해 주십시오. 제게 왕녀님의 혼약을 파기할 방법이 있습니다.”
“뭐? 그게 무슨 방법이지?”
아이니아의 질문에 조엘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저와 결혼하시면 됩니다. 왕녀님의 혼약을 제가 가로채겠습니다.”
결혼이라니.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아이나가 입을 떡 벌렸다.
“……결혼? 그대와? 그대는 미친 건가?”
조엘의 입가에서 피식 미소가 새어 나왔다.
왕녀도 자신도 서로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그래, 미쳤는지도.
확실히 오늘은 좀 이상한 날이었다.
“왕녀님의 신분은 제가 결혼을 하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후작가에 타국의 부마 자리를 내어주고 그의 세력을 키우느니, 제가 취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유용하고 말입니다.”
“뭐?”
“예. 왕녀님께 계약 결혼을 제안하겠습니다. 제 부인이 되어 원하시는 것을 하며 사십시오. 그 무엇도 막지 않겠습니다.”
조엘의 말에 아이니아는 못 박힌 듯 굳어있다가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나야 나쁘지 않아.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대가 밑지는 장사 같은데.”
“저는 애초에 철저한 계약 관계로 이루어진 결혼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믿지 못하지만, 계약서는 믿을 수 있으니까요.”
조엘은 빙그레 웃으며 눈짓으로 아이니아가 들고 있던 단검을 가리켰다.
“그리고 목숨이 걸린 계약은 무척이나 귀한 계약이지요. 어찌하시겠습니까?”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군. 그래,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두 사람은 연회장으로 걸어가며 면밀한 계획을 주고받았다.
더불어 결혼 계약서에 담길 내용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로 원할 때 이혼할 것.
아이는 가지지 않을 것.
사랑하지 않을 것.
등등의 다양한 이야기였다.
* * *
건국제 다음 날.
조엘 베르체스터에게 스캔들이 터졌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미인들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던 그가 건국제 연회장에서 만난 이국의 왕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세기의 사랑.
운명적 만남.
온갖 달콤한 말들로 꾸며진 이야기가 사교계에서 회자되었다.
“글쎄! 두 사람이 첫눈에 반해서 테라스에서 아주 찐한 스킨십을 하고 계셨대요!”
“어머, 어머! 저도 들었어요! 얼마나 다급했는지, 드레스도 찢어발겨진 상태였다고……!”
“말도 안 돼! 신사 중의 신사이신 조엘 님이 그런 짐승남이실 줄 몰랐는데!”
“낮에는 져주고 밤에는 이기는 남자였던 거지!”
“꺄악!”
“그런데 왕녀와 결혼을 약속한 후작이 이 스캔들 문제로 난리를 쳤다면서요?”
“그런데 뭐 어쩌나, 결혼 서약을 한 것도 아니고. 왕녀 측도 후작보다는 조엘 님을 부마로 얻게 된 것을 기뻐했다던데.”
“하긴, 베르체스터를 사위로 삼는 거잖나.”
“세상에, 아무튼 정말 로맨틱해요!”
소문은 조엘이 원했던 대로 커지고 화려해지고 있었다.
* * *
조엘은 아이니아를 곧장 레스티아에게 소개했다.
레스티아는 당혹스러웠다.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면 꼭 소개해달라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 하루 만에 상대를 만들어 올 줄이야.
“……저기. 두 분, 어떻게 만나셨어요?”
레스티아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자 조엘이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젯밤 왕녀께서 제가 쉬고 있는 테라스로 불쑥 찾아오셨지요.”
“아이니아 왕녀께서 먼저요?”
아이니아가 역시 밝게 웃으며 첨언했다.
“예. 황후 폐하. 실수로 조엘 님이 계신 테라스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재빨리 빠져나왔으나, 조엘 님께서 열정적으로 제 뒤를 쫓아 오시더군요.”
“네? 조엘 오라버니께서요?”
믿을 수 없는 아이니아의 증언에 레스티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엘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굴었다니.
“네. 결국 저는 조엘 님께 손목을 붙잡혔지요. 놓아달라고 해도 놓아 주지 않으시더군요.”
“하하! 놓아버리면 금방이라도 제 곁을 떠날 것 같아서,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답니다.”
조엘과 아이니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쿡쿡 웃었다.
생략한 것들이 많았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서로 제법 호흡이 잘 맞는 계약 상대였다.
“이런 사유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답니다. 황후 폐하.”
“……조엘 오라버니.”
레스티아가 물끄러미 조엘을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조엘은 혹시 레스티아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축하드려요!”
라며 진심으로 조엘을 축하했다.
“조금 신기해요. 조엘 오라버니가 이런 식으로 사랑에 빠질 줄은 몰랐어요. 항상 신중하시니까요.”
“그렇습니까?”
“네. 하지만 첫눈에 호감을 느낀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어요. 분명 강렬한 끌림이 있었을 거예요.”
레스티아는 사람이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리시언을 봤을 때, 그 반짝이는 황금색 홍채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운명을 믿었다.
“그럼, 두 분, 축하드려요. 결혼식을 기대할게요!”
레스티아는 진심으로 조엘의 선택을 축하했다.
* * *
얼마 후, 아이니아와 조엘은 완벽한 결혼 계약을 체결했다.
“그럼, 의무를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인.”
“나 역시 의무를 다하도록 하지. 잘 부탁하네. 남편.”
완벽한 계약이었다.
조엘은 레스티아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이니아를 사랑하는 척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레스티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부터인가 진짜로 아이니아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건 아이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부부로 지내는 하루하루가 늘어날 때마다 계약은 의미 없는 종잇장이 되었지만…….
그건 조금 나중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