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8화
베르체스터의 혼담–조엘 (1)
모르카티움 제국의 건국제.
전 세계의 귀빈들을 초대하는 중요한 행사 날이었다.
음식도 음악도,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사람도 모든 것이 완벽했고, 연회장 곳곳에서는 대화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레스티아는 그 중심에 있었다.
이제 황궁의 생활에 잘 적응한 레스티아는 누가 봐도 일국의 황후로서 조금의 부족함도 없어 보였다.
조엘은 그런 레스티아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 정말 훌륭한 연회입니다.”
“고마워요. 조엘 오라버니. 부디 오라버니도 연회를 즐겨주세요.”
“하하, 이미 충분히 즐기고 있답니다.”
“음, 하지만 조엘 오라버니는 이번 연회에도 파트너 없이 오셨잖아요? 즐기고 계신 거 맞아요?”
레스티아가 조엘의 행보에 의문 섞인 농담을 건넸다.
제라르도 마티어스도 좋은 짝을 만나서 오늘도 이렇게 함께 연회장에 참석했는데.
조엘만 혼자 온 것이 신경 쓰였다.
이상한 일이지.
형제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조엘이었는데.
조엘은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레스티아는 그 점이 걱정스러웠다.
사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조엘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되, 진짜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레스티아에게는 예외였지만…….
레스티아는 조엘이 자신 말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조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길 뿐이었다.
“걱정 마세요, 황후 폐하. 일뿐만 아니라 연회도 충분히 즐기고 있습니다. 그저, 제가 인기가 없는 것뿐입니다.”
“말도 안 돼요! 조엘 오라버니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요.”
“하하!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게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황후 폐하께 제일 먼저 소개시켜드리도록 하지요.”
“……꼭이에요. 빠른 시일 안에요!”
“노력하겠습니다.”
조엘은 믿음직하게 대답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레스티아를 알현하기 위해 타국의 사신들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 연회는 황후의 주관이었다.
그러니 레스티아의 말 상대를 독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엘 님! 함께 춤을 추시겠어요?”
조엘이 뒤로 물러서자 영애들이 함께 춤을 추자며 접근했다.
하지만 조엘은 매너 좋게 거절 의사를 밝히고는 홀로 테라스로 향했다.
점점 희미해지는 음악 소리.
적막감과 고독감이 안정감을 준다.
사교적인 활동에 익숙한 조엘이었으나, 때로는 피로감을 느꼈다.
속내를 미소로 위장하기에 벅찬 날.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조엘은 테라스의 커튼을 닫고는 홀로 와인잔을 기울이며 어둑해진 밤하늘을 바라봤다.
무엇이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새카만 하늘.
그 하늘이 자신의 속내와 닮은 것 같았다.
‘레스티아에게 거짓말을 해버렸군.’
레스티아에게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소개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아마 지키지 못할 것이다.
여동생을 속였다는 생각에 입가가 썼다.
조엘은 베르체스터 형제 중에서도 유독 남녀 간의 관계를 믿지 못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남편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그러니까.
결혼이라는 계약관계를 철저하게 이행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조엘은 그 어떤 이에게도 곁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음?”
조엘이 와인 잔에 담긴 내용물을 모두 비웠을 때였다.
테라스의 커튼이 열리며 불쑥 누군가가 테라스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사람이 있었군.”
여자였다.
육감적인 몸을 감싸고 있는 화려한 드레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분홍색 머리카락이 한 송이의 화려한 꽃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함과 대조적으로 무척이나 차분한 밤색 홍채가 조엘을 빤히 응시했다.
조엘은 잠시 멈칫했다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헤리온 왕국의 아이니아 왕녀님을 뵙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여자는 건국제 연회에 참석한 헤리온 왕국의 왕녀였다.
분홍 장미를 실로 뽑아낸 것 같은 머리카락은 헤리온 왕족의 특징이었으니, 몰라볼 수가 없었다.
왕녀는 대뜸.
“잘생겼군.”
이라고 말하더니만.
“인사는 됐네. 이쪽은 바빠서 말이야. 잠시 실례하겠네.”
라며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조엘이 무어라 말릴 새도 없이 곧바로 자신이 입고 있는 풍성한 드레스 밑단을 찢었다.
부우욱.
한 번에 천이 찢기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드레스였던 천 조각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왕녀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조엘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아이니아 왕녀가 드레스를 찢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을 훌렁 벗어 버린 것이다.
왕녀는 새하얀 속드레스만 입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아. 미안하네. 치렁치렁한 옷을 입는 건 영 불편해서 말이지.”
불편하다고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드레스를 찢다니.
헤리온 왕국의 문화는 이런 건가?
조엘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곧바로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아이니아 왕녀의 어깨 위로 둘러주었다.
“밤공기가 차갑습니다. 불편하더라도 외투 정도는 걸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이니아는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고맙군. 그럼 하나만 더 부탁하지. 부디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하지 말아주게.”
왕녀는 조엘에게 일방적인 부탁을 한 채, 테라스 위로 성큼 올라섰다.
그러고는 단정하게 묶어 올렸던 머리를 풀어헤쳤다.
머리에 올려져 있던 장신구들도 드레스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속박에서 벗어난 분홍색 머리카락이 밤공기에 자유롭게 흐트러졌다.
달빛을 받은 아이니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와 동시에, 아이니아는 4층 높이의 테라스에서 아래로 주저 없이 뛰어내렸다.
“왕녀!”
조엘이 곧바로 바람의 마법을 썼다.
그 덕에 아이니아는 아주 천천히 지면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조엘의 목소리가 커졌다.
갑자기 왕녀가 들이닥쳐서 옷을 벗지를 않나, 자살이라도 하듯 테라스 아래로 뛰어내리지 않나, 이게 무슨 짓인지.
아이니아의 돌발적인 행동들이 조엘이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니아는 눈을 깜박이며 감탄사를 내뱉을 뿐이었다.
“오! 방금 무엇을 한 거지?”
“…….”
조엘은 곧바로 바람의 마법을 써서 테라스 아래로 향했다.
아이니아 왕녀는 이제 알아차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바람의 마법이군. 그대가 조엘 베르체스터인가?”
“예. 그렇습니다.”
조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아이니아 왕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아이니아 왕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굳이 마법까지 써서 도와줄 필요는 없었는데.”
“테라스에서 뛰어내리셨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왕녀께서는 국빈이십니다. 탈이 생기면 제가 무척 곤란하답니다.”
“그러니까, 서로 못 본 척하자고 하지 않았나. 도와줄 필요는 없었네. 이 정도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말에 조엘은 머릿속에 헤리온 왕국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분명, 아이니아 왕녀는 일처다부제 문화를 가진 헤리온의 13번째 왕녀였지. 5번째 후궁의 자식이라고 했던가.’
어린 시절에는 무예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니아 왕녀에게 그 재능을 대외적으로 펼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후계자 자리에서 한참이나 먼, 13번째 왕녀에게 힘이 실리는 것을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헤리온 왕국이 정한 아이니아 왕녀의 쓰임은 결혼 동맹을 위한 장기 말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니아 왕녀가 제국에 온 이유는…….
‘한 달 후에, 다 늙은 로지암 후작과 재취를 한다고 했던가.’
로지암 후작은 이제 70을 바라보는 노인인데.
조엘은 눈앞에 있는 이 싱그러운 장미 같은 여자가 그런 노인의 곁에 서는 것이 어째 탐탁지 않게 느껴졌다.
탐스러운 꽃을 꺾어다가 말려 죽이는 모양새이지 않은가.
‘혹시, 결혼하지 않고 도망치려는 건가.’
조엘은 어렵지 않게 지금 아이니아가 어떤 일을 벌이려고 하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테라스 위쪽에서 아이니아 왕녀를 추적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니아 왕녀님! 어디에 계십니까!”
“왕녀님이 사라지셨다!”
“테라스에서 화장을 고치겠다더니, 그 사이에 어디를 간 거야! 너는 저쪽 테라스를 수색해보도록!”
“왕녀가 사라지면 문제가 커져!”
아이니아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더는 조엘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뒤돌아섰다.
그리고 도망치듯 달리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한다.”
조엘은 괜히 쓸데없는 일에 자신이 엮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역시.
아이니아 왕녀는 이 건국제 연회장에서 죽어서도, 도망쳐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자칫 잘못하면 외교 문제로 번져서 귀찮은 일이 더 생길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건국제는 대대로 황후가 관리하는 것.
레스티아가 개최한 첫 건국제의 연회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됐다.
“이런. 곤란하군.”
조엘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느긋하게 아이니아 왕녀의 뒤를 따라갔다.
아이니아 왕녀는 미리 탈출 경로를 계획해둔 듯, 정확하게 마구간을 향해 움직였다.
그녀는 남몰래 말을 훔쳐서 달아날 생각이었다.
‘이제 헤리온 왕국의 왕녀로 살지 않을 거다.’
그 결심은 오늘 밤 연회에서 신랑감으로 내정된 늙은 후작의 면상을 보는 순간 더욱 굳건해졌다.
해보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그런 늙은이와 결혼해서 타국에서 죽으라니!
차라리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이 옳았다.
아이니아는 계획대로 마구간에 도착했다.
하지만 황궁의 말들이 그렇게 허투루 관리될 리가 없었다.
아이니아는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당신은 누구시오?”
마구간 지기들은 아이니아의 이상한 옷차림새에 의문을 표했다.
속치마만 입고 남성용 외투를 걸치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수상하지 않은가.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면, 황실 기사단을 부르겠습니다.”
아이니아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그때 아이니아가 벌이고 있던 일련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조엘이 나섰다.
“그분의 신분은 내가 보장하지. 잠시 밤 산책을 즐기고 계신 귀빈이라네.”
“아! 조엘 님!”
마구간의 모두가 조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제국의 국민 중 조엘 베르체스터를 모르는 이는 없으니 말이다.
천사 같은 얼굴과 미소를 가진 바람의 마법사.
“길을 잃으셨군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이니아 왕녀님.”
조엘이 아이니아 왕녀를 바라보며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